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름밤 달래기

(시를 담고 잠 못 드는 한여름 밤에)

by 진향림 최윤순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밤 12시, 온도계는 28도를 가리킨다.

말복도 지나고, 입추도 지나고, 처서까지 지났으니 가을이어야 하는데

무더위는 좀처럼 떠나가려 마음조차 먹지 않는다.

늦더위까지 몰고 와 억세게 대가리를 들이미니 당해낼 재간이 없다.


지구가 뜨거워서 그렇다.

무턱대고 틀어 놓은 선풍기에서 바람 같지 않은 바람이 불어온다.

하루 종일 돌린 선풍기 모터의 열기까지 더해져 뜨겁기만 한 바람


베란다로 나간 남편은 바람의 방향을 손가락으로 헤아리며

양동이에 물을 가득 채운다.

물을 타고 들어오는 선풍기 바람

그 바람도 결국 창틀을 넘지 못하니 시원찮다.


의자를 당겨 선풍기를 번쩍 들어 올린다.

바람의 방향과 세기가 배가 된다.

바깥바람까지 동원하니 추위까지 느껴진다.

열대야에 감기라도 들까 봐 슬그머니 이불을 덮어준다.


어릴 적 한낱 더위에 지쳐 대청마루에 벌러덩

한잠 자고 나면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는 더위

에어컨은 냉기가 도망가지 않도록 문을 꼭꼭 닫아야 한다.


열대야를 이겨내고 물과 바람, 자연을 이용할 땐 문을 열어야 시원하다.

끝까지 건강을 지키고, 에너지도 지키고, 지구를 지키며

열대야를 이겨내기 위해선 자연을 살살 달래는 지혜가 필요하다.




2023년 여름휴가를 막 끝내고 8월 초부터 10주간의 인문학 수업을 듣게 되었다.

문체부 주관으로 광명시 00 도서관 <독서 클리닉: 자아를 찾아가는 문학의 숲>이란 강좌였다.

강사님은 숙명여대에서 현대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김 00 교수님이었다.

여러 편의 시와 소설을 읽고 감상하며 시인과 작가에 대해 알아갔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시와 소설을 대하니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배웠던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시와 소설, 문학 작품은

시대적 배경을 담을 수밖에 없다. 작품에 대한 시대적 배경과 작가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배워 갈수록

재미가 있었다. 여러 편의 시를 읽고 감상하며 새로운 분야인 시를 써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그때 202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님의 <소년이 온다>라는 책을 읽고 합평도 했었다. 광주시에 은밀하게 돌아다녔던 5.18 사건에 대한 사진첩은 <소년이 온다>라는 소설을 쓰게 된 동기였다고 한다. 그 작가님이 아시아 여성 최초로 202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한국인의 자긍심이 되었다. 그때 그 수업을 함께 받았던 글동무와 강사님 생각이 더 간절하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올해가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작년 여름도 열대야로 잠 못 드는 여러 밤을 보냈다. 우리 부부는 에어컨이 직접 쏟아내는 냉기를 죽도록 싫어한다. 에어컨은 일 년에 서너 번 한여름 손님 접대용으로 모셔두고 사는 편이다. 냉기를 가두기 위해 에어컨을 틀면 집안의 모든 문을 닫아야 한다. 꼭꼭 닫힌 곳에 있을 땐 폐쇄공포증에 걸린 사람처럼 어리둥절하고 가슴이 답답하다. 문을 열어야만 가슴이 탁 트이고 마음까지 시원하다.




그날 밤도 열대야로 쉽게 잠이 들지 않아 뒤척이고 있었다. 수업 시간에 들었던 시가 자꾸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눈을 감았지만 생각들이 벌레처럼 스멀스멀 기어 다녔다. ‘시를 담고 잠 못 드는

한여름 밤에’라고, 막연히 떠오른 문장이 디지털 화면처럼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이런 것이 시적 언어인가?

시를 상상하며 무엇인가 쓰고 싶은 건가?’

떠오르는 시상을 품고 그냥 잠을 청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품었던 시상이 사라지기 전에 안전하게 적어두어야만 잠이 들 것 같았다.


옆지기는 수동적인 삶보다는 주어진 상황에서 조금 더 나은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다.

그는 열대야로 잠 못 든 한밤중에 양동이에 물을 가득 채운다. 물을 타고 들어오는 선풍기 바람이

냉기를 만들어 낸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듯이 쓰면 되겠구나! 그가 했던 상황을 시로 쓰면 될 것 같았다.

밤 12시에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너무 더워 온도계를 보니 28도를 가리켰다.

그 숫자를 상상만 해도 갑자기 숨이 멈출 듯했다.


열심히 선풍기를 돌려 마음속에 품었던 시상을 옮기니 그제야 잠이 몰려왔다.

나에게 생소했던 분야에 창작 의욕이 생기니 기분이 묘하고 흥분되었다. 이렇게 창작활동은

사람을 어딘가 새로운 문으로 안내한다. 그날도 이렇게 행복하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여름밤을

달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정읍 문화재에서 우리 가족의 특별한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