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사관 완전정복
<9월7일 맥아더포고문이 친일파를 부활시켰다고?> 황현필 反韓史觀 비판 4편
전형적인 ‘친일파의 나라’ 몰아가기 선동이다. 일본인 및 한국인관료들을 유임한다는 포고령이 발표되고 한국인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자, 미국 국무부(3성조정위원회)와 맥아더는 황급하게 일제관료들의 해임을 명령하고, 9월부터 12월까지 미군정장교들과 한국인들을 공동국장으로 임명하였다.
‘일제 식민통치하 공공기관의 하급 권력직에 종사하던 매국노들은 맥아더 포고령으로 다시 권력을 부여받았다.
문제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고위직의 빈자리를 그들의 하수인인 매국노들이 차지했다는 것이다. 미군정은 조선인 매국노를 다시 고용한 것도 모자라, 오히려 그들을 승진시키기까지 했다. (황현필, 203쪽)‘
(취약국가, 47쪽) ‘1945년 9월 9일 12만 명의 일본 군대를 무장해제하고 발족한 미군정 은 일본인 식민지 관료들을 유임했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9월 11일 국무성.육군성.해군성 3성 조정위원회 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ee 와 맥아더가 훈령을 통해 일본 식민지 관료들의 퇴임을 지시하자, 일주일 후인 9월 18일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않던 109 명의 미군정 장교들을 황급하게 국장으로 임명했다. 곧이어 10월 13일3성 조정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대한초기기본지령이 미군정에 전달되었다. 지령에는 한국인의 생활에서 일제의 모든 잔재를 점진적으로 척결하기 위해 일본의 법률, 명령, 규칙 등을 폐지하고 공공 기관에 잔류해 있는 모든 일본인과 친일파, 부일 협력자들을 추방해 정치와 행정 면에서 모든 것을 다시 조직하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정통사관, 26쪽) ‘국민 정서를 반영하여 악명 높은 친일 경찰들에 대한 조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45년 10월 경무과장 조병옥은 기자단과의 회견에서 조선민족의 의사를 말살했거나 인권을 짓밟은 자 혹은 직책을 남용한 경관은 점차 숙청할 것이라고 밝혔고, 경기도 경찰부는 1946년 2월 13일에 악질 친일경찰들을 구속했다. 중국군 출신의 김응조를 초대 전라도 경찰청장으로 임명하기도 하였으며, 일제 경찰의 상징이었던 검을 곤봉으로 교체하였다." 또한, 1946년 10월 대구 폭동의 사후 처리를 위해 미군정은 한미 공동회담을 열어 47년 5월까지 악질 경찰관 56명을 파면하였다.‘
참고로 반민특위에서 친일경찰 여러명이 체포, 재판 받았으며 친일경찰청산은 6.25전쟁 등의 여파로 4.19 이후 완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