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잠이 가져다준 달콤한 휴식 끝에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오전 10시, 머물던 인(Inn)을 나서 두 시간을 달리니 로드아일랜드주의 남쪽 끝, 푸른 바다를 품은 항구도시 뉴포트(Newport)가 모습을 드러낸다. 처음 마주한 도시는 의외로 소박하다. 미국 부호들이 모여 산다는 명성과 달리, 방문객 센터로 향하는 길은 여느 작은 마을처럼 정겹고 평온하다. 하지만 센터 안을 가득 메운 인파를 보는 순간, 이 작은 도시에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부의 결정체, '맨션(Mansion)'들을 마주하기 위해서이다. 더 브레이커스(The Breakers), 마블 하우스, 엘름스 등 이름만으로도 존재감을 뽐내는 저택들이 대서양 연안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곳이다. 우리는 그중 가장 규모가 크다는 '더 브레이커스'를 택했다. 1인당 15불이라는 적지 않은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선 동네는 초입부터 범상치 않다. 한쪽으로는 대서양을, 또 한쪽으로는 이스턴 비치(Easton's Beach)를 끼고 그림 같은 집들이 이어진다. 속도를 줄여 천천히 풍경을 음미하다 마침내 저택 정문에 다다랐다.
정문을 지나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집이 아니라 차라리 하나의 '궁전'이다. 3층 높이의 육중한 저택과 정갈하게 다듬어진 정원, 그리고 집 뒤편으로 돌아서자마자 터져 나오는 탄성. 확 트인 대서양이 한눈에 들어오는 앞마당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광활하다. 아이들은 신이 나 잔디밭을 깡충깡충 뛰어다니고, 아내와 나는 드넓은 바다 앞에서 잠시 무념(無念)에 잠긴다.
영화로운 삶과 그늘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들어선 실내는 19세기 말의 화려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70개의 방, 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최고급 대리석이 깔린 로비, 이천 년의 역사를 머금은 실크 벽화와 천장을 수놓은 천상(天上)의 그림들. 침실부터 무도회장, 도서관까지 무엇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공간이다. 벽에 걸린 가문 사람들의 초상화를 보며, 왕족처럼 살며 참으로 행복하게 살다간 한 가문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완벽해 보이는 삶 뒤편에도 그늘은 있었다. 예일 대학에 다니던 21세의 촉망받던 아들을 병으로 잃은 아버지의 슬픔이 저택의 화려함 속에 묻어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기리기 위해 예일대학에 건물을 기부했다고 한다.
한 시간 남짓의 투어를 마치고 나오며,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그 끝에 남는 삶의 덧없음을 본다.
클리프 워크(The Cliff Walk)
뉴포트의 매력은 저택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해안선을 따라 깎아지른 듯한 절벽 길인 '클리프 워크(The Cliff Walk)'를 걸으며 밀려드는 파도를 감상했다. 딸아이가 바다를 보더니, 어느새 차 안에서 수영복을 갈아입고 나온다. 그 천진한 모습이 너무 예쁘다. 인근 이스턴 비치로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쌀쌀한 바닷바람이 불었지만, 대서양의 첫 물결에 발을 적시는 기분은 묘한 설렘을 준다. 아이들은 어느새 온몸이 젖도록 물놀이에 빠졌고, 나와 아내는 그 평화로운 풍경을 카메라에 담으며 백사장 위에 몸을 뉘이고 한가로운 시간을 즐긴다.
차 안에서 비벼 먹은 '가족 특선 양푼 비빔밥'의 맛은 그 어떤 화려한 저택의 만찬보다 달콤하다. 대서양의 파도 소리를 반찬 삼아 가족이 함께 나누는 한 끼, 이야말로 뉴포트에서 만난 보석 같이 반짝이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