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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석 Sep 07. 2022

대한정통론- 제10장 진혼가, 늦게 흘린 피

대한민국 정통사관 

                   제10장  진혼가, 늦게 흘린 피 


 열렬한 공산주의자이며 민족주의자였던 이종문은 북한 최고인민위원회의 상임위원회가 1950년 7월 1일 ‘전시동원령’을 선포하자, 서울에서 자발적으로 서울학생의용군으로 입대했다. 다음은 노획된 그의 일기이다.


 단기 4283년 7월 4일. 28일 서울해방이라는 위대한 인민군의 대덕을 입고 감격과 의열에 불타 서울학생의용군에 참가하다. 

 단기 4283년 7월 5일. 작일(昨日)은 시민위원회에서 밤을 지새우고 今日 의용군 양성(교육) 후 전 Brown 소장이 있던 집으로 파견되었다.   


 서기(西紀)가 아니라 단기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주목되며, 미소공동위원회 미국대표였던 브라운소장의 집으로 파견되었다가, 이종문은 불과 나흘의 훈련을 받고 의용군 서울여단 제5대대 1중대 2소대 2분대에 배치되어 마침내 7월 11일 전선을 향해 행군을 시작했다. 

7월 11일 밤 군포를 출발했으나 공습을 받아 야간 행군으로 12일 새벽 5시 수원에 도착했다. 그의 일기에는 ‘원수를 찾아간다’는 적개심이 불타고 있다. 


 전진, 전진. 전지(戰地)는 아직도 멀었다… 촌락, 고향과 같은 촌락. 문득 부모 형제 생각… 고향 평택은 쑥밭이 되었다고…. 그놈들, 그 원수를. 이미 나는 인민과 나라를 위해 헌신한 몸이다. 가자. 하루빨리.


 북한인민군 최정예였던 6사단 방호산부대를 따라가는 그의 부대는, 익산과 광주로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고 7월 25일 그는 선발대를 자원했다. 


 선발대를 자원하고 여단본부 특공대로 출발하다. 광주를 목표로 가던 도중 트럭이 고장 났다… 갈재를 넘어 광주에 도착. 광주전 참가를 목표로 왔으나 2일 전에 함락되고 말았다… 그러나 적은 하루 저녁 사이 진주로 도망갔다. 온종일 다리 공사였다… 새벽 전라도를 도하하야 하동읍에 오다. 7시부터 심한 공습으로 말미암아 목적을 달성치 못하다. 공습을 저녁까지 계속하야 하동을 파괴했다. 그러나 너희들의 최후의 발악도 막다른 골목에 닿았다. 진주도 해방. 남은 것은 대구, 부산 마산 뿐이다. 빨리 나아가자. 


 6.25전쟁을 조국해방전쟁으로 인식하고, 전쟁 전에도 좌익활동에 열심이었을 이종문의 일기는 7월 30일 미군의 무기를 수집하는 기록으로 끝나고 있는데, 아마 그의 일기장이 노획된 것으로 보아 첫번째 전투에서 희생된 것 같다. 


 강우가 사정없이 내리는 오후 6시에 시작한 무기 수집. 더럽게도 죽은 미제 놈들의 시체를 헤치고 총기 등 각종 무기 총 150조.[1]


 하동지역에 투입된 미군 제 29연대 3대대로 보이며, 하동국도의 쇠고개에서 인민군의 매복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렇게 이념과 민족주의에 충실한 수십만의 남북한 청년들과 모택동에 의해 충성심을 시험 받은 항복한 수십만의 국민군들[2], 자유를 지키기위해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 출전한 UN군 40,896명의 빛나는 청춘의 젊은이들이 한반도에서 목숨을 잃었다. 


                              피의 기록 

 북한정권은 자신들은 실질적인 정부조직을 운영하고 있었음에도, 남한에서의 단독정권 수립은 최대한 지연, 실패시켜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을 성공시키려고 하였다. 그런 목적으로 박헌영은 소위 ‘2.7구국투쟁’의 지령을 내려, 남한을 파업, 폭동, 살인 등의 대혼란으로 몰고 갔다.  

 48년 2월 7일 전평 산하의 교통운수 노조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하여, 2월 7일부터 3월 24일 사이에 전국에서 약 383건의 방화사건이 발생하였고, 이 중 적어도 308건이 저명인사들의 가옥에 대한 방화였다. 그밖에 관공서 파괴행위 22건, 도로 및 교량 파괴 50건, 선거시설 파괴가 41건, 71대의 기관차엔진 파괴 및 손상, 전화선이 563회 절단되었다. 인명피해는 공무원 145명, 민간인 150명, 폭도 330명이 사망했고, 그 외에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다.[3]

 2.7투쟁의 연장으로 남로당은 제주도위원회에 ‘폭동을 일으켜 단선.단정을 강력히 반대하라’는 지령을 내렸고, 경찰이 노획한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 의하면 제주지부는 당 상임위원회를 열어 13대 7로 무장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으며, 남로당의 제주도투쟁 격려문에 대한 답신에는 그들의 투쟁목표가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다.[4]


 ‘… 우리들은 “조국해방 투쟁사상에 불멸의 금자탑”을 이루는 영예를 관철할 것을 지표로 하여 망국멸족의 단선 분쇄의 가열찬 초소를 죽음으로 지킬 것이며, 통일독립을 우리의 손으로 전취할 때까지 과감히 투쟁할 것을 확언하고 맹세합니다.

