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always
슬럼프네요. 블랙홀에 빠진 기분이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개발팀의 특성상 입사 후 1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개발 미팅에 참여할 수 있다. 자신이 만든 제품의 A-Z까지의 책임을 전부 다 져야 하는 업무이자 이 팀의 핵심 같은 느낌인데 주로 주임, 대리급이 맡는 것이 통상적이다. 연구팀, 생산팀, 기획팀, 자재팀, 영업팀 대리 이상급들과 소통해야 하기에 최하위 포지션인 사원에게는 이런 업무를 주지 않는다. 5개월 차 신입인 나를 제외하고는.
처음 개발 미팅에 참여했을 때,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큰 빔 프로젝터와 가로 테이블에 일렬로 앉아있는 사람들, 개발 방향과 내년 트렌드 분석이 뇌를 통과하고 갈 곳 잃은 눈은 글자 없는 노트를 향했다. 초기에 받았던 품목은 한 가지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6가지가 되었고 업무의 부담감은 날이 갈수록 늘었다. 아무도 내게 개발 프로세스에 대해서 세밀하게 알려주지 않았다. C대리에게 면담 신청까지 하면서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이곳은 야생이에요’라는 원론적인 대답만 돌아왔다.
설상가상 퇴사한 주임님이 업무까지 팀 막내인 내가 떠안게 되었을 때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결국에는 보다 못한 S대리가 팀장에게 요청해 내 일을 잠시 가져가줬지만 언젠가 다시 내게 돌아올 일. 면허를 따지 않은 미성년자가 운전대를 잡고 이리저리 박고 다니는 느낌이랄까. 좌절감은 깊어져 퇴근길에 C대리에게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했다.
평소라면 ‘나도 그랬다’라는 말에 위로를 받지 않았을 텐데 놀랍게도 위로가 됐다. 뭐가 됐든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를 했다면 그걸로 된 것이라 생각하며 다음날 개발미팅에 참석했다.
이번 제안서는 정민이가 제일 잘 썼어. 이건 신제품으로 픽스시켜.
본능적으로 앞옆에 있는 선임들의 얼굴을 쳐다봤다. S대리는 말이 없었고, C대리는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난 듯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말 그대로 좌불안석. 미팅을 마치고 표정을 숨기려 인상을 쓰고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간의 고뇌를 인정받았다는 것이 미칠 듯이 좋았다.
생각해 보니 나 여자친구와 크리스마스랑 생일은 보내본 적 없는 거 같아.
아침부터 교회를 갔다 돌아와 책과 패드를 가방에 주섬주섬 넣고 자주 가는 카페에 앉아 드립 커피를 시켰다. 특별한 느낌이라고는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연인이라는 것. 개의치 않고 페이지를 넘기다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8년 만에 처음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내는 친구는 이 기분이 익숙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돌이켜보니 난 연인과 크리스마스를 보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생일도. 내가 떠나보내거나 나를 떠나보낸 5번의 인연에서 이 사실은 슬프기보다는 한 가지 확신이 생겼다.
이 시간을 함께 보낼 이가 나와 결혼할 사람이구나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