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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 없는 자신감에서 출발

(할머니와 6살 손자가 하늘 음악회에 출연하다)

by 진향림 최윤순

나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한다.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음주 가무에 능했고 고대 그리스 제단에서도 음주 가무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노래를 부르면 흥이 나고 못 추는 춤이지만 몸이 멜로디를 탄다는 것이 흥미롭다. 언젠가 딸들과 쇼핑 중에 AQUA의 <BARBIE GIRL>이라는 신나는 음악이 나왔다. 음악이 너무 신나서 갑자기 흔들어 댔더니 딸들은 엄마 이상하다며 도망쳤던 기억이 난다.

오죽하면 나의 영어 이름은 Melody다. 나름 의미를 부여해서 Melody라고 지었고 내면 어딘가에서 음악성이 샘솟는 듯한 착각 속에 살고 있다.



우리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에서는 매년 중앙 연못 앞에서 하늘 음악회를 연다. 10월 찬바람이 살살 부는 저녁 시간에 성악가도 초청하고 시민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온 주민이 자유롭고 생기발랄한 분위기 속에 빠져든다. 해변에서 자주 듣는 푸니쿨라 노래가 아파트에 울려 퍼질 때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손잡고 놀이터에서 그네, 시소, 미끄럼틀도 타고 행운권도 추첨하며 축제를 즐겼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한동안 음악회가 주춤했다. 이번에 입주자 대표회에서 오랫동안 코로나로 지친 입주민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하늘 음악회가 열린다는 현수막을 봤다. 이번 음악회의 특징은 노래 파트 1팀, 악기 파트 1팀이 입주민 자격으로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쓸데없는 호기심이 많은 나는 무엇인가 할 생각이고 마음만 먹으면 즉각 실행에 옮긴다.

그날 아침 음악파일을 보내주는 한 친구로부터 <you are my sunshine>이라는 동영상을 받았다. 몇 년 전 여고 친구들과 신나게 라인댄스 공연했던 추억이 깃든 노래였다. 노래 동영상을 들으니 원래 부드럽고 감미로운 가수의 목소리가 내 목소리와 닮은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도 부를 수 있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까지 막연히 생겼다.



수학계의 노벨상이라는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는 “근거 있는 자신감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 하지만 근거 없는 자신감은 유연성과 끈기를 길러준다고 했다.” 천부적인 재능에 수년간 다져온 내공으로 물 흐르듯 감미롭게 부른 원가수 노래를 그 순간 잊었다. 감히 그 가수를 흉내 낼 수 있다는 생각에 무모한 도전을 하다니!

다음 음악회 때는 경쟁률이 더 세져 참여가 어려워지겠다는 얄팍한 생각에 일단 신청서를 이메일로 보냈다. 신청서에 간주 부분은 큰손자가 오카리나를 불고 내가 팝송을 부를 계획이다. 그런데 아직 딸과 손자한테 확인은 못 받았다는 메시지도 남겼다. 간주 부분이 허밍으로 나와서 이 부분은 10살 손자에게 오카리나로 부르게 하면 분위기가 더 좋겠다고 기획하고 혼자 상상해 봤다. 마치 영화감독이 연출을 기획하듯이 상상만으로도 너~~무 기분이 좋아졌다. 그 후로 나는 산책할 때나 운동 갈 때 혼자 있을 때 시간과 공간이 주어지기만 하면 동영상을 열심히 보며 계속 노랫말과 음을 외우기 시작했다.




다음날 큰딸한테 나의 계획을 말했더니 큰손자가 오카리나로는 못 불고 리코더로 할 수 있겠다고 했다. 며칠 후 손자와 리코더로 맞춰보니 내 목소리는 중저음이고 리코더는 너무 높아서 음색이 맞지 않았다. 10살 손자는 부끄러워서 안 하겠다고 해 결국 나 혼자하기로 했다.


신청자 오디션에 오케스트라 단장, 관리소장, 몇몇 젊은 입주자 대표들이 참석했다. 그들 앞에서 동영상을 틀고 자신감 있고 크게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내 큰 목청에 깜짝 놀라더니 목소리를 어떻게 관리했냐며 반가워하셨다. 즉석에서 딸과 문자로 확인하여 손자가 못한다고 입주자 대표께 알렸다. 그들은 흥미를 보이며 손자는 그냥 손만 잡고 립싱크만 해라. 그래도 그림이 좋을 것 같다고 손자랑 함께하기를 여러 번 권유했다.


우리 손자들 영어 실력은 이 할머니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노래 파트는 22살 유튜버로 노래 부르는 아가씨와 환갑 넘은 할머니와 손자 팀이 참여하기로 했다. 궁리 끝에 10살 손자가 아니라 6살 손자를 섭외하기로 마음먹었다. 유행하는 포켓몬 카드 5만 원짜리를 선물해서 약속을 받았다. 우린 따로 또 같이 차 속에서 모임 때 만나기만 하면 노래 연습을 해서 3살 손녀까지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점점 공연 날이 다가오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특히 노래를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추어 부르라고 하니 점점 자신감이 없어졌다. 이런 고민을 작은딸에게 말하니 지금이라도 당장 취소하라고 난리다.


그런데 남편은 은근히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것도 약속인데 그냥 포기하고 취소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연습한 동영상 파일대로 노래 부르고 싶다고 오케스트라 단장님께 전했다. 새로 편곡해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다며 단장님은 난색을 표했다. 나는 시창도 못 하고 박치에 음치 오로지 목청만 조금 괜찮은 듯해서 신청하긴 했는데……. 연습하면 할수록 아는 동네 주민들 앞에서 망신살 떨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오케스트라 단원은 정확한 악보를 주었을 때 연주가 가능하다. 악보 따로 내 노래 따로 손자 노래 따로 모두가 따로 노는데 한심하고 불안했다. 오케스트라 단장님께 반주를 맞춰보고 싶다고 카톡을 보냈다. 공연 당일 오전에 00 시민회관 리허설 룸으로 오라고 하셨다. 두 번 맞춰보고 어정쩡한 상태로 끝냈다. 자기들 연주곡 연습하는 시간도 부족해서 난리였다. 이것은 아닌데 난감해하며 오후 현장 리허설에서 6살 손자와 한 번 더 맞춰보기로 했다. 현장 리허설 직전에 이 노래 mr을 찾았고 그 파일에 맞춰 부르기로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합의했다.


진짜 음악회가 시작되었고 오프닝 순서에 할머니와 손자 팀으로 무대에 섰다. 날씨도 적당히 선선했고 분위기도 좋았고 관객들이 집중을 잘해 주셔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동안 세 가족 11명 7개월 된 아기까지 코로나에 걸려서 자유롭게 만나지 못했다. 가까이 있지만 쉽고 편하게 만나지 못하는 코로나 시국이었는데 처음으로 온 가족이 모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번 음악회는 백숙에 피자 아이스크림케이크까지 준비되어 진정으로 오랜만에 우리 집의 이벤트가 되었다. 큰사위는 장모님은 이벤트의 여왕이라며 놀리는데 재밌고 웃음이 났다. 딸과 사위는 엄마가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서 노래 부른 등단 기념이라며 케이크에 촛불까지 켜고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에서 출발했던 손자와 함께한 음악회 출연은 그 당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개인적으로 옴츠러들었던 분위기를 엎 시켜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온 가족이 뭉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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