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통사관 08.24
<김구와 이승만을 포함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없었다면, 장개석과 루스벨트 그리고 거대한 식민지를 가지고있던 대영제국이 뭐하러 조선을 독립시키려 하였겠는가?>
임정의 가장 큰 업적은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확인 받은 것이다. 물론 즉각적인 것이 아니라 적당한 시기에 또는 절차를 거쳐서라는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말이다. (‘in due course’ 1943년 12월 1일 발표.)
이러한 성과의 과정은 42년부터 전해진 ‘한반도 국제공동관리’의 국제적 뉴스에 임시정부가 대책회의를 열고, 성명서와 반대운동을 벌이면서 43년 7월 26일 임정 요인들이 장개석을 만나 독립을 요청한 것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중국측 기록인 ‘장개석일기’, ‘총재접견한국영수담화기요’, 카이로회의일지’ 등에 그 내용이 자세히 남아있다.
주석 김구, 외무부장 조소앙, 선전부장 김규식, 광복군 총사령 지청천, 부사령 김원봉 등 5인은 장개석을 면담하여 국제공동관리를 반대하고 독립지지를 부탁하였다. ‘영국과 미국은 조선의 장래 지위에 대해 국제공동관리 방식을 채용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바라건대 중국은 이에 현혹되지 말고 한국의 독립주장을 지지하고 관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1]
한편,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를 움직인 것은 집요하게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고, 기독교 목사 등을 통해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린 이승만의 노력도 큰 기여를 하였다. 43년 5월 15일 이승만은 장문의 편지를 루스벨트에게 보냈고, 교계 중진인 한미협회의 해리슨목사는 42년 3월 6일 협회 이사들과 연명으로 임시정부의 즉각 승인을 건의하는 진정서를 루스벨트에게 제출했다.
‘현재의 대일(對日) 전쟁에 박차를 가하고 나아가 태평양 지역에서의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저는(이승만) 각하에게 간청하오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당장 승인하고 우리의 공동의 적인 일본과의 싸움에 한국인이 자기의 몫을 감당함으로써 미국에 실질적인 기여를 할 수 있게끔 원조와 격려를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기를 간청하는 바입니다.’[2]
(현자의 ‘대한민국 정통사관’중에서. 참고도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시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