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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석 Sep 07. 2022

대한민국 정통사관, 이 山河에 고이 잠드소서

대한정통론 제10장(2편)

 여기서 잠깐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이러한 피의 학살의 시작이 46년  남로당의 소위 신전술에 의한 매우 잔인했던 ‘10월 폭동’이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공산당은 ‘공포의 전술’을 통해 감히 그들에게 도전하지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전술이 남한에서는 오히려 좌익에 대한 강력한 탄압과 전향으로 이어져, 6.25전쟁시에 후방의 대규모 좌익폭동이 발생하지 않아 대한민국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10월 폭동의 배후주모자는 공산당 경북도위원회 대표 장적우, 경북도 인민위원회 위원장 이상훈, 동 보안부장 이재복(뒤에 중앙당 군사부장), 전평 경북평의회 위원장 윤장혁, 농민동맹 경북위원장 장하명, 대구시 인민위원장 서영로, 대구시당 위원장 송기영, 대구시인민위원회 보안대장 나윤출(羅潤出) 등이었으며, 나윤출은 씨름대회에서 황소를 300마리나 탄 대역사(大力士)로 10월 폭동 이후 월북하여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59년 체육지도위원회 씨름분과위원장과 민족체육협회 회장을 지냈다.[1]


 폭동 선동대는 대구경찰서 관내의 동촌지서 등 6개 지서와 중앙동 파출소 등 9개 파출소, 달성경찰서 관내의 현풍지서 등 8개 지서 및 대봉동파출소 등 3개 파출소를 차례로 점거한 다음 경찰 가족, 우익 인사를 닥치는대로 학살하고 주택과 가구를 파괴했다. 

 1월 2일 밤 미군 순찰대가 달성공원에서 7구의 경찰관 시체를 발견했는데, 두 명은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으나 사지가 제대로 붙어 있는 것이 없었고, 일부 경찰관은 거세를 당했다. 폭도들은 경찰의 얼굴과 신체를 칼과 도끼로 난자하여 살해했고, 손을 등 뒤로 묶고 피를 흘려 쓰러질 때까지 날카로운 돌을 던졌으며, 큰 돌을 머리에 던져 짓이기는 방법으로 살해했다… 상주에서는 10월 3일 폭도들이 경찰서를 습격하여 근무 중이던 경찰관 5명을 폭행한 후 산 채로 생매장했다. 임고면의 3만석 대지주 이인석은 악질 지주라 하여 군내에서 반동분자로 몰린 주민 20명과 함께 학살되었는데, 그의 네살 바기 손자까지 함께 참살 당했다.[2]


 악명을 떨친 서북청년회도 피가 피를 부르는 ‘피의 전쟁’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제주도 4.3의 경우에도 남한정부의 요청에 의한 출동으로인해, 제주에서 전사한 군인이 180여명, 경찰 전사자 140여명이었는데 서청은 모두 639명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3]

 소련군정과 북조선공산당의 점령군식 횡포와 정치활동 금지, 토지개혁에 따른 토지몰수 및 고향 추방은 대부분 중소 지주의 후손이었던 청년들의 강한 분노를 불러왔고, 월남한 이들은 공산당의 실체를 경험한 가장 강력한 반공단체가 되어 각종 강연회, 좌익에 점령된 기업체와 수세에 몰린 지방 우익의 요청에 따라 거침없이 출동하여 폭력을 동반한 활동으로 해방 초기 좌익 우세의 정세를 우익 우위의 정세로 돌려 놓았다. 번영한 자유대한에서 풍요를 누리는 우리들이 그들을 비난할 수는 있지만, 그들이 흘린 피의 혜택을 입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초기 4개월을 빼고 1947년 5월에서 9월까지의 5개월 사이 서청 남선파견대 사망자는 100명을 훨씬 넘었다. 서청은 테러엔 테러로 보복했다. 서청대원이 습격을 당한 곳은 그 지역 우익단체가 가르쳐주는 공산당계 조직원 집에 쳐들어가 가재도구를 부수고 매질했다. 서청대원이 죽임을 당한 곳은 공산당원도 반드시 죽이는 것으로 보복했다.

 보복은 당한 것 보다 최소 2배 이상 되갚는 것이 서청의 불문율이었다. 따라서 서청 쪽 희생자가 100명을 넘었으니 공산당계 청년들의 죽음은 최소 200명이 더 된다. 해방 정국 좌우 투쟁은 정치 투쟁이 아니라, 피를 부르며 전쟁하는 정치였다. 

