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존재와 자유의지, 그리고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하여

by 별이 빛나는 아침




<사유일지>


질문 :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나는 가끔,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보통 아름다움이라 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 감성적인 풍경이나 잘생긴 얼굴이 아니다. 사람들은 '예쁘다'와 '아름답다'라는 말을 혼용해서 사용하지만, 나의 언어체계 내에서 이 둘은 분명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떠올리는 일반적인 아름다움을 나는 예쁘다고 표현하고,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에게 아름다움이란 무언가 동적인,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역사책에서 영웅호걸들의 일화를 들을 때, 내 주변에서 자신의 의지를 놓지 않으며 '아, 이 사람은 자신의 길을 만들고, 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을 볼 때. 감탄과 함께 가슴이 두근거리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의지가 생길 때, 나는 '아름답다'라고 말한다. 다만 나는 이 아름다움을 자주 만나지 못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의 아름다움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아름다움을 자유의지와 연관 지어 질문을 던지고, 사유를 전개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내가 나의 선택으로 내 삶을 꾸려나간다고 생각한다.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의지의 표출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의 자유의지란 있을까?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따져보자. 배가 고파서 밥을 먹고, 잠이 와서 잠을 자는 것은 우리의 의지라기보다는, 우리 몸이 자신을 보존하고 지키기 위한 신호, 명령이다. 이런 기본욕구 이외의 것을 떠올려보자. 놀고 싶고, 공부를 하기 싫다. 편안하고 싶고, 도전하기 싫다.


일반적으로 우리 몸은 이런 방향으로 우리를 유도한다. 이를 역행하는 정신의 움직임은 드물고,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 인간이라면 이러한 보편적인 흐름을 갖고 있기에, 우리는 인간을 예측할 수 있고, 대략적인 확률에 대상을 규정지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주사위를 던져서 6이 나오면 오른쪽으로, 6이 아니면 왼쪽으로 사람을 보내는 규칙이 있다면 자연히 사람은 왼쪽으로 많이 모일 것이다. 나는 인간이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기계적 작용에 종속된다고 생각한다. 환경에 의한 자극이 주어지면 정신또한 비슷한 결과를 산출하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자유의지를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으며,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능력이 내재돼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능력의 범위가 다르다 말하고 싶을 뿐이다. 어떤 이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밥을 먹을 때 숟가락을 먼저 들지, 젓가락을 먼저 들지 결정하는 정도에 활용한다면, 어떤 이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 인생의 방향성을 고민하고 개척하는데 활용한다.


주사위 예시를 적용해 본다면, 전자는 5/6의 확률에 종속되어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맡기어, 그것이 자신의 선택이라 여기지만, 실상은 큰 파도에 휩쓸려 내려가고 있을 뿐이다. 후자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적극 활용하여 1/6의 확률을 선택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들은 강물을 거스르는 것을 넘어, 스스로 강물을 창조하는 존재이다. 세상은 그의 자유의지에 화답하여 흐름을 허락하고, 이는 새로운 확률을 건설하는 능력을 부여한다. 나는 이렇게 세상을 거스를 수 있는 용기가 있고, 나아가 새로운 세상 구축에 기여하는, 자신이 가진 자유의지의 증명이야말로 진실된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선언하고자 한다. 아름다움이란 자유의지의 실천을 뜻한다.




<사유 확장 에세이>


우리는 흔히 아름다움을 자연, 예술, 감정에서 찾는다. 하지만 그 모든 외형을 벗겨내면 남는 것은 하나다. 자유의지의 실천, 자기 결정의 힘, 그리고 존재가 본질을 만들어가는 투쟁의 흔적. 아름다움은 형태가 아니라 힘이다. 그 힘은 인간이 흐름을 거슬러 자신만의 길을 내는 그 지점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1. 인간은 정해진 본질이 없는 존재다 : 사르트르와 존재의 투쟁


