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통사관

들어가며, 프롤로그

by 현진석

들어가며

한민족의 20세기를 돌아보면 참으로 굴욕스러웠고 피 흘린 세월이었다. 세기초에는 아시아 제국주의의 최강자인 일본제국에 의해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강제병합 당하는 수모를 당하여, 나라 잃은 백성은 만주로, 중국대륙으로, 러시아땅으로 흩어져 또다시 본토 원주민들에게 학살 당하는 한 많은 역사였다.

해방 이후에는 미국과 소련, 중국이라는 거대 외세들의 국제전략에 스스로 뛰어들어, 남과 북 모두 무력통일을 하겠다는 무모한 불놀이를 감행하여 금수강산이 폐허가 되고 말았으니 비참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물질적 역사의 거대한 파괴성은 정신적 분야에서도 한 세기 동안 민족의 정신세계를 황폐하게 하였으니, 식민사관. 종북사관. 뉴라이트사관이 그 주역들이다.

아직도 식민사관은 우리들의 의식에 깊이 남아 있어, 일본에 뒤쳐진 것은 고작 100년 정도인데 5천년 역사를 보잘 것 없는 퇴행의 역사로 비관하는 실정이며, 종북사관은 폐허에서 불굴의 투혼으로 기적으로 만들어낸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려 하고, 뉴라이트사관은 비상식적인 식민지근대화론과 독재찬양으로 흘러가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에 탄생의 때에는 미운 오리새끼였으나 한 세기를 지나, 눈을 씻고 다시 보니 그것은 찬란한 백조의 역사였고, 위대한 비상이었음을 ‘대한민국 정통사관’이란 이름으로 밝히고자 한다.

‘사필소세(史筆昭世), 역사가의 붓으로 세상을 밝힌다!’


Prologue


시대의 초상


(버마의 아웅산묘지에서 순국한 김재익경제수석 가족의 역사가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상징이라고 할 수 있어, 여기에서 간략하게 소개하려 한다.)

김재익.여사.jpg

김재익은 1938년 11월 26일, 충청남도 연기군 소정리에서 안동 김씨 김응묵과 진주 강씨 강병주의 6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대지주는 아니었지만 상당한 땅을 가진 부농이었다.

일본 도쿄유학의 경험이 있던 부친은 교육열이 남달라, 딸들도 모두 서울의 여학교로 유학을 보냈으며, 보다 안정적인 교육을 위하여 서울 효자동에 집을 장만하여 어머니 강씨가 머물면서 아이들을 보살폈다.

6.25전쟁이 터져 김재익과 누나들은 어머니와 헤어져 남쪽으로 피난을 내려왔고, 어린 김재익이 누나들을 굶기지 않으려고 대구에 주둔해 있던 미군부대의 허드렛일을 하는 하우스 보이(house boy)가 되어 고기와 과일통조림 등을 구해와서 겨우 배고픔을 면했다.

전쟁의 비극은 이들 가족도 피할 수 없어, 아버지 김응묵은 읍내의 공산청년단에게 악질 지주로 몰려 끌려갔다가 인민군이 후퇴할 때 학살되었고 셋째, 넷째, 다섯째 장성한 아들들은 북한 의용군으로 끌려가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잃어버린 아들들은 어머니 강병주에게 평생의 한이 되었다.

휴전 이후 서울 삼청동 큰형 집에서 식구들이 모여 살게 되었으나, 전쟁의 여파로 생계가 막막해져 고등학생이 된 김재익도 신문배달, 가정교사 등 여러가지 일을 하면서 학업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하여 외교학을 전공하였고, 한국은행 공채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그 당시 한국의 유일한 경제연구기관인 조사부 금융재정과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장래의 경제정책가로서의 첫발을 내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었던 그는 1966년 하와이 주립대학 동서문화센터에서 생활비를 포함한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석사학위를 받는 과정에서 뛰어난 역량을 인정받아 미국 본토의 스탠퍼드대학에 추천되어 73년까지 공부하면서 통계학석사와 경제학박사를 취득하였다.

