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1 – 뉴욕 가는 길

by 윤기환

아침 8시. 코네티컷주의 뉴헤이븐(New Haven)을 뒤로하고 뉴욕을 향해 길을 나섰다. 60마일 남짓, 넉넉잡아도 한 시간이면 닿을 거리다. 그러나 뉴욕에 가까워질수록 도로는 점점 숨이 막히듯 막혀 간다. 오늘 이 길은 거리보다 시간의 깊이가 더 길다. 일찍 서둘렀던 출발이 오히려 출근 시간의 물결 속으로 스며들어 버린 것이다.

차는 움직이지 않고 머뭇거리고, 시간은 흐르지 않고 쌓여만 간다. 두 시간이 지나도 정체는 풀릴 기미가 없다. 그 사이, 아내와 아이들은 화장실이 급하다며 조용한 재촉을 보내온다. 가까스로 Exit을 빠져나와 공원 화장실에서 급한 숨을 돌렸지만, 다시 I-95번 도로로 올라서는 길은 쉽지 않다. 길 하나를 잘못 들면서, 우리의 방향은 서서히 어긋나기 시작했다. 동부의 도로는 서부와 달리 출구와 본선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곳이 많다. 몇 번을 돌고 또 돌았을까. 우리는 점점 우리가 어디쯤에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지점으로 흘러 들어가는 듯했다. 지도를 펼쳐 들고 한참을 들여다본 끝에야, 우리가 ‘할렘’이라는 이름의 공간을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도시가 낳은 대표적인 빈민 지역 할렘가!

할렘은 1658년 네덜란드의 총독 페터 스토이베산트가 네덜란드의 도시 '하를럼'의 이름을 따서 정착지로 조성했다고 한다. 한때 여름 별장이 지어질 정도로 거주지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고, 1920년대 이후 센트럴과 함께 웨스트 할렘은 미국 흑인사회에서 예술 작품이 쏟아져 나오면서 "할렘 르네상스"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흑인들의 거주, 상업지대로 단단한 성장을 해왔지만, 인구가 계속 늘어나면서 질병과 빈곤, 실업 등의 문제가 생겨 빈민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도로 옆에는 작은 상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사람들은 신호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길을 건넌다. 거리는 어수선하고, 낡은 전차는 쇳소리를 길게 끌며 지나간다. 그동안 보아온 미국의 도시 풍경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삶을 찾아 도시로 밀려든 사람들이, 또 다른 벽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곳. 세계에서 가장 풍요롭다고 믿었던 나라의 또 다른 얼굴이, 그곳에는 조용히 드러나 있었다. 길을 잃고 헤맨 시간은 길었지만, 어쩌면 이곳을 지나가는 것 또한 하나의 인연이라 여겨진다. 만약 곧장 맨해튼으로 들어갔다면, 이 낯선 풍경을 마주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길을 잡았지만, 이번에는 뜻밖에도 조지타운이 보인다. 당혹감이 밀려오는 순간, 차창 밖으로 익숙한 한글 간판이 스쳐 지나간다. 마치 먼 길에서 만난 등불처럼 반갑다.

작은 인쇄소 문을 열자,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국인이 따뜻한 미소로 맞아준다. 이곳에서 십여 년째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다 한다. 이 낯선 곳에서 한국인을 만나니 너무 반갑다. 그는 뉴욕으로 가는 길과 숙소에 대하여 차분히 알려준다. 짧은 대화였지만, 모국어로 나눈 말들은 오래 묵은 갈증을 씻어주는 물처럼 편안하다. 우리말은 돌아갈 수 있는 집 같은 언어다.

그가 알려준 대로 퀸즈(Queens) 거리의 플러싱(Flushing)으로 향했다. 거리에는 한글 간판들이 이어져 있다. 교회, 식당, 병원, 찜질방까지, 낯선 땅 위에 작은 고향이 내려앉아 있는 듯하다. 숙소를 구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다. 중국인이 운영하는 모텔들이 대부분이고, 가격도 만만치 않다. 하룻밤에 100불이 넘는 데다, 추가 보증금까지 요구하는 조건이 선뜻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결국 발길을 돌렸다.

근처 한인 마트에 들러 아내가 반찬거리를 고르는 사이, 여행 안내서를 넘기다 맨해튼의 유스호텔을 발견했다. 전화를 걸어 가격을 확인한 뒤 서둘러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전화로 알았던 35불이라는 가격은 ‘1인당’ 가격이었다. 이미 예약은 내 이름 한 사람만 되어 있었고, 네 명이 묵으려면 추가 요금이 필요했다. 세금을 더하니 130불. 모텔보다 오히려 비싼 가격이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지만, 다시 숙소를 찾아 헤매기에는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남아 있지 않다. 결국 체크인을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여덟 명이 함께 쓰는 방, 이층 침대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낯선 이들과 공간을 나누는 일이 편안할 리는 없지만, 여행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그마저도 하나의 이야기로 남을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저녁 6시를 훌쩍 넘기고 있다. 뉴헤이븐을 떠난 지 꼬박 열 시간 만이다. 아이들은 “출근 시간에 뉴욕 입구에 들어와서, 퇴근 시간에 도착했다”며 피곤한 아빠를 놀려댄다. 깔깔거리며 웃는 아이들의 맑은 얼굴을 바라보니, 길 위의 고단함도 조금은 가벼워진다. 험난했던 하루의 끝에서, 가장 따뜻하게 남는 것은 결국 함께 고생한 가족의 웃음이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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