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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림이 언니 최윤순 Aug 13. 2023

정읍 문화재에서 우리 가족의 특별한 추억



  요즘 손주들이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노래를 신나게 부른다. 5절까지 긴 가사를 거의 다 외웠다. 할머니를 보자마자“할머니? 지눌 국사 조계종에서 사람 이름은 뭘까요?”, “신사임당 오죽헌에서 사람 이름은 뭐예요?” 식은 죽 먹기였다. 대답을 척척 하니 조금 더 어려운 문제를 내겠단다. 할머니? 그럼“녹두장군 이름은?” 눈웃음을 살살치며 뜸을 들이니 손주들은 떼창을 한다. "녹두장군  ~~전봉준!”할머니가 아는지, 모르는지 퀴즈를 내는데 웃음이 났다. 내 고향은 정읍이다. 모를 리 없다. 

  우연히 무성서원과 정읍시가 공동 주최하는 글 공모전을 알게 되었다. 정읍에 있는 유·무형 문화재에 관한 글이 필수였다. 그동안 가까이 있는 귀한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하고 관심 두지 못했던 점이 부끄러웠다. 남편의 고향은 정읍시 덕천면이다. 시댁에 갈 때마다 전봉준 기념관과 황토현 전적비 앞을 지나친다. 그리고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 가요‘정읍사’의 가치를 계승하기 위해 조성한 정읍사 공원을 자주 들른다. 정읍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무성서원도 있다. 

 

1. 정읍 황토현 전적지에서 눈썰매를 타다


  두 집안 부모님이 살아계실 적엔 한 달에 한 번 이상 시골에 갔다. 명절, 부모님 생신날, 어버이날, 휴가철, 친척 집 결혼식, 장례식 등. 길에 뿌린 교통비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정읍(井邑)은 한자에도 드러나듯이 물이 많은 곳이다. 자연히 장마도 잦고 특히 눈이 많이 온다. 설 명절 좁은 시골길은 분분히 날리는 싸락눈으로 살포시 덮여 있었다. 남편이 익숙지 않은 시골길을 운전할 때는 미끄러질까 봐 우리는 숨도 크게 못 쉬고 살얼음판을 걷듯 초긴장했다. 그러나 부모님과 형제자매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과 기대감으로 10시간 이상 걸리는 귀성길을 빠지지 않고 다녔다. 

  우리 두 딸, 조카들은 설 명절을 꼬박꼬박 기다렸다. 눈이 많이 오는 설 명절엔 유명 눈썰매장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숨겨둔 비밀 장소가 있었다. 그곳의 슬로프는 굉장히 길었고, 두세 번 바운스로 몸이 거의 튕길 듯 스릴이 있었다. 참신한 아이디어가 많은 우리 남편은 자동차에 딸과 조카들을 가득 싣고 고향 집에서 가까운 황토현 전적지로 향했다. 아이들은 각자 손에 할아버지 집에 널려있는 비닐 포대 하나씩 들고 호기롭게 눈썰매를 타러 갔다. 명절 음식 준비로 특별히 여행이나 놀이동산에 가지 못했지만, 그것은 우리 가족 이벤트 중 하나였다.




  아이들이 크니 그렇게 유쾌하고 깔깔거리며 웃고 즐겼던 눈썰매 타는 재미는 한순간에 그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젊음의 패기는 어딘가로 사라지고 그렇게 재미났던 이벤트도 시들해졌다. 얼마 후면 시집갈 조카딸이 자기 집에 있는 스키복 서너 벌을 챙겨와 곧바로 눈썰매장으로 향했다. 그녀는 어릴 때 추억을 되새기며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정말 신나게 탔다. 상당히 길고 경사진 슬로프에 군데군데 푹푹 파인 곳에 튕겨 조카딸의 엉덩이는 파랗게 멍이 들었다. 그날 밤 우리는 조카딸이 밤새워 끙끙 앓는 소리를 들었다. 큰딸도 사촌 언니 따라 덩달아 실컷 타고 진흙투성이가 되어 흥분되어 돌아왔다. 우리 남편은 조카들 어릴 땐 항상 조기 새끼 엮듯이 엮어서 눈썰매장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설 명절에 아이들에게 시원하고 깨끗한 공기를 실컷 맛보게 하고 싶어 눈썰매 타는 이벤트를 진행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문화재에 대한 이해와 보호 의식이 부족했던 시절이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고, 말도 안 되는 커다란 과오를 범해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2. 정읍사 문화 공원 달님 약수터에서 물을 긷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대를 디디욜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정읍사 음악(音樂) 가사는 망부가(望夫歌)의 한 유형이다. 정읍의 한 행상인이 행상하러 나갔다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다. 아내는 망부석에 올라가 남편이 돌아올 길을 바라보며 혹시 밤길을 가다가 남편이 해를 입지는 않을까? 다른 여자에게 정을 두어 자기의 인생이 어두운 생활로 접어들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며 부른 노래라고 한다. 우리는 그런 멋과 풍류가 있는 정읍사 문화공원을 시골 갈 때마다 들르곤 했다. 시골에 머무는 동안 며칠간 마실 물을 길으러 정읍사 공원에 있는 달님 약수터에 갔다. 그것도 음식 준비로 바쁜 틈에 가야만 했다. 이렇게 소중한 문화재를 그때는 아무런 생각 없이 눈썰매도 타고, 약수만 길으러 다녔다. 

