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2 - 맨해튼 야간버스 투어

by 윤기환

유스호스텔에는 주차장이 없었다. 이리저리 돌았지만, 주차할 공간이 없다. 인근 초등학교 옆 도로 안내판에 적힌 “오후 4시부터 다음 날 아침 7시까지 주차 가능”이라는 문구가 반갑다. 빈 공간 하나를 발견하고 겨우 주차를 했다. 대도시의 주차난은 어디나 똑같다.


맨해튼 투어는 지하철로 시작하기로 했다. 뉴욕 지하철은 1904년에 개통된 이후 계속 덧붙여지고 얽히며 지금의 미로 같은 구조가 되었다. 도시의 성장만큼이나 복잡해진 이 지하망은,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작은 세계와도 같다.


오늘의 길잡이는 아들이다. 미국 생활 10개월, 이제는 낯선 도시에서 길을 찾을 만큼 자랐으리라 믿고 맡겼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아들이 자판기에서 20달러짜리 메트로카드를 끊고 노선도를 펼친다. 이리저리 노선을 짚어보더니 지나가는 사람에게 조심스럽게 길을 묻는다. 그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작은 시험을 치르는 아이처럼 보인다.

열차에 올랐다. 나는 일부러 눈을 감았다. 아들이 “내리세요”라고 말할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편은 불안했다. 슬쩍 눈을 떠보니, 녀석은 노선도를 들여다보며 열심이다. 책임을 맡은 아들의 얼굴에 비장함이 보인다.

“여기서 내려요.” 아들의 말을 듣고 내려보니, 바로 타임스퀘어 역이다. 첫 관문을 무사히 통과했다. 나는 아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지상으로 올라오자, 뉴욕의 심장, 타임스퀘어가 눈앞에 펼쳐진다. 타임스퀘어는 1900년대 초 신문사들이 몰려들며 도시의 중심으로 떠오른 곳이다. 이후 극장과 광고, 자본이 뒤엉키며 오늘날 ‘세계의 교차로’라는 이름을 얻었다.


빌딩 숲 사이로 쏟아지는 빛, 사람의 물결. 서울의 명동과 닮은 듯하면서도, 훨씬 더 거대하고 빠르게 숨 쉬고 있다. 다양한 인종의 얼굴들이 스쳐 지나간다. 아이들은 연신 감탄하며 “뉴욕이 너무 좋다”고 한다. 나는 “이런 번잡함은 조금 버겁다”고 했지만,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다. 세대와 취향의 차이가 이렇게 드러난다.

타임스퀘어와 빌딩 숲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중국식 뷔페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여행에서 배고픔은 모든 감동을 반감시킬 수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서자, 도시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어둠이 내려앉은 자리마다 네온사인이 피어나고, 그 빛이 건물과 사람을 동시에 물들인다. 그때 아들이 “아빠!” 하며 외친다. 녀석이 가리킨 곳에는 한국 유수 기업들의 광고가 빛나고 있다. 세계 자본과 문화의 중심에서, 우리 기업 이름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한 자부심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2층짜리 빨간 야간 투어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월스트리트를 지나고, 브로드웨이의 극장가를 스치며, 소호의 거리로 이어진다. 한때 네덜란드의 식민지 ‘뉴암스테르담’이었던 이 섬은, 17세기 영국의 손에 넘어가며 ‘뉴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후 이 작은 섬은 세계 금융과 문화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버스 위에서 바라보는 맨해튼은, 그 긴 역사를 압축해 보여주는 한 장의 지도 같다.


버스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스쳐 지나간다. 어릴 적 사회 시험 문제로 외웠던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 그 이름을 종이에 적던 어린 내가, 지금 그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다. 35년 세월이 지나, 그때의 나와 비슷한 나이의 딸이 내 옆에 앉아 있다.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 어느새 나를 이 자리까지 데려왔다.


야간투어의 절정은 브루클린 브리지 근처에서 맞이했다. 강 건너로 펼쳐진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작품이다. 불빛은 강물 위에 부서져 또 하나의 도시를 만들고 있다.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강 건너편에서 불꽃이 솟아오른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의 선물이다. 밤하늘과 강물, 그리고 유리창에 반사되는 빛이 한데 어우러지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흐려 놓는다. 순간, 이 도시가 왜 ‘잠들지 않는 도시’라 불리는지 알 것만 같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허드슨 강의 브루클린 다리와 뉴욕의 야경


다시 돌아온 타임스퀘어에서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다. 거대한 무대 위에서 한 록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름은 알지 못했지만, 그 열기는 충분히 느껴진다.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 있지만, 놀랍게도 질서는 흐트러지지 않는다. 차도는 그대로 유지되고, 사람들은 그 경계를 넘지 않는다. 자유와 질서가 공존하는 그들의 문화가 그렇게 일상 속에서 완성되고 있음을 본다.

공연이 끝나고 나니, 시간은 자정이 가까워져 있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몸은 한없이 무겁고, 발걸음은 느리다. 방에 들어서니 다른 여행자들은 이미 깊은 잠에 빠져있다. 조심스럽게 침대에 올라 몸을 눕혔다. 낯선 이들과 한방을 쓰는 어색함 속에서 한참을 뒤척이다가, 오늘의 빛과 소리를 떠올리며 천천히 잠에 빠져든다.

월, 금 연재
이전 15화뉴욕 1 – 뉴욕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