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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림이 언니 최윤순 Sep 11. 2023

다 사정이 있겠지!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다. 아버지에게는 아버지의 사정이, 나에게는 나의 사정이, 

작은아버지에게는 작은아버지의 사정이, 어떤 사정은 자신밖에는 알지 못하고, 

또 어떤 사정은 자기 자신조차 알지 못한다.” (정지아 작가님의 나의 아버지 해방일지 중에서)


 아침 6시쯤 목욕탕에 가는 길이었다. 한 중년여성이 아이스커피를 다 마시고 얼음을 타닥타닥 씹으며 내 앞을 쓱 지나간다. 무슨 사정이 있기에 아침부터 얼음을 씹을까?

옛날 선조들은 비록 치아가 오복은 아니지만 건강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여겼다. 이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모르고 얼음을 질겅질겅 씹는 건 아니겠지. 

원래 열이 많으신가?

아니면 저녁 내내 일하시고 퇴근길에 지쳐 정신 차리려고 그렇게 얼음을 씹으시나?

아니면 출근길일까?

우리 남편 말대로 나는 또 혼자 소설을 쓰고 있었다.


  길 건너편 약국에 불이 훤하니 켜있다.

설마 약사님이 이렇게 이른 시간에 출근하신 것은 아니겠지? 

궁금했지만 내 갈 길이 바빠서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목욕탕 카운터에서 표를 사려는데 멈칫거렸다.

나이는 들어 보이는데 너무 곱고 예쁘게 화장도 하셨다. 70은 족히 넘어 보이는 여자분이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단잠에 빠지셨다.

게다가 나도 입어본 적 드문 예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주무신다.

미안했지만 깨실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인기척을 하고 카드를 내밀었다.

보통 땐 아들처럼 보이는 남자분이 카운터에 있는데 무슨 사정이 있겠지. 


  정여울 작가는 스토리텔링의 기법은 궁금증이라고 했다. 목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약국 문을 열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정말 문이 열리면 뭘 살까? 

박카스 한 박스를 달라고 할까?

아니면 흔한 후시딘 연고를 달라고 할까?’ 고민하며 문을 열었다.

문이 닫혀있었다. 다행이었다.

광고하기 위해 저녁내 켜놓은 전등을 보고 나 혼자 놀란 것이다.

내가 이렇게 동네 약사님을 걱정하는 데는 근거가 있다.


  코로나가 한창이고 학교나 유치원에서 날마다 코로나 진단 키트를 나누어 주었던 시절이 있었다. 아침마다 겁에 질린 아이들 붙잡고 코를 찔러 그 결과를 보고 등원을 시킬지 말지를 판단해야 했던 긴박한 때가 있었다.

나는 극도로 조심하며 살얼음판을 걷듯 행동하는데 어느 늦은 저녁 내 몸에 이상 기운이 있는 듯 느껴졌다. 10시가 넘어서 전화로 가까이 사는 두 명 친구에게 진단 키트가 있는지 물어봤으나 없단다. 더 이상 물어볼 곳도 없는데 그냥 자자니 불안해서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외투를 걸치고 무조건 뛰쳐나갔다. 약국을 찾는데 내가 다니는 곳은 이미 문이 닫혔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는데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약국의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구세주를 만난 듯 어찌나 반가웠던지!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약국 문을 열었다. “코로나 진단 키트 있어요?” 묻고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파리한 얼굴로 거의 쓰러질 듯 보이는 약사님이 계셨다.

그때는 그렇게 늦게까지 문을 열어주신 약사님이 정말 고마웠다.

그런데 그 약국이었다. ‘밤늦게까지 일하시던데 이렇게 이른 아침에도 문을 여시는 거야?’ 하는 생각이 미치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코로나 진단 테스트기가 음성으로 나와서 잠을 푹 잤다.


  그 당시 나는 큰딸의 세 남매를 돌보고 있었기 때문에 공적인 일을 하는 상황이나 비슷했다. 나로 인해 딸과 사위, 세 남매 손주가 코로나에 걸리면 연쇄적으로 파장이 일 것이다.  절대로 코로나에 걸리면 안 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나의 몸 상태가 이렇게 중요하구나!’ 처음으로 생각했다.

함부로 아플 수도, 아파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손주들을 돌보기 때문에 마찬가지 상황이다. 함부로 아프지 않도록 몸 관리, 정신 관리를 잘해야 하는 의무감이 있다.


  누군가도 나를 보며 머리는 산발하고, 이른 아침부터 부스스한 얼굴로 어디를 가는 걸까?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겠지. 나도 남들처럼 아침 먹고 느긋하게 커피도 한 잔 마신 후 편안한 시간대에 대중목욕탕에 가고 싶다. 그렇지만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가 없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내가 좋아하는 대중목욕탕에 가야만 하는 나 나름의 사정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운동도 매일 완수해야 하고, 그곳에서 동생들과 수다도 떨어야 한다.

좋아하는 강연이나 수업에 참여도 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손주 돌보미 하러 전투복 입고 딸 집에 가야 한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극성맞은 인간 부류다.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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