  작년 우리 부부는 두 딸이 결혼하고 휴가철이 되었는데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우리는 말없이 시골집을 향하고 있었다. 형님은 전주에 사셔서 시골집은 항상 비어있다. 누구라도 쉬었다 갈 수 있는 공간을 형님 부부가 내어주셨다. 심지어 형님한테 간다는 말도 없이 한밤중에 조용히 들어가 피곤한 하루를 마무리했다. 새벽잠이 없는 나는 일찍 일어나 호박잎도 따고 풋고추, 가지를 따서 아침상을 준비했다. 아주 건강한 밥상과 한가한 여유를 즐길 수 있어 감사했다.



  결혼 후 40여 년 동안 고향 집을 수백 번 왔지만 우리는 항상 시간에 쫓겨 다녔다. 다시 약수를 받으러 간 정읍사 문화 공원에는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된 백제의 여인상, 정읍사 노래비, 사랑의 계단 등 스토리가 있는 문화공간이었다는 것을 그때야 알았다. 정읍시에서 주민들의 여가생활을 위해 만든 녹색 쉼터, 트리하우스, 흔들 다리가 그때야 자세히 보였다. 조용하고 각종 꽃길로 아기자기하게 구성된 둘레 길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 부부는 처음으로 정읍사 가사를 음미하며 한가히 산책로를 걸었다. 달이여 높이 돋으시어 멀리멀리 비추어 주소서현대 가요 가사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참 아름다운 가사였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전봉준 장군의 고택 팻말이 보였다. 8월 초, 그 고택도 주변도 조용했고 빨갛게 불타오르는 더위만 덩그러니 마루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설 명절마다 우리 아이들이 신나게 눈썰매를 탔던 황토현 전적비도 들렀다. 그때 동학 농민군이 관군을 상대로 승리한 황토현 전적비를 찬찬히 훑어보고 음미하게 되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이념으로 우리 역사의 근·현대사의 큰 획을 그어준 동학농민 운동이 내 고향 고부에서 봉기 되었다니! 정읍시의 의뢰로 설치 미술가, 임영선 교수가 1년간 600명 시민 얼굴을 채워 넣어 행렬 人자 모양으로 된 조각상이 인상적이었다. 수평적 구도의 청동 군상은 인간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동학의 이념을 상징하는 듯했다. 그런 역동적인 군상 앞에선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래서 나도 두 주먹 불끈 쥐고 동학농민군 대열에 끼어 힘차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노래를 부르고 나니 기분이 묘해졌다. ‘그때 동학군이 승리했다면 백성들의 삶이 더 평화롭고 안정되었을까?’생각해 봤다. 



  그런데 2023년 5월 우리나라의 두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는 뉴스를 봤다. 외세의 침략과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지도층의 폭정에 항거한 동학농민운동의 기록물과 4·19 혁명의 기록물이었다.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일어났던 민중 봉기 사건들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자주독립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두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로 문화 선진국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다. 즉 정읍의 문화재인 동학 농민 운동의 기록물이 세계로부터 인정받은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라는 큰 사건이 나의 고향 정읍의 문화재라서 더 자부심이 생기고 감격스러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순간도 누군가의 희생과 실천의 대가로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한다. 나의 유년 시절과 젊은 시절을 보냈던 내 고향 정읍. 그때 화려하고 풍족한 시절은 아니었지만, 현재 나의 모든 삶의 근원지가 되어준 정읍. 한순간도 잊을 수 없고, 놓치고 싶지 않은 고향의 향기를 품고 살 수 있어 감사한다. 

  고향이 있으니 내가 있고고향은 내 마음의 큰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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