장 폴 사르트르는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라고 선언했다.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는 게 무슨 뜻일까? 이는 인간이 태어날 때 정해진 목적이나 본질 없이 ‘던져진 존재’라는 뜻이다. 전통 철학에서는 존재보다 본질이 먼저라고 봤다. 인간에게는 이미 내재된 성질, 상태, 목적이 있고 우리는 이에 충실히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학생답게', '좋은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고 배워왔지만, 사르트르는 이런 ‘답게’를 부수는 것이 실존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이 말은 단순한 이상주의가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순간, 우리는 선택 앞에 놓인다. 사르트르가 말한 ‘나 자신이 되는 투쟁’은 바로 이 선택의 연속, 자유의지의 훈련이다. 우리는 정해진 본질이 없는 존재로서 자신의 본질을 창조하며 살아야 하며, 이는 전적으로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만약 선택을 외면한다면 타인의 기대, 사회의 규범, 기계적인 습관이 우리의 본질을 대신 채워버릴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나’가 아니라, ‘역할’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아름다움은 외부의 기준에 맞춘 완벽한 형태가 아니라, 스스로의 본질을 끊임없이 창조해 가는 실존의 과정에 있다. 아름다움은 흐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2. 자유의지는 진화된 자기 조절 능력이다 : 데닛의 현실적 자유의지론


그러나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우리는 정말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가? 모든 생각과 감정은 뇌의 작용, 유전자, 환경 자극의 결과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전통적인 자유의지 논쟁은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의 싸움이었다. 결정론은 모든 사건은 필연적으로 일어나며, 자유의지는 환상이라고 했다. 자유의지론은 인간은 원인에 종속되지 않은 선택이 가능하다고 했다.


대니얼 데닛은 여기에 흥미로운 답을 제시한다. 그는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의 대립을 해체하며 말한다. “자유의지는 신적인 전능함이 아니라, 진화된 자기 조절의 능력이다.” 예를 들면, 내가 야식을 먹고 싶었지만, 건강을 위해 참았다고 하자. 이건 초월적 자유의지가 아닌, 신경과학과 진화심리학 안에서 가능한 자기 조절 능력인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데닛은 결정론과 자유의지론 모두를 긍정한다는 점이다. 위의 예시로 돌아가보면, 야식을 먹지 않은 선택은 우리의 기억(야식은 몸에 안 좋아), 가치(건강은 중요해), 습관(야식을 자주 먹는다), 뇌의 계산등이 작동한 결과이다. 이건 기계적인 반사작용이 아니라, 복잡한 자기 조절 메커니즘이 작동한 결과이다. 즉, 수많은 원인으로써 결과는 정해져 있지만, 그 결정은 나의 것이라는 말이다. 나의 선택은 원인의 결과지만, 그 원인은 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관점은 묘하게 사르트르와 겹친다. 사르트르는 "우리는 본질 없이 존재에 던져진다"라고 했고, 데닛은 "우리는 복잡한 시스템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가는 존재다"라고 말했다. 결국 ‘나 자신이 되는 투쟁’은 물리 법칙과 신경계 안에서 끝까지 해볼 수 있는 투쟁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결정론을 부정하지 않고 제한된 자유의지만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행위에 대한 가치평가가 가능할까? 만약 가능하지 않다면 우리는 열심히 살 이유가 없고, 게으르게 살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데닛은 열정적인 사람과 무기력한 사람을 어떻게 볼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유의지는 ‘우리가 얼마나 복잡한 유기체인가’에 달려 있다.” 즉, 모든 사람이 결정된 흐름 속에 있지만, 열정적인 사람은 무기력한 사람에 비해 자기 원인의 개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그 원인을 연결하는 알고리즘의 복잡도가 높은 사람이기에 자기 조절 수준이 높고, 그러므로 데닛은 열정적인 사람을 더 '자유롭다'라고 표현할 것이다. 데닛은 주어진 조건 내에서 발휘할 수 있는 자기 조절 능력을 ‘자유’라고 봤기 때문이다. 다음은 사과와 바나나 중에 하나를 고르는 상황에서 두 사람의 자기 조절 능력에 대한 예시이다.



▶ 열정적인 사람

기억: “예전에 먹은 사과가 신선했어.”

가치: “나는 건강을 중시해. 오늘은 비타민이 필요해.”

습관: “평소엔 바나나를 먹었는데, 오늘은 좀 다르게 해보고 싶어.”