그리고 한국은행에 복직한 이후 대통령 비서실에 파견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경제학에 정통한 이론가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남덕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의 부름으로 비서실장을 맡게되고 6개월 후에는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관으로 임명되어 본격적인 경제관료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의 첫 작품은 부가가치세 도입으로, 그의 특유의 온화한 전술인 설득작업으로 73년부터 관료들에게 한명씩 브리핑을 전개하여 마침내 77년에 미국과 일본 보다 빠르게 한국에 도입되어 선진적인 조세제도가 정착하게 되었다.

시대의 격랑은 김재익도 피할 수 없어 10.26과 80년 신군부의 등장으로 위기감을 느낀 그는 사표를 제출했지만, 탁월한 그의 능력을 그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놓아주지 않았다. 냉혹한 독재자 전두환은 그의 경제브리핑과 소신에 감탄하여 유명한 일화가 된 ‘여러 말 할 것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는 말을 탄생시키며 그의 정책에 강력한 힘을 실어주게 된다.

70년도에 계속되었던 성장위주의 경제정책에 반하는, 안정적 성장과 인플레이션억제의 정책기조는 기존의 관료들과 기업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왔지만 역설적으로 강력한 독재자의 힘을 빌려 80년도 초반의 물가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선거를 앞둔 여당, 농민, 근로자들의 강한 반발에도 추곡수매가 10%대 인하, 임금인상 억제로 연간 수십%로 상승하던 물가를 안정시켜 한국경제의 80~90년대 쾌속질주의 주춧돌을 단단히 놓았다.


금융실명제 도입을 추진하고 수입개방화를 추진하던 와중에 운명의 83년이 되었고, 전두환대통령의 해외순방에 동행하게된 김재익은 그해 7월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로 임명된 서울대학교 동기인 서석준과 함께 10월 9일 미얀마(그 당시 버마)에서 17명의 각료와 수행원들에게 가해진 북한의 끔직한 테러에 희생되어 순국하였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자랑스럽던 막내아들을 비명에 잃은 모친 강병주여사는 충격으로 46일만에 피를 토하며 세상을 떠나 아들 곁으로 갔다.

부인 이순자교수는 2010년 남편의 유지에 따라 전 재산 20억원을 서울대학교에 기부하여 장학기금인 ‘김재익 펠로우십’을 발족하였다. 아래의 글은 2010년 11월 발족식에서의 이순자여사 연설문이다.


한국전쟁 후 지독히도 가난했던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배움에 대한 열망을 채워준 것이 선진국의 여러 가지 장학금이었다. 김재익도 하와이대학의 동서문화센터의 지원으로 유학을 시작하여 스탠퍼드 대학에서는 포드대학 장학금으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전액을 지원받았다. 이러한 장학금 지원은 학생 개인의 일생을 바꾸는 것은 물론 그 학생 나라의 장래를 바꾸는 힘이 되었다.

(중략)

그의 신념을 담아 발족되는 이 장학금이 반세기 전 그가 젊은 시절 받았던 값진 혜택처럼 개발도상에서 노력하는 젊은이들에게 배움의 목마름을 채워주고 자신의 나라를 좀 더 나은 나라로 만들고 싶어하는 애국심을 격려할 수 있다면 그의 착한 영혼이 크게 기뻐할 것이다. 우리 가족의 이 소박한 시작이 개방경제와 민주주의의 씨앗으로 넖은 세상에 전파되기를 희망하는 많은 사람들의 동참이 있다면 더욱 더 값진 일일 것이다.

앞으로 20~30년이 지난 훗날, 젊은 시절에 ‘김재익 장학금’으로 대한민국에서 공부한 각 나라의 고위직 공직자들이 국제 무대에서 대한민국의 공직자들과 친구로, 동문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의 우정 어린 협력으로 복잡한 국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 될 것인가. 이 장학금이 개발도상국의 젊은이들과 그들의 나라에 희망찬 미래에 대한 약속이 되기를 정성 모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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