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ing & myth
한국은 분명 혁명정권이 아니라 국제적 합법성을 부여받은 민주주의정권으로 탄생하였다. 결국 프랑스 혁명세력이나 5.16혁명세력처럼 정치깡패들을 처형하고 부정부패를 일거에 청산할 성격의 정권은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국제공산주의세력의 무력남침으로, 신생국가 대한민국은 재정안정과 쌀수출을 시작할 정도로 활기를 되찾은 1950년 ‘한국의 봄’을 잃어버렸다.
또한, 정치적 유동성이 풍부한 무소속과 진보인사들이 대거 당선된 50년 2월 국회의원 선거를 통한 점진적 친일청산(간선제 대통령선거)도 전쟁으로 완전히 무산되었다.
(식민지배의 영향으로 국가의 자생력이 없었고 문맹률이 80%가 넘는 국민들이, 동일하게 완벽한 근대시민이 아니었던 지도자들과 함께 자유화.산업화.민주화.복지화로 점진적으로 발전한 국가가 대한민국이었다.)
‘한편, 이승렬선생은 17세기 이후의 영국의 개혁적이고 점진적인 발전에 있어서의 '상층 지주'의 역할에 주목하면서(Barrington Moore,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일제시대의 조선에서는 소극적 행태를 보인 경기도지역의 재산가, 양반들을 비판하고 서북의 기독교세력과 전라도의 진취적 대지주들의 교육. 언론. 기업활동을 높게 평가하였다.
토크빌을 포함한 여러 저술가들이 엄청난 정치적 혼란이 거듭된 프랑스대혁명을 비판했고, 실제적인 사회의 권력구조를 변화시킨 영국의 점진주의는 큰 혼란없이 대영제국의 영광을 만들어 냈다.
한반도의 경우, 반일. 항일을 선전한 혁명세력은 북한을 세계적 후진국으로 만들었고, 친일.극일로 비난받은 점진적 발전세력은 남한을 세계적 문명국으로 만들었다. "인간의 자유를 증진시키는 방법으로서, 점진적이고 부분적인 개혁이 폭력적 혁명에 대해 그 우월성을 입증해 왔다.“ (Barrington Moore, 이승렬, <근대 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 12쪽)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제와의 소극적 협력이 불가피하였음으로, 민족교육과 민족언론, 사업체 경영에 있어서 온건한 민족주의자들은 굴욕을 견뎌가며 민족의 실력을 키우려고 노력했다. 강제 동원된 노동자들은 억울한 희생자이고, 강제 동원된 예술가, 지식인들은 민족반역자가 되어야 하는가
전쟁시기인 1940년대에 실시된 '식량배급제'로 자가소비분이 부족하나마 인정된 농촌의 상황도 열악했지만, 특히 도시에서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등급별로 책정된 배급에서 일제당국에 의해 낮은 등급으로 강등되면 가족의 생사가 위태로워졌던 것이다. 매월 8일의 지역집회에 출석하지 않으면 배급미가 중단되었고,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배급통장을 빼앗겼다.
'김동환(시인, 1941), 우리의 적 장개석정권을 비롯하여 영미를 이 지구상에서 격멸치 아니하고서는 오늘의 배급미까지라도 편히 얻어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친일파 군상」
1948' 반민특위에서 반민족행위자로 거론된 인물들과 『해방전후사의 인식」에서 추산한 숫자는 대략 천여명을 넘지 않는다. 이들은 초대 내각과 제헌의회 선거에서 피선거권이 박탈되어 (『미군정 법령」 제175호) 대한민국의 주류에서 탈락하였다.
물론, 식민잔재는 남을 수 밖에 없었지만, 평화로운 선거를 통한 개혁정권에 의한 친일청산은 김일성과 공산제국주의의 전쟁도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실제로 1950년 5월의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정치적 유동성이 강한 무소속이 대거 당선되어, 국회 간선으로 선출하는 대통령은 교체될 가능성이 풍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