쑹판
쑹판(松潘)은 고대에는 송주(松州)라 불렸던 고장으로, 쓰촨 지방을 통해 티베트로 들어가는 관문 도시 중 하나였다.
그 유명한 '차마고도(茶马古道)'에 속한 곳이기도 하다.
이 고장이 유명해진 건 토번(吐蕃, 티베트) 왕국의 33대 왕인 '송첸캄포(སྲོང་བཙན་སྒམ་པོ་, 松赞干布)'와 당나라 문성공주(文成公主)의 혼인 때문이다.
송첸캄포는 티베트 고원을 통일해 토번 왕국을 세운 정복 군주이자 당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사회 제도와 정부 시스템을 정비하고, 티베트 문자를 창제한 성군이었다.
송첸캄포의 통치 아래 티베트는 '토번'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대륙의 역사에 깊게 관여하게 된다.
티베트를 통일한 송첸캄포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라는 취지의 서한을 사신에게 들려 보냈는데, 당나라의 회신은 간단했다.
대차게 까인 것도 모자라 당나라 국경인 송주(쑹판)에서 사신이 억류되는 사달이 일어났다.
자신의 권위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한 송첸캄포는 불같이 화를 내며 군대를 일으켰다.
고원의 거친 환경에서 단련된 티베트인들의 용맹은 두말하면 입이 아플 지경인데, 이들이 조직적인 무력을 발휘하니 태평성대를 누리던 당나라 군대로서는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대제국을 이룩한 당나라였지만 생산력과 물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티베트 정벌은 언감생심이었다.
고등학교 때 역사 선생님의 실감 나는 묘사 덕분에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좌우간, 당나라는 그 '주먹'을 제대로 얻어맞고 헤롱거리게 된다.
변방의 오랑캐로 여겼던 토번에게 망신을 당하는 걸 넘어, 영토 주권마저 불확실해진 상황이 되자 당나라 조정은 부랴부랴 화친을 제안했다.
그 결과 당 태종의 딸 중 하나였던 문성공주가 송첸캄포의 비로 낙점되어 토번으로 떠나는데, 이때 공주가 티베트 고원으로 들어선 길이 또한 송주였다.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송첸캄포와 문성공주의 금슬은 매우 좋았다고 전해진다.
송첸캄포는 문성공주를 위한 사원을 지었으니, 그게 바로 티베트 라싸의 두 번째 심장, 조캉 사원이다.
문성공주가 토번으로 시집갈 때 관음보살상을 하나 들고 갔는데, 조캉사원에 이 불상을 봉안했다.
신흥 권력인 송첸캄포는 당나라의 권위를 등에 업고 지방 호족들을 복속시킬 복안이 있었고,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문성공주는 불교 국가인 토번의 백성, 귀족들에게 '먹히는' 카드였다.
실제로 아름답고, 어질고, 현명했던 문성공주는 송첸캄포는 물론 토번 백성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으며, 그녀의 공덕을 기리는 노래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알고 보면 참 재미있는 역사를 품은 고장인데, 여행객들에게 그게 뭐가 중요할까.
사실 쑹판은 청두에서 구채구, 황룡을 가는 길에 무조건 지나게 되어 있는 곳이다.
도시 자체는 크게 볼거리가 없는 심심한 곳이지만, 이 도시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유가 딱 하나 있으니 바로 '호스 트레킹(Horse Trekking)'이다.
쑹판 인근의 쉐바오딩(雪宝顶, 설보정)이라는 설산까지 약 2박 3일간 말을 타고 트레킹 하는 여행 상품이다.
마부, 요리사 등으로 구성된 가이드 팀이 4~8명의 손님을 이끌고 쓰촨 성의 고산지대를 유람한다.
말 등에 앉혀놓고 1시간 정도 돌아다닌 후 '체험 끝'을 선언하는, 단무지 빠진 자장면 같은 체험이 아니라 2박 3일, 혹은 3박 4일 간 말 등 위에서 살아야 하는 독특한 체험이다.
