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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석 Sep 15. 2022

대한민국 정통사관, 아쉬운 퇴장

건국신화 제2장(2편)

 임정의 가장 큰 업적은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확인 받은 것이다. 물론 즉각적인 것이 아니라 적당한 시기에 또는 절차를 거쳐서라는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말이다. (‘in due course’ 1943년 12월 1일 발표.)

 이러한 성과의 과정은 42년부터 전해진 ‘한반도 국제공동관리’의 국제적 뉴스에 임시정부가 대책회의를 열고, 성명서와 반대운동을 벌이면서 43년 7월 26일 임정 요인들이 장개석을 만나 독립을 요청한 것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중국측 기록인 ‘장개석일기’, ‘총재접견한국영수담화기요’, 카이로회의일지’ 등에 그 내용이 자세히 남아있다. 

 주석 김구, 외무부장 조소앙, 선전부장 김규식, 광복군 총사령 지청천, 부사령 김원봉 등 5인은 장개석을 면담하여 국제공동관리를 반대하고 독립지지를 부탁하였다. ‘영국과 미국은 조선의 장래 지위에 대해 국제공동관리 방식을 채용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바라건대 중국은 이에 현혹되지 말고 한국의 독립주장을 지지하고 관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1]

 

 한편,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를 움직인 것은 집요하게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고, 기독교 목사 등을 통해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린 이승만의 노력도 큰 기여를 하였다.  43년 5월 15일 이승만은 장문의 편지를 루스벨트에게 보냈고, 교계 중진인 한미협회의 해리슨목사는 42년 3월 6일 협회 이사들과 연명으로 임시정부의 즉각 승인을 건의하는 진정서를 루스벨트에게 제출했다. 

 ‘현재의 대일(對日) 전쟁에 박차를 가하고 나아가 태평양 지역에서의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저는(이승만) 각하에게 간청하오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당장 승인하고 우리의 공동의 적인 일본과의 싸움에 한국인이 자기의 몫을 감당함으로써 미국에 실질적인 기여를 할 수 있게끔 원조와 격려를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기를 간청하는 바입니다.’[2]


                             아쉬운 퇴장 


  김구는 49년 1월 28일  UN한국위원단에 남한단독정부 반대와 미소 양군 즉시 철퇴를 요지로 하는 의견서를 보냈다. 

 ‘남북한인지도자회의를 소집함을 요구한다. 한국문제는 결국 한인이 해결할 것이다. 만일 한인 자체가 한국문제 해결에 관하여 공통되는 안을 작성하지 못한다면 유엔의 협조도 도로무공(徒勞無功)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소 양군이 철퇴하는 대로 즉시 평화로운 국면을 조성하고, 그 평화로운 국면 위에 남북 지도자회의를 소집하여서, 조국의 완전독립과 민족의 영원 해방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공동노력할 수 있는 방안을 작성하자는 것이다.’[3]

 불과 한달 전인 47년 12월 3일의 담화에서도 남한단독선거에 찬성했던 김구가 갑자기 돌변하여 이런 의견서를 제출하자, 김구가 부총재로 있던 독촉국민회에서는 믿어지지 않는다면서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미소 양군을 철퇴시키고 남북요인회담으로 한국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한국독립을 지연시키려는 공산당의 주장이므로, 우리 국민회 부총재이고 소련이 거부하면 남한총선거로 공동 진취하려는 이념하에 국민의회와 민족대표자대회 합동을 선창한 김구 선생이 그러한 주장을 하였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대표를 김구선생에게 보내어 진상을 물어보기로 되었는데, 하여튼 공산당의 모략이란 실로 새삼스럽게 생각된다. 그리고 남북요인회담 운운하는 것은 도대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니, 유엔위원단은 총선거를 감시하는 순서로부터 유엔의 결의를 실천할 것이다. 유엔결의에 없는 사실을 요구함은 위원단을 철거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의도 되지 않는다.’[4]

 스스로 2인자를 자처하며 이승만과 협조하여 임정의 법통을 이어가려던 김구의 지난 행적에 대한 적절한 논평이었다. 김구가 강경한 반공민족주의자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로 보아도 일부 청년들이 제 정신을 잃고 러시아로 조국을 삼고 레닌을 국부로 삼아서, 어제까지 민족혁명을 두 번 피 흘릴 운동이니 대번에 사회주의 혁명을 한다고 떠들던 자들이 레닌의 말 한마디에 돌연히 민족혁명이야말로 그들의 진면목인 것처럼 들고 나오지 않는가. 주자님의 방귀까지 향기롭게 여기던 부유(썩은 선비)들 모양으로 레닌의 똥까지 달라고 하는 청년들을 보게 되니 한심한 일이다. 나는 반드시 주자를 옳다고도 아니하고 마르크스를 그르다고도 아니한다. 내가 청년제군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를 잊지 말란 말이다. 우리의 역사적 이상, 우리의 민족성, 우리의 환경에 맞는 나라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밤낮 저를 잃고 남만 높여서 남의 발뒤꿈치를 따르는 것으로 장한 체를 말라는 것이다. 제 뇌로 제 정신으로 생각하란 말이다. (백범일지) 


 그렇다면 김구는 왜 갑자기 이승만과 민족진영을 외면하고 태도를 바꾸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그 당시 백범이 처한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통해 설명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49년 초의 시점에서 김구의 주변에는 엄항섭과 조완구 등 소수의 사람들만이 함께 하고 있었고 조소앙, 신익희, 안재홍, 이범석, 지청천 등의 주요 인물들은 각자의 정치노선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통제력은 많이 감소해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47년 12월 2일 장덕수암살사건이 벌어져 김구와 임정세력이 배후로 지목되면서 여론이 매우 악화되었다. 실제로 연희대학 3년생 배희범과 함께 체포된 청년들은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하는 ‘대한학생총연맹’ 간부 또는 맹원들이었다.[5]

 한민당의 강한 거부반응에 더하여 이승만도 재판에 증인으로까지 출석하게된 김구를 도와주지 않았고, 새로운 나라의 2인자 자리가 멀어진 그는 몇까지 정치적 선택 가운데 지금에 와서 평가하면 최악의 악수인 평양행을 선택한 것이라고 하겠다.[6]


 우파에서는 이승만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강경한 반공민족주의자요 자유민주주의자였던 김구라는 큰 민족지도자가 그 대체재로서는 충분히 역할을 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해방공간의 2인자 김구는 불운한 정치인이 되고 말았다. 

 평양의 남북연석회의에 아버지 김구를 수행한 김신의 회고록에는 백범 김구의 어두운 운명을 미리 보여주는듯한 광경이 벌어졌다.

 ‘개회식은 김일성에 대한 과도한 찬양이 주를 이루었다. 공연단은 우리가 낯 뜨거워 차마 보기 힘들 정도로 김일성을 찬양하는 시를 낭독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여러 독립운동 선배들 앞에서 창피하지도 않은지 김일성을 영웅시하는 연설까지 하였다. 나는 속으로 ‘아니 무슨 이 따위 개회식이 다 있나’ 생각했다.’[7]



          

[1]한시준, <대한민국 임시정부>, 2021, 198~206쪽 

[2]유영익,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 2019, 187~190쪽 

[3]손세일, <이승만과 김구>7권, 134쪽 

[4]손세일, 위의 책, 135쪽 

[5]손세일, <이승만과 김구>7권, 95쪽 

[6]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690쪽 

[7]김신, <조국의 하늘을 날다>, 2013,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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