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과 사유의 공간에서
요즘 나는 ‘공간’이 사람에게 어떤 감정을 주는지 자주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늘 어딘가에 머무르고, 또 어딘가로 향하며 하루를 살아간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공간은 우리에게 조용한 영향을 준다. 어느 날은 익숙한 교실이 낯설게 느껴지고, 또 어느 날은 조용한 도서관이 뜻밖의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수업이 끝난 오후, 우리는 캠퍼스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길목을 지나 밥을 먹으며 시간을 흘려보낸다. 친구들이 보여주는 여유와 웃음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정서라기보다는, 마치 ‘수업 다음’이라는 정해진 루틴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처럼 느껴진다. 그 안정된 리듬 속에서 나는 문득, 조금 색다른 리듬을 찾아 움직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과제를 위해 중앙도서관을 찾았던 날이 떠오른다. 학생증을 찍고 들어가면, 가장 먼저 나를 반기는 것은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사서의 존재다. 왼쪽에는 깔끔하게 정리된 진열대와 소파, 그리고 화장실이 자리 잡고 있고, 오른쪽에는 영화 CD들과 그것을 감상할 수 있는 TV가 있다. 이 구조는 마치 사각형이 겹겹이 쌓여 올려진 미로 같다. 그 중심엔 뚫려 있는 넓은 공간과 나선형처럼 이어진 계단이 있어, 지하부터 옥상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그 구조적 개방감이 주는 묘한 해방감을 좋아한다. 각층의 사람들이 보내는 뜨거운 열정이 한데 모여 티 없이 맑은 수맥을 형성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책을 찾아 도서관을 걷다 보면, 평소 수업 시간에 마주했던 이들의 다른 얼굴을 보게 된다. 교실 안의 모습과는 또 다른, 고요하고 진지한 태도.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무언가를 밀고 나가고 있다는 확신이 그들의 눈빛 속에 담겨 있다. 눈빛에 감도는 집중과 그 안에 감춰진 열정은 조용히 나의 감각을 일깨운다. 이 공간에선 모든 사람이 각자의 이유로 몰입하고 있다. 그들은 공부하고, 사유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장해 간다. 누군가는 시험을 준비하고, 누군가는 논문을 읽고, 또 누군가는 책 속에서 전혀 다른 세계와 조우하고 있다.
나 역시 그런 순간을 사랑한다. 어느 한 작업에 깊이 몰입해 물아일체의 상태가 되면, 머릿속의 잡음은 사라지고 오직 현재의 나만이 또렷이 존재하게 된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 후 새벽의 별빛 아래서 잠에 들면, 몸속에 가득 찬 충만함이 나를 감싼다. 그 순간만큼은 나라는 존재가 명확하게 살아 숨 쉰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뭔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이, 작은 불안이나 방황을 덜어준다.
도서관을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공간 이동이 아니라, 열정의 온도를 느끼는 산책이라고 생각한다. 소파에 누워 책을 읽는 사람, 정수기 물을 받으며 잠시 쉬는 사람, 고개를 떨군 채 깊은 잠에 빠진 사람까지 이 공간 안에선 누구나 무언가에 열중해 있다. 비록 그 순간이 휴식일지라도, 나는 그들에게서 열정의 잔열을 느낀다. 그 잔열은 나에게도 옮겨와 무언가를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기게 만든다. 우리는 모두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공간 안에서 더욱 또렷하게 느낀다.
지하로 내려가면 더 많은 책이 펼쳐있다. 각각의 책들은 수많은 사료와 참고문헌, 저자의 사유가 한데 어우러진 결실이다. 마치 자신들의 탄생을 자랑하듯 책들은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조용히 존재를 드러낸다. 그러나 누군가 손을 뻗어 펼쳐보기 전까지, 그 빛은 두꺼운 종이 속에 잠들어 있어야 한다. 이 책이 이 자리에 놓이기까지, 저자는 얼마나 오랜 시간과 깊은 생각을 쏟아냈을까. 여전히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을 떠올리면, 나도 내 삶을 더 정성스럽게 살아가고 싶어진다.
나는 그런 책이 되지 않기 위해 살아간다. 읽히지 않는 아름다움이 되기보다,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 문장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그러니 나는 오늘도 다시, 도서관을 걷는다. 그 속에서 나의 문장을 하나씩 써 내려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