과거 차마고도를 오가던 마방의 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론니플래닛에서 이 프로그램의 존재를 보자마자 '여긴 꼭 가야 한다'라고 다짐했던 터였다.
쑹판으로 향하는 버스는 오전 7시 반에 출발했다.
온통 뿌옇게 찌푸린 성도의 아침 안개를 가르며 사람들이 일터로 향하고 있었다.
푸른 인민복을 입고 회색빛 하늘 밑에 시커멓게 죽어있는 도시의 아침을 달리는 사람들은 학부 수업시간에 봤던 70년대 중국 선전영화 속 이미지 그대로였다.
청두를 벗어난 버스는 두장옌(陶江淵)과 청성산(靑成山)을 비껴지나 산길에 접어들었다.
깔끔하게 포장이 잘 된 길이라 불편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른 아침, 허리 밑으로 안개를 두른 채 머리만 빼꼼히 내놓은 산들이 쭉 늘어선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10시가 넘으니 어느새 높이 솟아오른 태양이 공기를 데워, 두꺼운 안개와 구름을 몰아냈다.
운무 아래 숨어있던 시골 풍경은 낙후하고 초라했다.
깊은 산골로 들어선 버스는 좌우로 출렁거리며 험한 길을 꾸역꾸역 오르내렸다.
잠시 들른 휴게소 내 정비소에 '가수(加水)'라는 글자가 쓰여있고, 차들이 줄을 서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버스 기사가 씩 웃으며 알려줬다.
정비를 마친 버스는 다시 구절양장(九折羊腸) 같은 길에 올랐다.
버스 중간에 앉은 아낙에게 안겨있던 아이가 참지 못하고 버스 바닥에 구토를 했고, 실내는 비린내로 가득 찼다.
내 옆자리에 앉았던 군인은 결국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토악질을 시작했고, 버스 안은 이내 사방에서 토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악전고투 끝에 쑹판에 들어섰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여행사 호객꾼들이 달라붙었다.
당시 쑹판에서 호스트레킹을 하는 업체는 '순장'과 '해피 트레일' 두 곳밖에 없다고 알고 있었기에 고민하지 않고 순장 쪽 사람을 따라갔다.
사무실에서 계약서를 쓴 후 적당히 근처 저렴한 초대소 도미토리에 들어갔더니 이스라엘 청년 둘이 초저녁부터 쓰러져 자고 있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 이스라엘 여행자들을 자주 만났다.
대부분 군대를 막 제대한 청년들이었는데, 이들은 제대 후 국가에서 지원해 주는 돈을 들고 배낭여행을 떠나는 게 일종의 통과 의례이자 문화라고 했다.
다만, 오랫동안 전시 상황과 다름없는 복무를 마친 후의 해방감은 자주 일탈을 야기했는데, 술과 약에 취해 헤롱대거나 타인에게 무례한 언행은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숙소 안에 쓰러진 친구들은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밤새 조용히 있어 주었기에 나로서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트레킹 팀은 오전 8시에 집결했다.
여행사 사무실 앞 공터는 수많은 트레킹 팀이 가이드와 만나 채비를 하느라 시장바닥 같았다.
나와 3박 4일 간 함께한 세 사람은 중국인들이었다.
수다 떨기 좋아하는 중국사람들 특성상 사무실에서 만나자마자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세 명은 엊그제 구채구에서 만나서 의기투합, 쑹판까지 함께 온 사람들이었다.
라오와이(老外, 외국인) 앞에서 뭔가 주눅 들어 보이는 그 시절의 중국 인민이 아니라,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엘리트들이었다.
해는 일찌감치 떴지만 주위에 둘러선 산에 가려 무척 추운 아침 9시, 드디어 오와 열을 맞춰 출발했다.
야영할 때 쓸 천막과 모포들을 안장 위에 잔뜩 얹어서인지 말 위에 앉은 느낌은 흡사 소파에 앉은 듯 편안했다.
