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기환 Aug 02. 2024

불암산 정상

        

  불암산 정상에 앉아있다.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바람 선선하다.

수락, 도봉, 북한산이 내 몸을 감싸듯 펼쳐있고, 멀리 남산, 관악산까지도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다.     

15년 전쯤, 아버지가 일흔 중반쯤 되셨을 때였다. 아버지와 나, 초등학생인 손자가 이 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을 때가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엔 고추잠자리가 지천으로 날고 있었다.

“이 높은 산에 웬 잠자리가 이리도 많냐?”며 신기한 듯 아버지는 내게 말했다.

나는 하늘을 뒤덮은 잠자리 떼를 보며, 어릴 적 잠자리 채를 만들어 거미줄 쳐 주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얘기했다. 아버지도 그때의 아련한 기억을 소환하며 행복해하셨다.


  어릴 적, 여름부터 시작되는 나의 잠자리 잡기는 가을이 되어 고추잠자리가 지천으로 날아다닐 때면 절정에 이르렀다. 잠자리 채를 든 나는 위퉁은 벗은 채 시꺼먼 반바지 하나 걸쳐 입고, 한여름과 가을 내내 잠자리를 쫓아다녔다. 내가 지금도 얼굴이 까무잡잡한 것은 그때 햇볕에 너무 그을려서 그런 거라며, 고인이 되신 고모는 나를 놀리곤 했다.

     

  아버지는 그 뒤로 불암산 정상에는 오지 못하셨다. 가끔씩 불암산 꼭대기에 한 번 더 가자고 하면 "이젠 힘이 부쳐 힘들다. 니들이나 다녀와라" 하시며, 둘레 길로 발길을 돌리셨다.


불암산 정상에 그 많던 잠자리가 언제부턴가 사라지고 없다. 오늘도 말벌 몇 마리가 왱왱거리며 날고 있을 뿐, 잠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잠자리가 천적인 말벌을 이기지 못하고 사라졌듯이, 삶의 천적인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도 이 자리에 없다.


  애써 잊으려 왔는데, 불암산 정상에도 아버지의 기억이 남아 있다. 잊으려 한다고 억지로 잊히는 것은 아니다. 차츰 눈물 마르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는 날, 이곳이 더 애틋해지겠지.          

이전 11화 칼국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