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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림이 언니 최윤순 Jan 25. 2023

날씨 깡패

손주들과  주말 농장 체험하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여러 상황이 얽히고설킬 수밖에 없다.

그 많은 것 중 기후, 날씨만큼 영향력이 큰 것도 드물다. 특히 기후 변화 위기가 한 국가 아니 전 세계의 경제, 사회, 정치 문제까지 많은 부분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라고 했던가!


조선시대 땐 왕과 조정 신하들, 온 백성이 농사짓는 일에 초미의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홍수 대비를 위해 제방과 댐을 만들어 치수를 관리했는데, 현존 최고(最古)의 낙동강 대나무 숲 제방이 있었다는 역사적 자료가 최근에 양산시에서 발견되었다. 가뭄이 심할 때면 왕과 전 백성이 대대적으로 기우제를 올리며 간절히 비오기를 기다렸다. 농업 국가였던 우리나라는 24절기에 맞추어 파종, 수확을 했고, 농사일을 시작하고 끝맺음하는데 24 절기가 매우 중요했다.


  올해 시민 주말 농장에 3.3평짜리 딸네 것, 우리 것, 두 개를 분양받았다. 그곳에 농작물을 심는데도 알아야만 하는 것이 엄청나 시작하는데 애로가 많았다. 그냥 씨 뿌려 싹이 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일은 순서가 있고 때론 적당히 묵히거나 기다리는 것, 기다림의 미학이랄까? 3월쯤 시민주말농장에 당첨되니 나는 당장 씨 뿌리거나 모종을 심는데 손주들과  함께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하지만 주말 농장 선배는 한 밤중 최저 온도가 영하로 떨어지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고 조언했다. 한 밤 중 최저 온도가 농사짓는데 중요하구나! 한 밤중 최저 온도가 영상이 되길 기다려 간신히 상추, 쑥갓, 아욱, 고추, 토마토 모종을 심었다. 파종 후 한동안 갑자기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 냉해라도 입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그 농장은 대중교통이 닿지 않은 한적한 산속에 있다 보니 물 주러 다니는 것이 큰 부담이었고, 너무 외진 곳이라 시간이 있어도 혼자 가기는 겁이 났다. 주말에 남편과 같이 가니 제 때에 물을 먹지 못한 어린 모종은 배배꼬여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간신히 꽃을 피운 오이, 완두콩도 엉망진창이 되었고 심기만하고 열매 맺기만 기다렸던 나의 안일한 생각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이럴 때 쏴 악하니 비라도 뿌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마른하늘만 멀뚱멀뚱 쳐다보곤 했다. 바싹 마른 밭고랑에 물 조리개로 열심히 물을 주지만 마치 짝짝 갈라진 내 건조한 피부처럼 물을 머금고 있지 못하고 삽시간에 물은 어디론가 빠져버렸다. 날마다 밭에 가서 물을 주면 조금 나을 텐데 텃밭에 가기가 엄청 어려웠다.


  그러나 감자, 고구마는 원래 구황작물이라서 그런지 심한 가뭄 중에도 잘 자랐고 자기들이 직접 모종을 심었던 그 감자가 주먹만 하게 큰 모습으로 땅에서 뽑아져 나온 순간 손주들은  흥분하고 들뜬 목소리로 “ 할머니, 땅 속에서 감자가 줄줄이 따라와요. 우리 손보다 큰 것도 있어요. 어머! 애기 감자도 올망졸망 엄마 따라 왔나 봐요, 하하하.” 자기들 손보다 크다며 대보고 소리 지르며 난리다. 자기들 손으로 직접 캔 감자를 쪄먹고, 부쳐 먹고, 볶아먹고, 튀김까지 ~~ 실제 자기들이 수확한 것을 음식으로 먹으니 할머니가 가면 신나서 자랑하는데 너무 귀엽다. 아이들은 방울토마토, 오이도 가끔씩 따보고, 보라색 가지도 따보며 생명의 소중함을 느꼈을 것이다. 특히 다른 집 텃밭에 앙증맞게 매달린 애기 수박, 노란 참외, 보랏빛 라벤더 꽃, 간간히 날아다니는 흰 나비, 노랑나비에 홀려 쫓아다니는 아이들을 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노력해서 일군 땅에 또 다른 생명체가 대비되어 희열감은 극에 달했다. 아이들이 여기 저기 거침없이 뛰어다니며 까르르 까르르 웃는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텃밭에 가득 찼다. 이런 경험이야말로 진짜 살아있는 농장 체험, 찐 생태 수업이었다. 기뻐 뛰어다니는 귀여운 손주들과 더 자주 이런 시간을 갖고 싶었지만 찌는 듯한 땡볕 때문에, 갑자기 불어오는 태풍과 지리한 장마 등 변화무쌍한 날씨로, 때론 서로 시간 맞추기가 어려워서 여러 번 가진 못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어느 날 저녁 때 피서지삼아 초록 나무 그늘 아래서 가족들과 함께 먹은 샌드위치와 과일, 아이스크림 케익 또한 그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이 조그만 텃밭은 커가는 우리 손주들에게 자연, 식물 체험학습장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내 년에도 기회가 되면 또 이런 재미를 느끼고 싶다.