대신에 말안장이 높아지니 발 뒤꿈치가 말 배에 닿지 않는다.
어떻게 박차를 가하나 했더니, 몸을 한 번 튕기면서 고삐를 채면 알아서 터덜터덜 앞으로 걸어갔다.
나중에 보니 이놈들은 내 말을 들었던 것이 아니라, 나를 담당한 가이드의 명령에 따라 달리고 섰던 것이었다.
영리한 가이드는 내가 박차를 가할 때마다 '치릿'하는 소리를 냈다.
10월 하순의 일교차는 혹독했다.
30분 정도 산을 오르니 해가 나면서 공기가 더워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가이드가 몸 좀 녹이라며 술을 한 병 꺼내 돌렸다.
한 모금 마시니 뱃속이 화끈한 화주다.
오전 내내 꽝꽝 얼었던 몸이 조금씩 풀렸다.
나를 담당한 가이드는 벙어리였다.
다른 가이드들은 그를 '야바(벙어리)'라고 불렀다.
갓 서른이 됐다는데, 아무리 봐도 불혹은 족히 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일정 내내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그는, 끊임없이 "으어, 으어!"라는 소리와 함께 수어(手語)로 말을 걸었다.
그의 수어는 차라리 보디랭귀지에 가까웠다.
그러니 수어를 모르는 나도 대충 알아먹을 수 있는 의사 표현을 해줬다.
대략 이런 뉘앙스였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탄 하얀 말은 천막을 하나 지고, 그 위에 나를 싣고도 뛰기 시작하면 일사천리요, 가파른 오르막길도 투레질 한 번 없이 씩씩하게 오르는 준마였다.
오후 세 시경, 시냇가 옆의 널따란 공터에서 대장인 따홍(大洪)이 팀을 멈춰 세웠다.
캠프를 세우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린다 했다.
가이드들은 일사불란하게 천막을 쳤고, 돌을 모아 아궁이를 만든 후 시커멓게 탄 솥을 걸고 요리를 시작했다.
저녁 메뉴는 수제비였다.
밀가루를 반죽해 손으로 뜯어내 끓는 물에 던져 넣고 온갖 채소와 함께 끓여냈다.
시커먼 남자의 손이 야무지게 움직여 만두피처럼 얇은 수제비를 떠내는 광경은 눈을 홀릴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감자와 양파 정도만 들어간 소박한 수제비였는데, 기가 막히게 맛있었던지라 다들 배가 터지게 먹었다.
식사를 마친 시간은 7시 반이었는데, 사위는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렸다.
무뚝뚝한 젊은 가이드 '양춘'이 모닥불을 피웠고, 쾌활하고 예쁘장하게 생긴 '맹군'이 천막 안에서 술을 한 병 들고 나왔다.
따홍 말로는 알코올 도수가 60도 이상이라고 했다.
뱃속이 타들어갈 정도록 독했지만, 묘하게 고소한 맛이 입 안에 감도는 술이었다.
새소리도 잦아든 산속의 밤, 모닥불이 타닥거리는 소리와 천막 옆으로 흐르는 시냇물이 졸졸거리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나만 빼고 다들 입담이 좋았던 지라 술이 들어가자 이내 흥이 올랐고, 맹군이 목청을 가다듬더니 노래를 시작했다.
폭포 아래서 득음이라도 한 듯, 청량하고 날카로운 소리로 애잔하게 꺾는 민요였다.
대수롭지 않게 흥얼거리는 노랫가락은 가수라 부르기 부족함이 없었다.
따홍이 껄껄 웃었다.
숲 속에서 잔 탓인지 새벽에 일어났는데도 머리가 맑았다.
따홍이 끓여준 약차 덕분에 숙취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깔고 덮을 모포를 충분히 준비해 줘 밤 사이 춥지는 않았지만, 이불 밖으로 머리를 내놓으면 이내 골이 띵할 정도로 싸늘했다.
아침에 일어나 장족들이 입는 장포를 입고 숲 속을 활보하니, 맹군이 티베트어로 이름을 지어줬다.
