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을 쓰다 2
회고록을 쓰기 시작한 지도 벌써 2년 가까이 흘렀다. 1주기 때 선영에 다녀온 후 마음을 부여잡고 펜을 잡았지만, 마무리는 그리 녹녹지 않았다. 나의 게으름도 한몫을 했다.
아버지의 자서전이 당신의 스믈 다섯 청춘까지의 이야기였다면, 그 이후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그리고 싶었다. 나의 첫 기억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까지 60여 성상의 얘기를 부족한 글로나마 남기고 싶었다. 평소 틈틈이 써왔던 가족에 관한 글을 정리하고.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셨던 동안의 병상일기와 돌아가신 이후 가슴앓이, 파란만장했던 아버지의 삶과 추억 등을 써 내려갔다. 쓰고 고치기를 반복했지만 도저히 성이 차지 않았다. 그러면서 또 훌쩍 시간이 흘렀다.
아버지 회고록을 쓰면서 욕심이 자꾸 늘어났다. 당초 아버지의 육필원고는 스캔작업을 해서, 있는 그대로 책자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이 내 생각을 바꾸게 했다. 아버지의 글은 한자(漢字)가 많이 섞여 있고, 60여 년 전 맞춤법과 옛날식 표현이 많다. 또 직접 펜으로 흘려 쓴 글이기 때문에 누구나 편하게 읽기가 쉽지는 않았다. 할아버지 자서전을 본 우리 아이들이 글을 꼭 읽고 싶다며, 읽기 쉽게 만들어 달라고 했다. 3대가 함께 살면서 할아버지의 정을 듬뿍 먹고 자란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서전의 한자를 한글로 바꾸고, 현재의 맞춤법에 맞춰 몇 날에 걸쳐 직접 타이핑 작업을 했다. 빛바랜 아버지의 육필 원고에는 등잔불 밑에서 잉크를 찍어가며 펜으로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을 젊은 시절의 아버지가 보였다. 자서전은 이제 이 땅에 없는 아버지를 가장 잘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의 흔적이다. 그래서 아들인 나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타이핑을 마친 다음, 낡은 자서전 보전을 위하여 조심스레 스캔 작업을 했다. 60여 년 오랜 세월을 버텨온 누런 갱로지는 만지기만 해도 가장자리가 조금씩 부스러지기도 했다.
스캔작업을 마치고 난 후, 가족사진 앨범 10여 권을 모두 꺼내놓고 아버지를 추억할 만한 사진을 골랐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버지의 어린 시절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 사진과 졸업사진 몇 장이 아버지 추억의 시작이었다. 어머니의 어릴 적 사진 또한 있을 리가 없다. 우리 삼 형제의 시작점인 두 분의 결혼식 사진이 몇 장 남아있을 뿐이었다. 아버지, 어머니와 우리 삼 형제가 모두 함께 찍은 최초의 가족사진은 서울로 이사 온 후 장남인 나의 국민학교 졸업식 때 찍은 흑백사진이다. 어린 삼 형제 옆에는 젊은 아버지, 어머니가 흐뭇한 모습으로 서 계신다. 우리 삼 형제가 결혼한 이후 컬러사진은 넘치고 넘쳤다. 어린 손주들을 보며 행복해하시는 사진이 많은 위안을 준다. 참으로 젊고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칠순, 팔순을 거치면서 사진은 점점 야속한 세월의 흔적을 담고 있다.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아버지와 다섯 형제 남매 분들의 빛바랜 사진들이 더욱 가슴을 시리게 했다. 이 사진들은 별도로 추억 앨범을 만들어 회고록과 함께 형제, 친지들과 나누기로 했다.
아버지 회고록 표지 제목은 '그리움이 된 아버지'로 정하고, 총 35 편의 글을 싣기로 했다.