 1.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만세!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이 자료를 통해 우리는 4.3사건의 시작이 제주도 남로당원들의 대한민국 반대와 북조선공화국 수호라는 목적에 의한 잔인한 폭동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또한, 제주도 남로당 세포였던 김생민(金生玟)씨의 증언은, 4.3사건의 출발점이었던 47년 3.1절 기념집회에서의 유혈사건도 남로당의 계략이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어 같은 해 3월 1일, 소위 3.1사건을 일으켰다. 이들은 이날 조천면 사람은 제주읍의 동문으로, 애월 쪽 사람은 서문으로, 제주읍 사람은 남문으로 들이닥쳐, 제주읍 전체를 덮도록 했다. 이날 시위는 주둔 미군에 대해 위력을 과시하고 반미 투쟁을 시험해본 것이라 했다.

 이런 사건은 모두 제주도 남로당이 단독으로 한 것이 아니라, ‘박헌영의 지령에 의하여  전남도당의 조직자가 내려와 지휘했다’고 그는 주장했다. 

 3.1사건 때 그들은 경찰을 고립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미리 준비했던 끄트머리를 날카롭게 깍은 대막대기로 기마대 부대장 임영관이 탄 말의 엉덩이를 찌르게 했다고 한다. 말이 날뛰면 군중이 다칠 것을 미리 계산한 행위였다. 이 사건은 계산대로 들어 맞았다. 경찰이 발포, 6명이 죽고, 10여명의 부상자를 낸 것이다. 

(당시 경찰관이었던 문창송 씨등은 사망자가 2명이었다고 했다.)

                        오성찬 채록.정리, <한라의 통곡소리>, 194쪽 


 한편, 4.3사건이 그토록 많은 희생자를 낸 것은 섬이라는 배타적인 환경과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는 좁은 지역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고, 3.1 유혈사건 이후의 각종 시위와 파업을 해결하기위해 새롭게 제주도지사로 임명된 전북 출신 유해진의 극우적인 행동이 도민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넬슨 미군정 특별감찰관은 <특별감찰 보고서>를 통해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유지사의 교체를 건의했으나, 딘 군정장관은 그를 그대로 유임시켰다. 

 ‘그는 도정 업무를 적절히 수행하는 데 있어서 반복적으로 무능함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무모하고 독재적인 방법으로 정치 이념을 통제하려는 쓸데없는 시도를 해왔습니다. 그는 좌파를 지하로 몰고 갔으며 그곳에서 좌익활동은 더욱 위험스럽게 변모했습니다. 또한 테러 행위를 수 없이 자행했습니다. 경찰 최고위직은 모두 육지에서 모집된 경찰관들로 채워졌고, 많은 자리에 제주도 주민들에게 호응받지 못하는 육지 사람들을 임명했습니다.’[5]


 유지사와 함께 들어온 육지 사람들 중에는 서북청년단도 있었는데, 그 숫자가 점차 수백명으로 늘어나면서, 제주도민 28만명 중에서 남로당원이 5만명에 달한다는 사실과 함께 좌익 청장년들에 대한 폭행, 강금, 금전수수(정식 급여가 없었슴으로) 등의 여러 행패를 부려 민심이 크게 동요하였다. 

48년 4.3폭동으로 살인, 방화, 파괴가 일어나자 제주도는 ‘빨갱이섬’으로 몰려, 이승만대통령과 조병옥은 ‘지방 토색(討索)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6]으로 처리할 것을 지시하여 섬은 지옥같이 변해 버렸다. 

 제주도 한림읍 명월리는 상.중.하동을 합쳐 200호쯤의 마을이었는데, 좌익 게릴라에게 처형된 사람을 포함하여 100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김응하(金應河)씨의 증언에 따르면, 이 마을은 중산간에 위치한데다 마을 중동에 산쪽의 주동자가 있어 좌경마을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집단 처형은 48년 11월 18일(음력)에 있었는데, 마을 주변 굴에서 잡아 온 오창규(60세)씨 등 20여명을 한림리의 ‘까마귀곳’에서 처형했다. 또 하동 사람들은 이보다 일주일쯤 앞선 11월 11일에 현재의 한림 읍민회관 앞밭에서 10명을 집단 처형했다고 한다. 하동의 양중흡씨는 ‘청백을 가리지 않고 사살했던 까닭에’ 집단 처형된 사람들의 제사날에는 ‘우리 동네 명절한다’고 했었다고 한다.[7]


          

[1]김택곤, <미국 비밀문서로 읽는 한국 현대사 1945-1950>, 2021, 620~625쪽 

[2]중공군 포로중에 대만으로 돌아간 국민당 귀순자들은, 10명당 소총 하나가 배정되어 한명이 전사하면 다음 사람이 그 총을 들고 싸운 죽음으로 내몰린 소모전이었다고 증언하였다. 김신, <조국의 하늘을 날다>,2013,191쪽 

[3]김용삼, <대구 10월 폭동/제주 4.3사건/여.순 반란사건>, 2019, 119~121쪽 

[4]김용삼, 위의 책, 126~128쪽 

[5]김택곤, 위의 책, 543쪽 

[6] <국무회의록>, 49년 1월 21일 

[7]오성찬 채록.정리, <한라의 통곡소리>, 1987, 29~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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