길상(吉祥), 행운이란 뜻이란다.
뜻하지 않은 선물에 기분이 좋아진다.
여행 내내 운수 사나운 순간이 많았는데, 뭔가 바뀔 것 같은 좋은 느낌이 들었다.
아침은 순식간에 튀겨낸 빵과 삶은 감자로 해결했다.
어떤 마법을 부린 건지 시커멓게 탄 솥에 재료가 들어가기만 하면 기가 막힌 음식이 튀어나왔다.
게 눈 감추듯 식사를 마치고 나니 가이드들이 텐트를 접고 집기를 정리했다.
완벽한 분업 체계에는 한 치의 틈도, 한 짬의 시간 낭비도 없었다.
순식간에 행군대형이 갖춰졌다.
가을을 지나 초겨울로 들어설 무렵, 이른 아침 햇살은 아직 깊은 산골짜기까지 스며들지 못했다.
말들이 걸어가면서 살얼음을 밟아 깨뜨리는 소리, 향긋한 솔향기, 신선한 공기,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어우러진 가운데 울창하게 펼쳐진 침엽수림을 가로질렀다.
다들 상쾌한 기분을 만끽하느라 아무 말 없이 말을 몰았고, 고요한 아침 기운이 몸을 감쌌다.
주위는 오색 단풍으로 물들어 황홀하게 아름다웠다.
트레킹 도중 양 떼를 몰고 가는 목동을 만났을 때, 따홍이 트레킹 팀원들에게 물었다.
이틀째 야영지에서 바비큐를 하자는 얘기였다.
당시 기준으로 양 한 마리에 600위안(10만 원)이었다.
순간 지난밤에 마셨던 칭커지우의 고소한 맛이 떠오르면서 군침이 돌았다.
통바비큐와 화끈한 술 한 잔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데 이견이 없었다.
예상외의 지출이었지만 모두 흔쾌히 갹출했고, 맹군과 양춘이 양을 구하기 위해 샛길로 빠졌다.
우리는 따홍과 야바를 따라 30분 정도 더 산길을 지나 쉐바오딩으로 진입하는 산기슭에 있는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오후 1시밖에 안 된 시간이었는데, 이날 일정이 끝이라길래 의아해하자 따홍이 설명했다.
텐트 치고 야바를 도와 장작거리를 줍고 있는데, 맹군이 양을 한 마리 업고 나타났다.
양의 앞뒤 다리를 각각 묶어 어깨에 걸쳐 업고선 말을 타고 오는 맹군의 묘기에 다들 기립박수를 보냈다.
새하얀 새끼 양이었다.
오후 3경, 캠핑 사이트 정돈이 끝나자 맹군이 말했다.
우리와 함께한 가이드들은 모두 회족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할랄 푸드가 아니면 입에 대지 않는다.
이날 양을 잡는 것도 바로 그들만의 방식인 이른바, '칭쩐(淸眞)'이었다.
흔치 않은 기회라는 걸 알았기에 모두 일제히 따라나섰다.
양의 네 다리를 묶어 바닥에 자빠뜨린 후 양춘이 다리를 붙잡았다.
그러자 맹군이 무릎으로 양의 몸통을 눌러 고정시킨 후, 양의 귀로 눈을 덮어 가린 후 턱을 당겨 목을 드러낸 다음 가차 없이 칼로 그었다.
그런데 가져온 칼이 날이 무뎠는지 상처 하나 나지 않았고, 양은 목을 가로지르는 섬뜩한 느낌에 크게 한 번 "메에!"하고 울고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맹군이 다시 잘 드는 칼을 가져와 기절한 놈의 목을 냅다 그어버리니 시뻘건 선혈이 출렁 솟아났고, 기절했던 양이 깨어나 요동을 쳤다.
맹군은 양의 사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가차 없이 칼을 놀렸다.
