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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와 김규식의 노선이 옳았다고?’ 황현필 비판

정통사관 완전정복

by 현진석

<김구와 김규식의 노선이 옳았다고?> 황현필 反韓史觀 비판 2편


1949년, 거대한 중국대륙은 공산화되었고 스탈린과 김일성은 모스크바에서 남침계획을 짜고있었으며 박헌영은 수천명의 게릴라를 남파하여 대한민국을 파괴하려 하였다. 미국에서는 혼란에 빠진 신생국가 한국이 쉽게 공산화될 것으로 관측하였다.

이런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남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생존하게된 것은, 이승만의 신속 과감한 정부수립 추진과 진보주의자 조봉암을 파격적으로 임명하여 6.25전쟁전에 농지개혁을 완수하여 농민들이 빨치산화 되는 것을 막은 이승만의 업적이라고 칭송해도 충분히 합당하다!


김구의 독립운동과 애국심을 높이 평가하려면,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건국업적도 공정하게 평가하여야 정의로운 것이다.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려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는 이승만이었다. 한반도 절반만의 대통령이라도 되기 위해 미쳐 날뛰는 이승만을 저격함과 동시에 민족의 분단을 막겠다는 김구의 결연한 의지가 드러난 글이었다. (황현필, 184쪽)


(정통사관, 165쪽) 김구는 48년 1월 28일 UN한국위원단에 남한단독정부 반대와 미소 양군 즉시 철퇴를 요지로 하는 의견서를 보냈다.

'남북한인지도자회의를 소집함을 요구한다. 한국문제는 결국 한인이 해결할 것이다. 만일 한인 자체가 한국문제 해결에 관하여 공통되는 안을 작성하지 못한다면 유엔의 협조도 도로무공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소 양군이 철퇴하는 대로 즉시 평화로운 국면을 조성하고, 그 평화로운 국면 위에 남북 지도자회의를 소집하여서, 조국의 완전독립과 민족의 영원 해방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공동노력할 수 있는 방안을 작성하자는 것이다![3]


불과 한달 전인 47년 12월 3일의 담화에서도 남한단독선거에 찬성했던 김구가 갑자기 돌변하여 이런 의견서를 제출하자, 김구가 부총재로 있던 독촉국민회에서는 믿어지지 않는다면서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미소 양군을 철퇴시키고 남북요인회담으로 한국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한국독립을 지연시키려는 공산당의 주장이므로, 우리 국민회 부총재이고 소련이 거부하면 남한총선거로 공동 진취하려는 이념하에 국민의회와 민족대표자대회 합동을 선창한 김구선생이 그러한 주장을 하였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대표를 김구선생에게 보내어 진상을 물어보기로 되었는데, 하여튼 공산당의 모략이란 실로 새삼스럽게 생각된다. 그리고 남북요인회담 운운하는 것은 도대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니, 유엔위원단은 총선거를 감시하는 순서로부터 유엔의 결의를 실천할 것이다. 유엔결의에 없는 사실을 요구함은 위원단을 철거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의도 되지 않는다.[4]‘


스스로 2인자를 자처하며 이승만과 협조하여 임정의 법통을 이어가려던 김구의 지난 행적에 대한 적절한 논평이었다. 김구가 강경한 반공민족주의자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구는 왜 갑자기 이승만과 민족진영을 외면하고 태도를 바꾸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그 당시 백범이 처한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통해 설명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49년 초의 시점에서 김구의 주변에는 엄항섭과 조완구 등 소수의 사람들만이 함께 하고 있었고 조소앙, 신익희, 안재홍, 이범석, 지청천 등의 주요 인물들은 각자의 정치노선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통제력은 많이 감소해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47년 12월 2 일 장덕수암살사건이 벌어져 김구와 임정세력이 배후로 지목되면서 여론이 매우 악화되었다. 실제로 연희대학 3년생 배희범과 함께 체포된 청년들은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하는 '대한학생총연맹' 간부 또는 맹원들이었다. [5]


한민당의 강한 거부반응에 더하여 이승만도 재판에 증인으로까지 출석하게된 김구를 도와주지 않았고, 새로운 나라의 2인자 자리가 멀어진 그는 몇까지 정치적 선택 가운데 지금에 와서 평가하면 최악의 악수인 평양행을 선택한 것이라고 하겠다.[6]

우파에서는 이승만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강경한 반공민족주의자요 자유민주주의자였던 김구라는 큰 민족지도자가 그 대체재로서는 충분히 역할을 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해방공간의 2인자 김구는 불운한 정치인이 되고 말았다.


평양의 남북연석회의에 아버지 김구를 수행한 김신의 회고록에는 백범 김구의 어두운 운명을 미리 보여주는듯한 광경이 벌어졌다

‘개회식은 김일성에 대한 과도한 찬양이 주를 이루었다. 공연단은 우리가 낯 뜨거워 차마 보기 힘들 정도로 김일성을 찬양하는 시 를 낭독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여러 독립운동 선배들 앞에서 창피하지도 않은지 김일성을 영웅시하는 연설까지 하였다. 나는 속으로 '아니 무슨 이 따위 개회식이 다 있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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