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넘는 국경

by 윤기환

경을 향하는 길은 한적하다. 얼마를 달렸을까. 길가에 Hyundai 영업소가 보인다. 미국에서도 현대차는 낯설지 않지만, 캐나다 도로에서는 오히려 더 많이 눈에 띈다. 타국의 길 위에서 우리 기업의 이름을 마주하니 괜스레 마음이 뿌듯해진다. 기업의 땀방울이 자부심으로 다가온다.


검문소가 가까워진다. 약간의 긴장과 함께 I-20와 여권을 꺼냈다. 출입국관리원이 여권을 넘겨보더니 묻는다.

“한국 어디에서 왔나요?”

“서울”이라 답하니, 자신도 문산에서 미군으로 2년을 근무했다며 환하게 웃는다. 소주를 좋아한다며 엄지를 치켜세운다. 뜻밖에 한국을 아는 사람을 국경에서 만나니 반갑다. 짧은 대화가 오가고, 친절하게 입국 절차를 마무리하며 손까지 흔들어준다. 캐나다 입국 때 느꼈던 긴장과는 전혀 다른 기분이다.

Maine 주, Acadia National Park

나흘 만에 다시 미국 땅을 밟았다. 어쩐지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다. 어느새 익숙해진 탓인지, 마치 고향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든다.


메인주에 들어서자 가느다란 비가 내리고, 옅은 안개가 숲 위에 내려앉아 있다. 우리가 달리는 201번 도로 옆으로 Moose 강이 잔잔히 흐르고, 빽빽한 수림이 이어진다. 강원도의 어느 산골을 달리는 듯하다.

창문을 열자 상큼한 공기가 차 안으로 스민다. 차 안에서는 오래된 팝송이 흘러나온다.

Take me home, country road......

온 가족이 목청껏 따라 부르니 금세 차 안은 노래방이 된다. 상쾌하고 기분 좋은 드라이브 길이다. 길은 멀지만, 마음은 한없이 가볍다.


오후 네 시 무렵, 아카디아 국립공원이 있는 작은 항구도시 Bar Harbor에 도착했다. 자그마한 상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사람들은 거리를 거닐며 여유롭게 쇼핑을 즐기고 있다. 항구로 내려가 부두 끝에 서니 비릿한 바다 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아이들과 사진과 비디오를 찍으며 바다가 주는 여유를 즐겼다. 이곳에서 고래를 볼 수 있는 ‘Whale Watch 투어‘가 있다기에 알아보았지만, 아침과 오후 세 시에 이미 출항한 뒤였다.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여행이란 늘 그렇다. 보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담기에는 정보가 부족하고 시간도 늘 쫓긴다.


공원 안으로 차를 몰아 Cadillac Mountain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 서자 시야가 확 트이며 대서양이 펼쳐진다. 안개가 낮게 깔린 바다 위로 고래등 같은 섬들이 떠 있다.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곳까지 온 보람이 느껴진다.


가족사진을 찍으려 옆에 있던 노부부에게 부탁했는데, 공교롭게도 순간, 카메라 배터리가 나가 버렸다. 그러자 그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카메라 배터리를 빼 우리 카메라에 끼워 사진을 찍어준다. 노부부의 온화한 미소가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문득 한국에 계신 부모님이 떠올랐다. 우리도 나이 들면 저 노부부처럼 여유롭고 따뜻한 모습으로 살아가자며 아내의 손을 잡았다. 아내가 살포시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Bar Harbor의 French Bay와 카디악 정상에서 본 대서양

랍스터의 행복 - Trenton Bridge Lobster Pound


공원을 나와 아이들이 기다리던 랍스터 식당으로 향했다. 작년에 이곳을 다녀온 친구가 메인주에 가면 꼭 랍스터를 먹어 보라고 했었다.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넘어오자마자, 아이들은 언제 랍스터 먹으러 가냐,고 성화였다.

Trenton Bridge를 지나자 지붕 위에 LOBSTER라는 커다란 간판을 단 허름한 판잣집이 나타난다. 마당 한쪽에는 큰 가마솥이 김을 뿜고 있다. 대서양에서 잡아 온, 살아 있는 랍스터를 바로 쪄 파는 집이다. 수족관에서 팔뚝만 한 랍스터 세 마리를 고르자, 종업원이 “Great selection!”이란다. 이렇게 큰 랍스터 세 마리를 100달러도 안 되는 가격에 먹을 수 있다니 놀랍다.

마침내 우리 테이블 위에 붉게 쪄진 랍스터가 올라왔다. 탐스럽게 윤이 난다. 오늘은 마침 아이들 엄마의 생일이라서 의미 있는 식탁이다. 아이들이 “엄마, 생신 축하해요!” 건성으로 축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랍스터를 집어 든다. 준비해 온 초고추장에 살점을 찍어 한입 베어 물었다. 달콤하고 탱글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아이들에게 살을 발라 나눠 주며, 먹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흐뭇하다. 자식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부모에게 큰 행복이 또 있을까.

랍스타의 행복

여행 일주일째

이제 우리는 보스턴으로 향한다. 내일 오후쯤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더 빠른 I-95 대신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US-1 도로를 택했다. 오늘이 아내의 생일이니,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하룻밤 묵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길에서 만나는 작은 낭만 하나쯤은 남겨 두고 싶었다. 그러나 해가 지자 길은 금세 어두워진다. 바다는 보이지 않고, 가끔 불빛이 켜진 집들이 스쳐 갈 뿐이다. 지나가는 차도 드문 고요한 길을 한참 달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1번 도로는 자취를 감추고 낯선 길로 이어진다. 아쉬움을 접고 결국 I-95로 방향을 틀었다. 밤 열 시가 넘어 어느 허름한 모텔에 여장을 풀었다.

오늘로 여행 일주일째. 우리는 이미 3,000마일, 거의 4,800킬로미터를 달려왔다. 지도 위에서는 짧아 보이던 길이 가도 가도 끝이 없다. 그 먼 길 위에 우리는 하루하루의 작은 이야기들을 켜켜이 쌓아가고 있다.

늦은 밤, 아내의 생일을 위해 작은 파티를 열었다. 아이들을 위한 과자와 간단한 안주, 여행 가방 속에서 꺼낸 소주 한 병. 낯선 도시의 모텔 방이지만 가족이 둘러앉으니 그곳이 곧 우리 집이 된다.

창밖에는 깊은 밤이 내려앉았다. 멀리 어둠 속으로 길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 잠시 그 길가에서 쉬어 간다. 내일 아침이 오면, 다시 그 길 위를 달릴 것이다. 또 내일이 기대된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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