시뻘건 피 속에 기도가 잘려나가는 게 보였고, 양이 마지막으로 꿈틀 하는 순간 이상한 모양으로 눈동자가 풀리며 눈이 돌아갔다.
1분 정도 피가 빠진 후, 양은 마지막으로 경련을 일으키더니 명을 다했다.
원초적인 행위 앞에 이성은 날아가고, 강렬한 충격이 내 정신세계를 헤집었다.
어떻게 보면 먹이사슬의 한 고리에 불과한 인간의 배부른 소리일 수 있다.
하지만 양이 마지막 순간에 보여준 그 눈동자는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
이 오묘한 느낌은 양 한 마리가 철저히 '해체'된 이후 '고기'로써의 모습을 갖추고 난 후에야 사라졌다.
순식간에 해체를 당한 양이 본래의 모양을 잃어버리고 정육점 고기로 변해 아기 팔뚝 만한 통나무에 꿰어져 모닥불 위에 올려지는 걸 본 순간 그 느낌들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허기가 느껴졌다.
도축이 끝나자 본 게임이 시작됐다.
장비랄 것도 없이 자연에서 구한 도구들로 뚝딱뚝딱 만들어낸 바비큐 틀이 놀라웠다.
맹군과 양춘은 대략 4시간 정도 모닥불 옆을 지키며 끈질기게 바비큐를 돌렸다.
중간중간 후추와 고춧가루, 소금, 기름을 섞어 만든 소스를 정성스레 펴 바르는 모습은 종교의식을 치르는 듯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캄캄한 밤, 모닥불에 비친 통구이 바비큐는 언젠가 영화에서 본 듯한 모양새였다.
낮에 느꼈던 착잡한 감정은 온데간데없고 순식간에 군침이 돌았다.
맹군과 양춘이 영혼을 갈아 넣은 바비큐는 천상의 맛이었다.
팀원들 모두 이성을 놓고 먹고 마셨고, 거나하게 취해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을 먹으면서 여행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따지에가 말을 꺼냈다.
따지에의 걱정은 어느 정도 사실이 됐다.
여행 중 만난 다양한 사람들, 넋을 놓고 감상했던 비경들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내가 경험한 세계를 넘어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사회에 나가 좁은 울타리 안에서 쳇바퀴 돌아가는 돌아가는 삶을 산다는 상상을 하니 소름이 돋았다.
호스트레킹의 종착지인 쉐바오딩은 가파른 등산로를 올라야 했다.
따홍과 야바는 천막을 지키며 장비를 수습해 귀가할 준비를 하고, 그 사이 맹군과 양춘이 우리를 이끌고 설보정으로 향했다.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 물소리와 산새 소리가 어우러져 기분을 들뜨게 했다.
하지만 30분 정도 산길을 걸은 후, 따홍이 왜 산 아래 베이스캠프를 차렸는지 알 수 있었다.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산길을 말을 타고 오르는데, 이제껏 힘든 기색 한번 보이지 않던 말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동쪽으로 펼쳐진 설산의 웅장한 모습을 배경으로 덩그러니 놓인 목민가(牧民家) 몇 채를 지나니 길게 뻗은 산길 끝에 새하얀 설산의 일부가 보였다.
헐떡이는 말을 재촉해 산 허리를 돌았더니 예상치 못한 넓은 공터가 나왔다.
억센 봉우리들이 첩첩이 쌓여있는 가운데 새하얀 얼음덩이 하나를 머리에 인 산봉우리가 우뚝 서 있었다.
맹군이 소리쳤다.
비록 하늘은 온통 회색빛이라 산봉우리와 하늘색의 경계가 불분명하긴 하지만, 시커먼 돌산에 얹힌 빙하의 선명한 대비가 눈에 박혔다.
해발 4,300m 고지대라 조금씩 고산 증세가 느껴졌다.
티베트를 지나온 후 다시 고산증세를 겪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 했기에 당황스러웠다.
맹군이 낄낄거렸다.
천천히 걸어 내려와 야영지에 닿으니 따홍과 야바가 죽을 한 솥 가득 끓여놨다.
