공주님 시집가는 길
쑹판(松潘)은 고대에는 송주(松州)라 불렸던 고장으로, 쓰촨 지방을 통해 티베트로 들어가는 관문 도시 중 하나였다.
그 유명한 '차마고도(茶马古道)'의 관문이기도 하다.
이 고장이 유명해진 건 토번(吐蕃, 티베트) 왕국 33대 왕 '송첸캄포(སྲོང་བཙན་སྒམ་པོ་, 松赞干布)'와 당나라 문성공주(文成公主)의 혼인 때문이다.
송첸캄포는 티베트 고원을 통일해 토번 왕국을 세운 정복 군주이자 당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사회 제도와 정부 시스템을 정비하고, 티베트 문자를 창제한 성군이었다.
송첸캄포의 통치 아래 티베트는 '토번'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대륙의 역사에 깊게 관여하게 된다.
티베트를 통일한 송첸캄포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라는 취지의 서한을 사신에게 들려 보냈는데, 당나라의 회신은 간단했다.
대차게 까인 것도 모자라 당나라 국경인 송주(쑹판)에서 사신이 억류되는 사달이 일어났다.
권위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한 송첸캄포는 불같이 화를 내며 군대를 일으켰다.
거친 고원 환경에서 단련된 티베트인들의 용맹은 두말하면 입이 아프다.
이들이 조직적인 무력을 발휘하니 태평성대를 누리던 당나라 군대로서는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대제국을 이룩한 당나라였지만 생산력과 물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티베트 정벌은 언감생심이었다.
고등학교 때 역사 선생님의 실감 나는 묘사 덕분에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당나라는 그 '주먹'을 제대로 얻어맞고 헤롱거리게 된다.
변방 오랑캐로 여겼던 토번에게 망신을 당하는 걸 넘어, 영토 주권마저 불확실해진 상황이 되자 당나라 조정은 부랴부랴 화친을 제안했다.
그 결과 당 태종의 딸 중 하나였던 문성공주가 송첸캄포의 비로 낙점되어 토번으로 떠나는데, 이때 공주가 티베트 고원으로 들어선 길이 또한 송주였다.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송첸캄포와 문성공주의 금슬은 매우 좋았다고 전해진다.
송첸캄포는 문성공주를 위한 사원을 지었으니, 그게 바로 티베트 라싸의 두 번째 심장, 조캉 사원이다.
문성공주가 토번으로 시집갈 때 관음보살상을 하나 들고 갔는데, 조캉사원에 이 불상을 봉안했다.
신흥 권력인 송첸캄포는 당나라의 권위를 등에 업고 지방 호족들을 복속시킬 복안이 있었고,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문성공주는 불교 국가인 토번의 백성, 귀족들에게 '먹히는' 카드였다.
실제로 아름답고, 어질고, 현명했던 문성공주는 송첸캄포는 물론 토번 백성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으며, 그녀의 공덕을 기리는 노래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알고 보면 참 재미있는 역사를 품은 고장인데, 여행객들에게 그게 뭐가 중요할까.
사실 쑹판은 청두에서 구채구, 황룡을 가는 길에 무조건 지나게 되어 있는 곳이다.
도시 자체는 크게 볼거리가 없는 심심한 곳이지만, 이 도시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유가 딱 하나 있으니 바로 '호스 트레킹(Horse Trekking)'이다.
쑹판 인근의 쉐바오딩(雪宝顶, 설보정)이라는 설산까지 약 2박 3일간 말을 타고 트레킹 하는 여행 상품이다.
마부, 요리사 등으로 구성된 가이드 팀이 손님 4~8명을 인솔해 쓰촨 성 고산지대를 유람한다.
말 등에 앉혀놓고 1시간 정도 돌아다닌 후 '체험 끝'을 선언하는, 앙꼬 없는 찐빵같은 체험이 아니라 2박 3일, 혹은 3박 4일 간 말 등 위에서 살아야 하는 독특한 체험이다.
과거 차마고도를 오가던 마방이 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론니플래닛에서 이 프로그램의 존재를 보자마자 '여긴 꼭 가야 한다'라고 다짐했던 터였다.
쑹판으로 향하는 버스는 오전 7시 반에 출발했다.
온통 뿌옇게 찌푸린 성도의 아침 안개를 가르며 사람들이 일터로 향하고 있었다.
푸른 인민복을 입고 회색빛 하늘 밑에 시커멓게 죽어있는 도시의 아침을 달리는 사람들은 학부 수업시간에 봤던 70년대 중국 선전영화 속 이미지 그대로였다.
청두를 벗어난 버스는 두장옌(陶江淵)과 청성산(靑成山)을 비껴지나 산길에 접어들었다.
깔끔하게 포장이 잘 된 길이라 불편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른 아침, 허리 밑으로 안개를 두른 채 머리만 빼꼼히 내놓은 산들이 쭉 늘어선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10시가 넘으니 어느새 높이 솟아오른 태양이 공기를 데워, 두꺼운 안개와 구름을 몰아냈다.
운무 아래 숨어있던 시골 풍경은 낙후하고 초라했다.
