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always
저 정말로 정민님 응원하고 있어요
방금까지 눈썹 끝이 이마로 향하던 Y연구과장의 눈썹이 일자로 돌아왔다.
S대리의 홍콩 출장으로 연구소 샘플건을 대신 처리해야 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리드타임이 얼마 남지 않은 업무를 해결하느라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다. 퇴근 10분 전 홍콩에서 독기 가득한 연락이 왔고 그제야 연구소 직원의 실수로 샘플을 못 받았다는 걸 인지했다. 서둘러 담당 연구원에게 전화했지만 퇴근시간이 다 됐다는 이유로 다음 주에 해주겠다는 연락을 받고서 피가 거꾸로 흐르는 느낌이었다.
연구소 문 열어두고, 벌크만 두고 가세요. 그냥 제가 할게요.
책임을 다하지 않고 나 몰라라 하는 태도에 말투가 세게 나갔다. 연구실에 가려 옷을 챙기는데 앞자리에서 내 상황을 조마조마 지켜보던 C대리가 본인이 해결하겠다며 일단 앉아있으라 말했다. 결국 월요일 일찍 샘플을 받는 걸로 합의 됐다.
월요일 아침, 연구실로 출근해 연구원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Y연구과장도 같이 나왔다. 오자마자 왜 자신의 직원에게 뭐라 했냐, 우리가 얼마나 바쁜데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냐, 직접 너희가 하던지의 말들이 쏟아졌다. 묵묵히 듣다가 묵혀왔던 한마디 내뱉었다.
과장님, 저 이런 사람 아닌 거 아시잖아요..
연구소 안에서의 내 이미지를 알고 뱉은 말이었다. 순간 Y과장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어느덧 말투에는 차분함과 눈빛에는 측은함을 담고서 나를 바라봤다. 내 마음을 다 안다는 듯 팔뚝의 쓰다듬까지.
복귀하는 차 안에서 핸들에 손을 올리자마자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난 내 감정을 들여다보는 걸 무서워해. 그걸 온전히 느끼기에는 내가 너무 약하거든.
7개월 전쯤 교회에 새로운 친구가 왔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땅으로 고정된 시선에서 뭔가 모를 우울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같은 또래라 모임도 동일했는데 한 주의 삶을 이야기할 때마다 힘겨워하는 그녀가 매번 안쓰럽다는 생각을 했다. 반려견의 죽음, 어린 시절의 상처, 불확실한 현재의 상황들.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을 오랫동안 고심하다 내 책을 선물해 주었다. 서로의 아픔이 동일하지는 않겠지만 위로가 될만한 문구들이 있기를 바라면서.
이번 주 주일에 친구가 내게 다가와 편지를 주고 갔다. 편지 내용에는 그동안 무엇 때문에 힘들었고 어떤 문구가 자신을 위로했는지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작가로서의 기쁨이 뭔지를 알만큼.
자기 전까지 손에서 편지를 놓지 못했다.
S대리가 정민씨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다던데요?
커피를 들고 산책하다가 H주임님이 내게 했던 말이다. 어제 팀장님이랑 상담을 요청한 주임님은 팀장님께 정민이처럼 인정받으려고 노력해라의 말을 들었다 한다. 그러면서 회사에서 살아남으려면 나를 벤치마케팅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고.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회사 생활 7년 차인 주임님에게 이제 5개월 차 신입사원인 나를 보고 배우라니. 난 노하우가 없어서 버틴 것이지, 무엇을 잘하고 인정받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주임님이 하고 싶은 대로 하시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요.
몇 개월을 먼저 버텨 본 너의 결론이었다. 난 이미 알고 있었다. 팀장님은 주임님과 재계약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정신 똑바로 안 차리냐?
점심에 S대리가 커피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직감하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돌아오는 시간이다. 일이 아직 미숙한 주임님의 업무를 더블 체크 해주다 보면 내 업무를 놓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 순간을 S대리는 놓치지 않았다.
S대리의 모진 말들은 한 귀로 들어와서 다시 한 귀로 나간다. 대부분이 업무와는 관련 없는 말들이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죄송하다고 3번쯤 말하면 어느덧 점심시간이 끝나있다.
돌아와 자리에 앉으니 주임님이 내 눈치를 살핀다. 신경 쓰시지 말라고 귤을 내밀었다.
이제는 익숙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