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첫 사인회
어느 날 한의원에 갔다. “최 OO님 오늘도 허리하고 무릎 보시는 거 맞죠? 지난번 하고 같은 곳 보면 되나요?” “아니요. 오늘은 발목 하고 어깨가 아프네요?” 아무튼 여기저기 돌아가면서 아파서 나는 한의원을 자주 간다. 어떨 땐 ‘내가 관심받고 싶어서 가는 거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물리치료를 받고 침을 맞고 나면 심리적인 것인지, 마음이 편안해지고 통증도 사라지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원장님은 항상 많은 것을 물어본다. “지난번 아픈 허리와 무릎은 괜찮으세요?” 물론 다른 의사들도 그렇게 하지만 이 원장님은 특히 환자의 개인적인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 같다.
얼마 후, 또 한의원에 갔다. 요즘 퇴고한다고 컴퓨터를 많이 했더니 뒷목이 아팠다. “선생님, 저 책 출간했어요. 나중에 책 나오면 선물로 드릴게요.” “제목이 뭐예요?” “『판 깔아주는 흥 많은 할머니』.” “네, 고생하셨습니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참 적지 않은 나이에 책을 쓴다는 것이 어려우셨을 텐데…. 저도 책을 쓰고 싶은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는데 아직 시도조차 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최OO 님이 책을 내셨다니 정말 축하드립니다.”
출간 후, 홍보하느라 너무 바빴고 몸도 그만그만해서 한의원을 몇 주째 가지 않았다. 오늘은 한의원에 가서 눈도 힘들고 뒷목이 아프니 침을 맞아야겠다. 예약하는 것도 힘들어서 나는 틈이 나면 그때그때 전화로 예약해서 간다. 간호사가 예약할 때 써놓지 않아도 선생님은 늘 내 눈에 관심을 두고 눈 상태를 체크하곤 하신다.
침대에 누워 물리치료를 받을 때, 다른 환자의 이야기를 다 들어가며 소통하는 것이 자연적으로 들린다. 이번에도 묻는다. “지금도 신도림에 손주 봐주러 날마다 가시나요? 운동은 매일 하시지요? 살아가는데 무엇이든 꾸준히 하는 일이 있어야 덜 지치고 도움도 돼요.” 제 성향을 아시는지 심지어 허리가 아파 침 맞을 때도 운동을 그만두지는 마시고 살살하라고 하신다.
드디어 실물로 된 책을 손에 쥐었다. 화면 속에서만 보던 표지가 종이의 감촉으로 조용히 다가왔다. 퇴고를 거듭했던 밤, 망설이며 고쳐 썼던 문장들, 혼자 흔들렸던 순간들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감사인사도 해야 하고 책 홍보도 해야 하니 일이 많았다. 11월 하순, 점심시간이 되기 전 마지막 타임에 한의원에 갔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선물할 책에 미리 사인을 했다. 물리치료를 마치고 원장님이 침을 놓으러 오셨다. “원장님, 이 책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안 그래도 최OO 님이 손주가 다섯이라서 책 다섯 권을 사놓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침 맞고 가시기 전에 사인해 주시고 가세요.” 기다렸다는 말씀 한 마디에 책을 쓰며 보낸 순간들이 한꺼번에 떠오르고 기쁨과 고마움이 뒤섞여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렇게 환자의 마음을 읽어주는 사람이 나의 주치의라니!’ 평소에 그분이 아픈 몸만 치료해 주는 게 아니라 마음을 먼저 치료해 주는 철학을 가졌다고 생각은 했다.
그런데 자기 환자가 책을 출간했다고 이렇게 사인받을 준비 하시고 다섯 권씩이나 사서 기다렸다니! 너무 감사하고 영광스러워서 어찌할 찌 몰라 허둥댔다. “원장님 제 전화번호도 없는데 어떻게 책을 사셨어요? 혹시 제 이름으로 검색하셨나요?” “아니요. 지난번에 말씀하셨어요. 책 제목이 너무 재밌어서 외워두었지요. 머릿속에 확 들어왔거든요.”
인증 사진을 찍고 한 권 한 권 사인을 하는데 원장님은 문구까지 다 생각을 하고 계셨다.
첫 번째 책은 황혼 육아로 지친 할머니들께 전하는 위로의 글.
두 번째는 현장에서 애쓰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에게 보내는 격려의 말.
세 번째는 이 한의원에 오시는 환우들의 가정에 행복과 평안을 기원하는 글.
한 권 한 권 소중한 문구를 같이 의논하면서 적어 내려갔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책에는 어떤 문구를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철산역 근처 수인 한의원 원장님과 첫 사인회를 하다)
‘키도 훤칠한데 마음씀씀이까지 훤칠하시다니!’ 책도 다 읽으셨는지, “운동은 계속하고 계시지요? 피아노는 몇 곡이나 치시나요? 나는 피아노를 2년 동안 배웠는데, 한 곡도 제대로 연주하지 못해요. 나이 들어도 무엇이든 꾸준히 하는 취미 생활하는 것이 중요해요.”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신다.
환자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힘들 때는 같이 힘든 표정을 지어 주고 어렵다고 말할 때는 “그렇게 어려워서 어떻게 해요.”라며 공감의 표정을 짓는다. 환우들의 감정을 먼저 읽어주는 선생님이시다. 그러니 환자들도 많이 의지하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것 같다. 환자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을 우선 다독여 주는 의사라는 것을 그날 다시 느꼈다. 우리에게 환자의 몸과 마음 치료를 해주는 주치의 같은 의사나 한의사가 가까운 곳에 계시는 것도 큰 행복이다.
지금껏 손주들과 팬 사인회, 동아리 회원들과 운동센터에서 함께 운동하는 친구들의 책에 사인을 간간이 했다. 하지만, 이렇게 한의사 원장님의 권유로 사인하기는 참 뜻밖이었고, 너무 감사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러웠다. ‘내가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칠 만한 작가의 역량이 있는가?’ 내가 부끄럽다며 얼굴을 가리고 나오니 간호사들도 “아유 작가님인데 왜 부끄러워하세요? 저희도 꼭 읽어볼게요. 그리고 관심 있는 환우들에게 빌려주고 대기실에 비치해 놓겠습니다.”
나보다 출간을 먼저 한 선배 작가님은 말했다. “작가님, 출간하고 나면 재밌는 일이 많이 생길 거예요.” 과연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까 의아해했는데…. 정말 뜻밖에도 한의원에서 원장님과 함께 팬 사인회를 했다. 책을 내고 나서야 알았다. 글은 멀리 가기보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먼저 닿는다는 것을. 진료실 한 편에서, 대기실 의자 위에서, 누군가의 하루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만으로도 글은 제 몫을 다하는 게 아닐까. 뜻밖이었던 그날의 사인회는 내가 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건네졌다는 사실을 조용히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