  우리 부부는 둘 다 농촌에서 자랐고 지독하게 농사일도 거들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농사일? 아니 무슨 일이든 자기가 주관하느냐? 아니면 조력자로 남느냐 ? 하는 것은 천지차이인 듯하다. 더욱이 우린 둘 다 눈썰미도, 기억력도 없고, 자연의 순리를 파악하지 못해서 파종 때 갈팡질팡하다가 적절한 시기를 놓쳤다. 한 여름이 지나고 가을 김장 배추, 무, 쪽파, 갓을 심는 게 문제였다. 언제 심을 것인지? 씨앗으로 심을 건지? 모종으로 심을 건지? 남편과 나는 항상 달랐다. 나는 뭐든 생각나면 즉시 실행에 옮기는 행동형이고, 그는 조금 시간을 두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신중한 유형이다. 어떨 땐 내 선택이 옳고, 어떨 땐 그의 선택이 옳다. 여름 채소 키울 때는 그렇게 비가 안와서 아무리 채소지만 살아있는 생명체를 지켜볼 뿐, 당장 우리가 해결해 줄 게 없어서 칼에 베인 듯 가슴이 더 아렸다. 그러나 가을배추, 무, 쪽파, 갓을 심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날씨가 좋아서 대풍작이었다. 이렇게 척박한 땅에서도  날씨가 효자 노릇을 해주니 밤이슬만 먹고도 잘 자라준 채소들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나는 평소처럼 절임배추를 선약했는데 김장거리가 쑥쑥 자라는 거 보니 얼추 김장을 할 정도 포기 수가 돼 보여서 취소했다. 문제는 김장거리 성장 속도가 문제였다. 원래는 8월 말이나 9월 초에 씨 뿌리거나 모종을 심어야했는데 너무 늦게 심어서 성장 속도에 한계가 있었다. 여름채소는 햇볕 받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어서 빨리 컸던 것이다. 우린 그 공식을 해가 짧아진 가을에도 적용하다니 쯧쯧~~ . 계절이 바뀌고, 낮이 짧아지고, 기온도 떨어지니 배추, 무에 비상이 걸렸다. 이렇게 우린 자연의 이치를 하나 씩 순차적으로 배워갔다. 다행히 올해엔 늦게까지 날씨가 따뜻해서 안심하며 날마다 숨죽이며 일기예보를 지켜봤다. 얼기 전, 11월 중순에 김장할 계획을 세웠지만 남편은 배추밭을 둘러보면서 배추포기가 차지 않아서 기다려야만 한다고 했다. 결국 우린 12월 초를 김장 날로 정했다. 며칠 전 점심 사준다며 배추, 무를 뽑으러 갈 상일꾼 2명을 선발해 약속까지 잡아뒀다. 간절히 한 주만 더 따뜻한 날을 원했는데~~ 카~~~ 그건 인간의 욕심이었다. 그리고 겨울은 겨울답게 쨍하니 정신 못 차릴 정도의 추위가 정상인 것, 우린 자연의 순리를 다소곳이 따라야만 한다는 것을. 갑자기 날씨가 영하로 내려간다는 예보로 그동안 진심을 다해 키워온 배추, 무가 얼어 터져 버릴까봐 마음이 다급해져 혼자서 텃밭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생각지도 안했는데 농장을 둘러보러 나온 내 또래 관리인의 도움으로 남은 농작물을 모두 수확했다. 하필 그 날은 도와줄 사람이 내 주변에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동안 나 바쁘다며 연락도 안한 친구들에게 생뚱맞게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유튜브로 배추 절이는 방법 찾아 절이고 양념준비에 들어갔다. 쉽게 사서 쓸 수 있는 양념거리가 지천인데 모두 텃밭에서 키운 야채라서 다듬고 준비하는 게 더 힘들었다. 알토란 같이 자라준 야채를 버리자니 죄짓는 것 같고 주말마다 우리 부부가 1순위로 쫓아다녔던 텃밭 채소들이 눈물 나도록 애틋하고 고마웠지만 나에게 짐이 되어 버렸다니~~. 그 중에서 쪽파 다듬기가 제일 버거웠다. 더한 것은 그 다음 날은 1박2일 모임 날짜가 잡혀있어서 모든 걸 하루 만에 끝내야만 하는 절박한 순간이었다. 남편도 1년에 한 번하는 저녁 모임이라 도와줄 사람이 없었고 많은 걸 도와주는 생활지도사 친구도 마침 그날 김장을 하고 있었다.


  이번 김장이야말로 오롯이 우리가 직접 씨 뿌리고, 모종 심고, 물주고, 비료 주고, 수확한 농작물로 만들게 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손과 마음으로 자연의 혜택을 흠뻑 받으며 일궈낸 수확물이라서 더 애착이 갔다. 한 번도 직접 해본 적 없던 배추절임까지 모든 것을 나 혼자 끝냈다는 사실에 순간 나도 너무 놀랐다. 시작이 반이라고 난 힘들어서 중간 중간 허리 찜질까지 하며 밤 10시쯤 대략 끝내고 뻗어버렸다. 날씨깡패한테 된통 당한 것이다.  날씨, 기후, 세상사가 인간이 편한 시간에 하려는 계획을 호락호락하게 봐주지 않을 때가 많다.

 

날씨는 인간의 계획쯤이야 훌러덩 뒤집어 엎어버릴 엄청난 위력을 가진 깡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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