깊은 산골로 들어선 버스는 좌우로 출렁거리며 험한 길을 꾸역꾸역 오르내렸다.
잠시 들른 휴게소 내 정비소에 '가수(加水)'라는 글자가 쓰여있고, 차들이 줄을 서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버스 기사가 씩 웃으며 알려줬다.
정비를 마친 버스는 다시 구절양장(九折羊腸) 같은 길에 올랐다.
버스 중간에 앉은 아낙에게 안겨있던 아이가 참지 못하고 버스 바닥에 구토를 했고, 실내는 비린내로 가득 찼다.
내 옆자리에 앉았던 군인은 결국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토악질을 시작했고, 버스 안은 이내 사방에서 토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트레킹 팀은 다음날 오전 8시에 집결했다.
여행사 사무실 앞 공터는 수많은 트레킹 팀이 가이드와 만나 채비를 하느라 시장바닥 같았다.
나와 3박 4일 간 함께한 세 사람은 중국인이었다.
수다 떨기 좋아하는 중국사람 특성상 사무실에서 만나자마자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세 명은 엊그제 구채구에서 만나서 의기투합, 쑹판까지 함께 온 사람들이었다.
라오와이(老外, 외국인) 앞에서 뭔가 주눅 들어 보이는 그 시절 중국 인민이 아니라,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엘리트들이었다.
해는 일찌감치 떴지만 주위에 둘러선 산에 가려 무척 추운 아침 9시, 드디어 오와 열을 맞춰 출발했다.
야영할 때 쓸 천막과 모포들을 안장 위에 잔뜩 얹어서인지 말 위에 앉은 느낌은 흡사 소파에 앉은 듯 편안했다.
대신에 말안장이 높아지니 발 뒤꿈치가 말 배에 닿지 않는다.
어떻게 박차를 가하나 했더니, 몸을 한 번 튕기면서 고삐를 채면 알아서 터덜터덜 앞으로 걸어갔다.
나중에 보니 이놈들은 내 말을 들었던 것이 아니라, 나를 담당한 가이드의 명령에 따라 달리고 섰던 것이었다.
영리한 가이드는 내가 박차를 가할 때마다 '치릿'하는 소리를 냈다.
10월 하순의 일교차는 혹독했다.
30분 정도 산을 오르니 해가 나면서 공기가 더워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가이드가 몸 좀 녹이라며 술을 한 병 꺼내 돌렸다.
한 모금 마시니 뱃속이 화끈한 화주다.
오전 내내 꽝꽝 얼었던 몸이 조금씩 풀렸다.
나를 담당한 가이드는 벙어리였다.
다른 가이드들은 그를 '야바(벙어리)'라고 불렀다.
갓 서른이 됐다는데, 아무리 봐도 불혹은 족히 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일정 내내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그는, 끊임없이 "으어, 으어!"라는 소리와 함께 수어(手語)로 말을 걸었다.
그의 수어는 차라리 보디랭귀지에 가까웠다.
그러니 수어를 모르는 나도 대충 알아먹을 수 있는 의사 표현을 해줬다.
대략 이런 뉘앙스였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탄 하얀 말은 천막을 하나 지고, 그 위에 나를 싣고도 뛰기 시작하면 일사천리요, 가파른 오르막길도 투레질 한 번 없이 씩씩하게 오르는 준마였다.
오후 세 시경, 시냇가 옆의 널따란 공터에서 대장인 따홍(大洪)이 팀을 멈춰 세웠다.
캠프를 세우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린다 했다.
가이드들은 일사불란하게 천막을 쳤고, 돌을 모아 아궁이를 만든 후 시커멓게 탄 솥을 걸고 요리를 시작했다.
저녁 메뉴는 수제비였다.
밀가루를 반죽해 손으로 뜯어내 끓는 물에 던져 넣고 온갖 채소와 함께 끓여냈다.
시커먼 남자의 손이 야무지게 움직여 만두피처럼 얇은 수제비를 떠내는 광경은 눈을 홀릴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감자와 양파 정도만 들어간 소박한 수제비였는데, 기가 막히게 맛있었던지라 다들 배가 터지게 먹었다.
식사를 마친 시간은 7시 반이었는데, 사위는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렸다.
무뚝뚝한 젊은 가이드 '양춘'이 모닥불을 피웠고, 쾌활하고 예쁘장하게 생긴 '맹군'이 천막 안에서 술을 한 병 들고 나왔다.
따홍 말로는 알코올 도수가 60도 이상이라고 했다.
뱃속이 타들어갈 정도록 독했지만, 묘하게 고소한 맛이 입 안에 감도는 술이었다.
새소리도 잦아든 산속의 밤, 모닥불이 타닥거리는 소리와 천막 옆으로 흐르는 시냇물이 졸졸거리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나만 빼고 다들 입담이 좋았던 지라 술이 들어가자 이내 흥이 올랐고, 맹군이 목청을 가다듬더니 노래를 시작했다.
폭포 아래서 득음이라도 한 듯, 청량하고 날카로운 소리로 애잔하게 꺾는 민요였다.
대수롭지 않게 흥얼거리는 노랫가락은 가수라 부르기 부족함이 없었다.
따홍이 껄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