                                                이영석, <건국전쟁>, 309쪽 


 소년 서청대원었던 이창복(李昌福)도 순회강연과 남선파견대의 활동을 하다가 47년 5월 8일 대덕 농민조합연맹 농부들의 장작개비에 맞아 17년의 짧은 삶을 마감했다.

 강원도 철원읍 출신인 그는 철원중학 3년 시절 항일 서클에 가담하였고, 해방 후 한민당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기차로 어딘가에 끌려가던 중에 탈출하여 월남하였다. 

 서울에서 서청에 들어간 그는 지령을 받아 38선을 넘어 이북 정세를 탐문하였으며, 지방에서 강연회를 통해 소련군정의 폭정을 고발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임일이 이끄는 남선파견대에서 활동하던 중에 유성온천에서 습격을 받아 사망하게 되었다.

 농민조합연맹 유성지부 위원장 송일성이 지휘하는 농민군, 남로당, 민주애국청년동맹(民愛靑) 행동대가 합동한 300여명이 죽창, 세모 방망이(삼릉장) 등으로 무장한 300여명에 의한 포위 공격으로 서청 남선파견대 30명 중에 20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었다.

[4]


 

                     이 山河에 고이 잠드소서 

     

 광복을 맞은 한민족이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얻은 것이 아니었슴으로, 혼란은 사실 당연한 것이었다. 더욱이 운이 없었던 것은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분단과 내전을 겪지 않았는데도, 식민지였던 조선이 지독한 폭력과 내전에 휩쓸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누구를 탓 할 수는 없다. 소련은 천만명 이상, 일본은 수백만명, 미국도 수십만명 이상이 전쟁에 희생되었는데, 일제의 군인으로 함께 전쟁에 참전한 국가가 아무 희생 없이 자유와 번영을 누리겠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 아닌가.

 조선이 망할 때도 의병전쟁은 있었지만 정규군의 전쟁은 없었고, 45년 해방 때에도 대규모 전투를 감행한 독립군은 없었다. 500명 정도의 광복군이 고작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45년 광복 이후에 흘린 수많은 피와 눈물은 뒤늦은 독립전쟁이요 건국전쟁이었다. 

 

 한편, 1952년 3월 대한민국 공보처에서 발행한  <6.25사변 피살자명부>에는 5만 9,964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우파 피해자여서 좌파까지 합치면 최소 10만명을 훨씬 넘을 것이다. 특히, 인민군에 의한 학살과 국군의 수복 이후의 학살이 겹쳤던 전라도의 경우에는 그 피해가 극심했다. 

 가장 피해가 컸던 영광군은 군민 13만 중에 좌우 모두 3만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전쟁 초기 경찰에 의한 보도연맹 학살자 200여명에 대한 인민군 점령 이후의 좌익의 복수, 인천상륙작전 이후 후퇴하지 못한 빨치산들에 의한 학살 등이 그 원인이었다.[5]

 진도의 X마을에서도 5명의 보도연맹원이 경찰에 의해 처형되면서, 인민군이 8월 31일 진도를 점령한 이후 경찰, 면장, 우익단체에 대한 학살과 국군에 의한 수복 이후 도망가지 못한 20여명이 부역자로 간주되어 처형되어, 좌우익 모두 X리에서만 167명이 사망하였다.[6]

 영암군 군서면에서는 경찰이 보도연맹원 20~30여명을 처형하였고, 인민군 점령 이후에는 우익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또한 인민군 후퇴 이후 빨치산들이 구림교회에 교인들을 가두고 불을 질러 18명을 학살했고, 50년 10월 7일에는 공산당이 우익인사와 양민 28명을 민가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 이런 참극이 되풀이되어 반년만에 희생자가 262명에 다달았다. 

 구림마을은 2006년 이후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위해 합동위령제를 올렸고, 기금을 마련하여 2016년 11월에 <용서와 화해의 위령탑>을 세웠다. 


 한 많은 이 세상 좌와 우에 이유도 없이 영문도 모르고 죽임을 당한 임이시어!

 가해자와 피해자, 너와 나 낡은 구별은 사라지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향기만 가득하리오. 결코 지울 수 없는 님들의 탑명을 용서와 화해의 위령탑이라고 하였으니 이제 우리들의 뒤늦은 속죄를 물리치지 마시고 월출산 기슭에 고이 잠드소서. 

                                                                     <2016.11.17> 


          

[1]김남식, <남로당 연구>, 1984, 244쪽 

[2]김용삼, 위의 책, 77~78쪽 

[3]이택선,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 2020, 139쪽 

[4]이영석, <건국전쟁>, 2018, 299~304쪽 

[5] <월간조선> 2002년 4월호 

[6]박찬승, <마을로 간 한국전쟁>, 2010,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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