계획: “오늘 운동할 거니까 당이 높은 과일은 피하자.”

미래 시뮬레이션: “사과를 먹으면 상쾌한 기분이 들겠지.”

이런 요소들을 통합적으로 고려하고, 새로운 가치나 우선순위를 조정할 수 있다. 이 사람은 다양한 정보를 인지적 네트워크로 엮고, 그걸 '나의 선택'이라는 통합된 의사결정으로 변환한다.

→ 자기 조절 시스템이 고차원적으로 작동 중


▶ 무기력한 사람

“몰라… 그냥 바나나로 하지 뭐…”

과거 경험, 가치 판단, 습관 분석 없이 즉흥적이거나 외부 자극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선택'이라는 느낌조차 약하고, 피상적으로 반응한다. 이 사람은 같은 입력을 받아도 처리의 깊이와 복잡성, 피드백 체계가 단순하거나 결여돼 있다.

→ 자기 조절 시스템이 낮은 복잡도에서 작동



데닛의 자유의지 설명은 내가 말한 자유의지의 본질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데닛이 “의식은 우리가 의미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한 발언에서 미루어보면, 데닛이 자유의지에 대해 미학적인 접근을 했다면, 아름다움이란 자유의지의 발현이라는 내 주장에 동의할 것임을 충분히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3. 자유의지를 살아내는 인간 : 자기 결정이론과 아름다움의 심리학


데시와 라이언의 자기 결정이론은 자유의지를 실존의 철학에서 심리적 실천으로 끌어온다. 인간은 세 가지 핵심 욕구 -자율성, 유능성, 관계성- 을 충족할 때, 가장 충만하게 살아있다고 느낀다.


자율성은 "내 삶은 내 선택"이라는 감각이다.

유능성은 "나는 발전하고 있다"는 실감이다.

관계성은 "나는 다른 사람과 의미 있게 연결돼 있다"는 확신이다.


이는 곧 아름다움의 조건과도 같다. 우리가 진짜로 자유의지를 느낄 때, 우리는 삶의 주도권을 갖고 있고, 자기 발전을 체감하며,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며 공명한다. 이 상태는 단지 기능적으로 ‘행복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미를 만들어가는 가장 인간다운 순간, 다시 말해 아름다움 그 자체다.


4. 아름다움은 확률을 거스르는 힘이다


다시 사유일지로 돌아가보자.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 아름다움은 확률을 거스르는 자유의 실천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육체의 충동, 사회의 흐름, 통념의 요구에 따라 산다. 그렇게 주어진 확률 속에서, 그냥 움직이는 것. 주사위를 던졌을 때 5/6의 확률에 따라 왼쪽으로 가는 삶. 이것은 자유의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동화된 반응일 뿐이다.


하지만 어떤 이는 그 1/6을 향해 나아간다. 그들은 육체를 거스르고, 타인의 시선을 넘어 자신만의 흐름을 만든다. 그들은 스스로 강물의 방향을 바꾸는 존재다. 이때 세상은 흐름을 열어주고, 새로운 확률을 허락한다. 이것은 단지 의지력이 아닌, 존재가 본질을 창조한 결과, 자율성과 효능감과 관계성을 아우른 결과, 결정된 흐름 속에서 자기 원인을 다층적으로 조직한 결과다.


이것이 바로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은 '보기 좋은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 자신을, 타인을, 세계를 동시에 변화시키는 힘으로서.


결론: 아름다움이란 자유의지를 실천하는 존재의 투쟁이다


사르트르가 말한 ‘나 자신이 되는 투쟁’, 데닛이 설명한 ‘자기 조절의 메커니즘’, 데시와 라이언이 정리한 ‘자율성의 욕구’.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메시지로 수렴한다. 인간은 자신을 창조하는 존재다.


그리고 그 창조가 격렬하고 치열하며, 타인과 세계를 변화시키는 순간, 우리는 거기서 비로소 아름다움을 마주한다.


아름다움은 존재가 본질을 창조하는 순간, 자유의지가 발현되는 자리에서 생긴다.


그러니 나는 묻는다.


당신은 오늘, 아름다움을 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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