말을 타고 험한 산길에 시달렸더니 속이 울렁거렸던 차라 내심 반가웠다.
점심을 먹은 후 따지에와 진 선생은 사진을 찍으러 나가고, 나는 천막에서 잠시 낮잠을 청했다.
생각보다 몸이 많이 곯았었는지 꽤 오랫동안 잤고, 일어나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서쪽 능선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따홍은 저녁상을 차리고 있었고, 진 선생과 따지에는 제법 멀리 다녀온 건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진 선생이 호주머니에서 술병을 하나 꺼냈다.
잔을 돌리다가 따홍이 말했다.
맑은 공기, 깨끗한 물, 적당한 식사와 운동.
이미 환갑을 훌쩍 넘은 따홍이 건강한 이유였다.
왜소한 체격의 그네들이지만 보고만 있어도 건강이 느껴졌다.
쑹판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다들 어딘가 들뜬 기분이었다.
사람만 그런 게 아니라 말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집에 간다는 걸 아는지 말들이 계속 달리려 들었다.
이제껏 말들이 너무 느긋하게 걸어 답답한 기분도 들었었는데, 좁고 험한 산길에서 속도를 올리니 뒷머리가 쭈뼛 설 정도로 긴장이 됐다.
말고삐를 쥔 손에 내내 힘이 들어갔다.
단풍이 곱게 든 산을 두 개 정도 넘으니 장족 마을이 하나 나타났다.
따홍이 말을 하자 말들이 귀신같이 말을 알아들었는지, 서로 앞에 서겠다고 난리를 쳤다.
급기야는 갑자기 좁아지는 내리막길 입구에서 말들이 어깨 싸움을 벌이던 중, 내가 탄 말이 무리하게 먼저 튀어나갔다가 앞다리가 꺾이며 그대로 굴러버렸다.
말다리가 휘청하고 꺾이는 순간 갑자기 시야가 느린 화면으로 변했다.
육중한 말과 함께 굴렀다간 이대로 비명횡사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의식적으로 말 등을 박차고 앞으로 뛰어올랐다.
말 등에 짐을 얹고 그 위에 실리듯 올라타 앉아 있었기에 가능한 동작이었다.
말이 달리는 속도에 내가 뛰어오른 가속도까지 붙어서 '날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주마등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일단 살아야 했다.
땅이 다가오는 순간 턱을 당겨 몸을 말았고, 땅에 떨어지는 순간 몸을 한 바퀴 굴린 후 그대로 다시 땅을 차고 튀어 올랐다.
다시 땅에 떨어지는 순간에는 최대한 몸을 말고 두터운 장포를 믿고 데굴데굴 굴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그대로 일아나 뒤를 돌아보니 사색이 된 일행이 보였다.
말은 바닥에 자빠져 뒤집어진 채 버둥거리고 있고, 난 일행들과 대략 10m가량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학생 때 학교 방침 때문에 억지로 유도부에 들어 3년 간 학폭에 시달리며 고생했던 기억이 몸에 남아있었던 듯하다.
그 징그럽던 기억이 날 살렸다.
좌우간 그 난리를 피우고도 상처 하나 없이 무사했던 건 정말 기적이었다.
내가 무사하다는 걸 재차 확인한 일행은 그제야 파안대소하며, 말에서 뛰어올라 구를 때 액션영화 한 편 보는 듯했다며 농담을 했다.
따홍은 아예 입에 거품을 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 미안하지만 보충역으로 근무했다.
다행히 말도 다친데 없이 무사했다.
한 번 혼이 난 녀석은 정신이 들었는지, 이후에는 얌전히 야바의 지시를 따랐다.
쑹판에 도착하니 3박 4일의 시간이 꿈결 같았다.
다들 같은 생각이었는지 저녁에 모여 뒤풀이를 작당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진 선생은 술자리 중간에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으며 정신을 잃었고, 나도 칭커지우 석 잔에 완전히 몸이 녹아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