제1장 '함께한 삶'은 어릴 적 아득한 고향에 대한 기억, 서울로 이사 와서 힘겹게 살던 시절 이야기, 결혼 후 3대가 함께 했던 거실풍경 등을 담았다. 제2장 '아버지의 병상일기'는 갑작스러운 입원 이후 3개월여 동안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느꼈던 희망과 좌절, 희미한 불꽃을 날리며 점점 사위어가는 장작불 같은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그저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아픔을 담았다. 제3장 '그리움이 된 아버지'는 아버지가 살아생전 곳곳에 남긴 정과 그리움을 따라갔다. 거실 식탁에도, 우리 집 뒷산에도, 선영에도, 쓰시던 물건들에도, 즐기던 음식에도 아버지의 기억은 남아 그리움으로 펄럭였다. 제4장 '나의 아버지 어머니' 편에서는 둘째 셋째 아들이 참여했다. 둘째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시 다섯 편을 헌정했고, 셋째도 막내로서 바라본 부모님을 추억하는 글과 아버지가 남기신 등산화를 주제로 시 한 편을 썼다. 마지막 장에는 60여년의 세월을 품은 아버지의 육필원고를 실었다.
아버지 3주기를 맞아 어머니, 삼 형제와 자부, 손자 손녀, 조카들이 선영에 모였다. 고향 창뜰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선영엔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해서 네 분의 큰아버지 큰어머니 내외 분이 차례로 자리하고 있다. 그 맨 마지막에 5남 1녀의 막내인 아버지 묘소가 있다. 1800년대 말, 갑신정변과 갑오경장이 있었던 시절에 태어나 하늘의 인연으로 일가를 이루셨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곳 선영에 자리를 잡으신 이후, 애지중지 물고 빨며 키워낸 자식들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하나 둘 이곳으로 오셨다. 이제는 자식들 중 출가외인 딸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곳 양지바른 고향 땅 선영에서 어머니 아버지 품에 안겨 누워 계신다. 저 세상에 가서도 이렇게 옹기종기 모여 사실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 되고 행복한 일이다. 아마도, 달 밝은 밤이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살아생전 못다 한 얘기들을 도란도란 나누고 계실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꼭 그러실 것 만 같다. 해방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말고는, 할머니를 비롯하여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분들인데, 이제는 아득한 기억 속에 있을 뿐이다. 참으로 덧없는 것이 세월이다.
아버지께 술 한잔 따르고, 회고록과 추억앨범, 당신의 육필원고를 바쳤다. 절을 하고 말을 붙여 봐도 초상화 속 아버지는 말없이 웃고만 계신다. 생전에 아버지는 선영을 찾을 때마다 당신의 묏자리에 앉아, "이 자리가 내가 누울 자리다." 하시며, 고향땅 빈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시곤 했다. 그 쓸쓸한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이제는 그 자리가 당신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었다.
초가을 햇살이 당신이 주시던 사랑만큼 따사롭다.
아버지께 회고록을 바치고 나니, 우리 삼 형제와 자부들, 손자 손녀들 가슴에 영원히 남을 기억들을 책으로 엮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큰 위안을 준다. 먼 옛날, 내가 아버지의 자서전을 보면서 그러했듯이, 훗날 언젠가 우리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도 이 기록을 보며 할아버지 할머니와 부모들의 삶을 추억할 날이 올 것이다.
회고록을 쓰면서 가슴 한 구석을 아릿하게 하는 분이 있다. 어머니시다. 아버지 곁에는 늘 어머니가 계셨지만, 두 분의 마음 거리는 늘 멀기만 했다. 서로에게 마음 한 켠을 내 줄 여지도 없이, 살아가기 위해 버텨야 했던 모진 세월 때문이었으리라. 그 척박했던 세월을 잘도 이겨내시고, 우리 삼 형제를 위해 싸워야 했던 그 지난한 세월을 우리 자식들은 잘 알고 있다. 이제는 아버지와 함께 했던 60여 년의 세월을 부여잡고, 그리움과 외로움을 견디고 계시는 어머니께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씀을 드린다.
이제는 그리움이 된 아버지!
우리 삼 형제의 아버지가 되어주셔서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세 아들과 자부, 여섯 손자·손녀들에게 많은 사랑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버지께서 그토록 사랑했던 우리 가족 모두 당신의 바람대로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아무 걱정 마시고, 아픔 없는 천상에서 부디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족 모두의 그리움을 담아 아버지 영전에 이 글을 바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