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의 서사를 품은 도시, 보스턴

by 윤기환

긴 여정 중의 아침은 늘 무겁다. 요란한 알람 소리에도 아이들은 꿈결을 헤매고, 종일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나 역시 천근만근인 몸을 겨우 일으켰다. 아내만이 홀로 분주히 아침을 지으며 정적을 깨울 뿐, 방 안엔 여전히 잠의 잔향이 가득하다. 밥도 안 먹고 잠을 더 자겠다고 투정 부리는 딸아이를 달래며 치른 한바탕 '아침 전쟁'. 서둘러 끼니를 마쳤는데도, 시곗바늘은 벌써 오전 9시를 훌쩍 넘어서고 있다.


세 시간 남짓 달렸을까. 뉴햄프셔와 경계를 이루는 피스카타콰강 (Piscataqua River)의 물결이 창밖으로 스친다. 평화롭다. 매사추세츠 주경계를 넘어서자, 멀리 보스턴의 스카이라인이 펼쳐진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대도시의 숲'이다. 보스턴과 뉴욕, 워싱턴으로 이어지는 동부 대도시 여정의 서막이 열리고 있다. 복잡한 도심 진입을 앞두고, 운전대를 잡은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다.


보스턴. 200년 미국 건국의 서사가 도시 곳곳에 화석처럼 박혀 있는 곳이다. 1770년, 부당한 세금에 항거하던 시민들의 피가 흐른 보스턴 학살의 현장부터, 1773년 차(茶) 상자를 바다로 던지며 자유를 갈망했던 '보스턴 차 사건'의 함성까지. 이 도시는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다. 그 푸른 자긍심이 붉은 벽돌 건물마다 배어 있는 듯하다.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


첫 발걸음은 지성의 전당, MIT로 향했다. 1861년 개교 이래 세계 과학의 이정표를 세워온 이곳은, 역사에 비해 고풍스러움보다는 현대적인 조형미가 캠퍼스를 채우고 있다. 의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거닌 교정은 생각보다 아담했지만,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학문적 열기는 결코 가볍지 않음을 가슴으로 느끼게 한다.


MIT 캠퍼스

트롤리버스 시내 투어


본격적인 투어를 위해 트롤리버스에 몸을 실었다. 도시의 주요 거점 23곳을 잇는 이 티켓 한 장은 낯선 이방인에게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 달린다. 옆이 확 트인 버스 사이로 매캐한 매연 냄새가 섞여 들어오지만, 뺨을 스치는 시원한 강바람이 그 불쾌함을 상쇄하고 남음이 있다. 안내원도 없이 운전과 설명을 동시에 해내는 기사의 목소리를 따라 보스턴의 유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옛 주 의사당의 위엄, 1775년 독립전쟁의 신호탄이 되었던 올드 노스 교회의 첨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군함 USS 컨스티튜션호. 그리고 로마네스크 양식의 정수인 트리니티 교회와 도시를 굽어보는 존 행콕 타워까지, 보스턴은 과거와 현재가 가장 세련되게 공존하는 도시다.


트롤리 버스와 Old North Church
트리니티 교회와 독립선언이 선포된 구 주의사당


어긋난 일정


도심의 풍경에 취해 있을 무렵, 차이나타운에 다다랐다는 안내가 들린다. 허기진 아들의 제안으로 버스에서 내려 인근 베트남 국숫집을 찾았다. 뜨끈한 국물에 식사를 마친 아이들의 얼굴에 비로소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진다. 하지만 짧은 만찬의 대가는 컸다. 다시 돌아온 정류장에는 버스가 오지 않았고, 금쪽같은 40분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결국 아들이 안내 책자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사연인즉, 우리가 내린 곳이 정식 정류장이 아니었음에도 기사의 배려로 내려주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잠시 후, 오직 우리 가족만을 태우기 위해 달려온 특별 전용 버스가 도착했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기사는 미안했던지 한국 김치를 안다며 넉살 좋게 말을 건넸고, 일정 차질을 배려해 내일 다시 이용할 수 있는 확인증까지 써준다. 비록, 일정상 내일 이용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들의 세심하고도 철저한 서비스 정신에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진다.


비록 '보스턴 차 사건' 현장과 박물관을 놓친 아쉬움은 남았지만, 여행이란 본디 예기치 못한 어긋남 속에서 기억되는 법이다. 흐트러진 계획을 뒤로하고 하버드로 향하는 길, 붉은 태양이 서녘으로 서서히 기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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