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always
떨지 않고 잘 말했어.
미팅을 참관했던 S대리의 평가였다. 평소 칭찬에 인색한 그녀이기에 그 말이 어떤 의도를 내포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건 최상급 언어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가장 힘든 시간은 S대리와의 관계에서 비롯됐다. 그녀에게서 혹독하게 업무를 배웠고 실수 뒤 쏟아지는 폭언들에 잔뜩 움츠려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고객사 앞에서 PT를 하는 것보다 S대리 앞에서 말한마디 하는 게 더 떨릴 정도였으니.
그런 그녀가 굳이 PT에 동행하겠다고 통보해 온 지난주, 그것이 숨은 무게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전보다 심한 압박감이 깊게 몰려왔다. 이를 악물고 연습하는 것 말고는 이 중압감을 이겨낼 수 없을 거 같아 기존 대본을 밤새 다시 수정하면서까지 준비했다. 다행히 화기애애한 반응 속에 미팅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가방을 집어던지고 현관문에 벗지 않은 신발을 둔 채 바닥에 엎드려 잠들었다. 마치 그 자리가 잠자리였던 것처럼.
영업에서 너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
팀 회식자리에서 타 팀이 생각하는 나의 대한 평가를 들었다. 말구설에 오르는 게 싫어 입을 닫고, 먼저 말을 걸어도 어색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는 경우들이 있어서 좋은 평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의외의 긍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뇌리에 남았던 평가 중 하나는 겸손하다는 말이었다.
출장 가는 내내 한마디도 않던 신입이 미팅만 들어가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마냥 말문을 여는 모습에서 그런 것 일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건 겸손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었는데.
오늘 팀장님은 사원에 불과한 날 신제품 개발 미팅에 참여시키셨다. 물음표를 갖지 않기로 했다. 늘 그래왔듯이 수첩을 들었다.
정민씨, 저 퇴사하려고 했어요.
금요일 병가를 쓴 H주임님이 주말이 지난 월요일에도 병가를 신청하셨다. 걱정이 되는 마음에 카톡을 보냈다. 사실 난 알고 있다. 이 병의 원인과 그 이유를.
다음날 주임님은 수척해진 모습으로 출근을 하셨다. 밤새 울은 듯한 마카롱이 된 눈은 병가 사유가 무엇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정신과 가볼까요..?’ 묻는 주임님께 ‘퇴근하고 같이 저녁 먹어요’ 답했다.
S대리의 모진 말들을 견디지 못해 화장실에서 30분가량을 울다 청소부 아주머니가 발견해 등을 토닥여 줬다는 이야기, 요즘 시대 그런 사람이 어딨냐고 의심하는 친구들에게 메신저를 보여주었더니 당장 퇴사하라고 더 역정을 냈다는 일화, 퇴근 후 숨이 막혀와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도망치듯 갔다는 것까지. 숨소리하나 마저 공감하지 않는 부분은 없었다.
‘3개월을 버티지 못하면, 전 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마른침을 달래려 물을 마시는 주임님을 향해 뱉은 말이었다. 무작정 공감만이 이 상황을 타계할 수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표면은 굉장히 냉정하고 차가웠지만 진심의 온기를 담은 말이었다.
‘고마워요. 그 말이 의외로 위로가 되네요.‘ 주임님은 내 눈을 보고 답했다. 회사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겠노라 했던 다짐이 무색하게 고독, 두려움, 우울, 공황과 싸웠던 호주에서 일화들이 터져 나왔다. 지금의 고통이 별거 아니라는 것이 아닌, 이 고통도 결국 지나간다는 것을 말해드리고 싶었다.
각자 다른 길로 가야 하는 개찰구 앞에서 주임님께 밝게 손을 흔들었다. 내일은 병가를 쓰지 않기로 약속하면서.
세상에는 정말 미친놈이 너무 많다.
전화를 끊고 입으로 중얼거린 말이다.
사람은 배려를 원한다. 하지만 모두에게 세심한 배려를 쏟을 수 없다. 상황과 환경, 그리고 시간의 문제 앞에서는 사치적인 말이다. 1분 남은 출근길에 폐지 줍는 할머니를 도와드리지 않는 것처럼.
왜 자신을 배려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왜 너만 유독 더 배려받고 싶어야 하냐고 되물었다. 감정 조절의 문제가 있는 친구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고 그대로 전화는 종료됐다.
주변 친구들이 늘 말했다. 그와 가까이 지내다 보면 언젠가 트러블이 생긴다고. 그럼에도 용기를 내 다가갔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그건 용기가 아니라 나의 만용이었음을 깨닫는다. 담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를 키우고 싶은 도전이었으나 처참하게 깨졌다.
스스로를 탓하며 괴로워하던 이전과는 달리, 나를 갉아먹지 않기로 했다. 삐죽이며 나오는 엄지 옆 살점을 검지 손톱으로 가차 없이 파내듯 죽은 관계를 뜯어냈다. 붉은 피가 나오고, 물이 닿으면 잠시 쓰릴테다. 그리고 상처가 아물 때쯤 깨진 조각들을 쓸어 담아 휴지통에 넣어야지.
그러고 다시 그릇을 빚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