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니 시곗바늘이 여덟 시를 넘고 있다. 며칠째 이어진 강행군으로 피로가 몸속 깊숙이 내려앉은 모양이다. 서둘러 짐을 챙겨 길을 나섰다. 오늘은 킹스턴의 아름다운 천섬(Thousand Islands), 그 이름만으로도 마음을 설레게 하던 곳을 향한다. 1시간 30분 정도 달려 천섬에 도착했다. 주변에 마땅한 식당도 없고, 시간 절약도 할 겸, Rest Area에서 라면을 끓여 아침을 해결했다. 아이들이 밥보다 더 맛나게 먹는다. 간단히 해결하는 식사로 라면만 한 것이 없다.
울창한 숲길을 따라 달리자 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이 비친다. 이윽고 시야가 트이면서 수많은 섬들이 흩뿌려진 듯 놓여 있다. 천섬은 캐나다 온타리오주와 미국 뉴욕주 경계에 걸쳐 있는 군도(群島)로, 온타리오호로 흘러드는 세인트로렌스강 하구에 형성되어 있다. 한 탐험가가 이곳을 발견하고 천 개가 넘는 섬들이 있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실제 섬의 수는 1,864개라 한다. 섬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최소 1년 내내 물 위에 드러나 있어야 하고, 나무가 한 그루 이상 있어야 한다’는 기준이 흥미롭다. 우리는 Rockport에서 1시간 코스 유람선을 탔다. 2시간 코스는 미국령 Heart Island에 정박해 성 내부를 관람할 수 있지만, 별도의 입국 절차가 필요하다. 일정상 짧은 코스를 선택했다.
강 위에 점점이 박힌 섬들은 마치 누군가 초록 보석을 한 움큼 집어던져 놓은 듯하다. 손바닥만 한 작은 섬도 있고, 잘 가꿔진 정원과 별장이 자리한 섬도 있다. 그중 가장 작은 유인도인 ‘Just Room Enough Island’는 이름처럼 ‘딱 그만큼의 공간’만 허락받은 섬이다. 집 한 채와 나무 두어 그루, 작은 마당이 전부인 그 섬은 물 위에 떠 있는 한 권의 동화책을 보는 듯하다. 저 섬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생각하니 궁금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가장 큰 섬은 Wolfe Island. 넓은 숲과 집들이 자리 잡은 이 섬은 강과 하늘 사이에서 느긋하게 숨 쉬고 있다. 섬들마다 게양된 국기들은 이곳이 미국과 캐나다 국경에 걸쳐 있음을 말해 준다. 물길 위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흐르고, 섬 위에는 저마다의 삶이 깃들어 있다.
강 위에 떠 있는 성, 사랑이 멈춘 Boldt Castle.
유람선은 천천히 물살을 가르며 나아간다. 갑판 위에 서니 강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간질인다. 섬들이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단연 볼트성(Boldt Castle)이다.
1900년, 뉴욕의 Waldorf-Astoria Hotel을 이끌던 백만장자 George C. Boldt는 사랑하는 아내 루이즈를 위해 120여 개의 방을 갖춘 6층짜리 성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완공을 앞둔 1904년,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공사를 중단하고 다시는 이 섬에 돌아오지 않았다 한다. 사랑을 위해 세운 성이 사랑의 상실로 멈춰 선 것이다. 한 시대의 사랑과 상실을 품은 섬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사랑은 완성되지 않아도 사랑일까? 혹은 완성되지 못했기에 더 오래 남는 것일까? 강은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잔잔히 흘러갈 뿐이다.
푸른 물빛 위에 서 있는 성은 유난히 고요하다. 숲에 둘러싸인 성벽은 화려하기보다 차분하고, 웅장하기보다 쓸쓸해 보인다. 아내를 향한 한 남자의 사랑이 한 편의 서사시로 남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강과 섬 사이에 서서
천섬의 아름다움은 강과 섬 ‘사이’에 반짝이는 윤슬이 되어 흩어있다. 물은 섬을 가르고, 섬은 물을 안아 준다. 경계와 어울림이 동시에 존재하는 풍경. 문득, 우리네 삶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는 같은 강 위에 떠 있는 저마다 하나의 섬이다. 가까워졌다 멀어지며, 때로는 바람과 비를 맞으면서도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킨다.
천섬은 단순히 ‘섬이 많은 곳’이 아니었다. 강과 섬, 역사와 사랑,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진 거대한 수채화였다. 나는 그 수채화 속 한 점 작은 배가 되어 천천히 물길을 건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