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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영 Dec 24. 2022

소음 포용, 공감 시작

『동의보감』에서 발견한 삶의 기예

음악 애호가? 소음 혐오자 !


내 인생에서 휴대용 음향 재생기기들은 없어서는 안 될, 수족과도 같은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소니 워크맨을 시작으로 휴대용 시디플레이어, MP3, 스마트폰, 그리고 노이즈 캔슬링 블루투스 이어폰까지!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40여 년 동안 상전벽해처럼 발전한 최첨단 전자기기들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 역시 시작은 조그마한 검정색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였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난 아마 아주 열렬한 음악 애호가라 여겨질 것이다.  물론 음악을 싫어하진 않으며 심지어 음대에서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기도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애호가'라 불릴 만큼 관심은 없어  즐겨듣는 노래 제목, 작곡가 이름들조차 희미 한데다, 몇 년을 죽어라 연습해 음대에 입학하자마자 일말의 미련 없이 바이올린을 그만두고 싶어졌었다. 


난 그다지 음악을 좋아했던 것이 아니었고 다만 그렇게 착각하고 살았다는 건 나이 들수록 점점 확실해지고 있다. 그럼 왜? 음악이 좋아서라기보다 ‘소음’을 피하고자 내 귀에 좀 더 편안한, 음악이라는 커다란 장벽을 쌓는 용도로 ‘휴대용 음향 재생기기’들을 소지하고, 아니 몸에 딱~ 붙이고 다녔던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소리에 민감했던 나는 듣기 싫은 소리를 들을 때면 짜증과 화의 폭발에 심지어는 두통이 생기고  종종 목덜미와 어깨 근육이 굳어 아프기까지 한다. ‘나를 화나게 하는 소리들'을 나열하자면 어릴 적 아버지의 고함소리, 온갖 물건들이 깨지는 소리, 엄마가 우는소리, 부모님의 잔소리, 산책로 “어르신"들의 째지는 트로트, 이른 새벽 조용한 기차칸에서 울려 퍼지는 내 친구 뽀로로 ㅋ, 등등. 이제 부모님은 멀리 사시고 지금 가족들은 조용하니 내가 단순히 ‘소리'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예의 없는 인간들이 공공장소에서 이기적인 행동을 해서라고, 나는 단지 정의로울 뿐이라며 당당히 항의를 하며 살았었다. 싸우기도 수차례, 경찰서라도 갔을 법한데 운이 좋았던 건지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러다 15년 전쯤 소음을 취소해 준다는 최신 기술인 노이즈 캔슬링을 탑재한 헤드폰을 구입했다. 한때 사람 많은 곳에 가면 머리가 멍해지며 피로에 가슴이 답답해지는 증세가 있어서 공황장애를 의심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장착하고 클래식을 들으며 서울 시내에서 가장 붐비는 곳 중 하나인 강남 고속 터미널을 갔더니 그런 증세 하나 없이 최고의 컨디션으로 볼 일을 마칠 수 있었다. 그때 확실히 알았다. 많은 사람 자체보다 사람들이 내는 소리 때문에 더 힘들었었다는걸.  





‘소음' 이 뭐길래?



'노이즈 캔슬링'(noise canceling) 기술은 1950년대 영국에서 개발되었다. 헤드폰 속 마이크가 주변의 소리를 듣고 이를 정반대 파형으로 변형해 사용자의 귀에 전달하면 이 두 음파가 서로를 상쇄시키는데, 이를 '상쇄 간섭’이라고 한다. 헤드폰에서 나오는 음파가 소음 제거의 역할을 맡아 결국 헤드폰 바깥의 소음을 다른 방식의 소음을 내서 없애는 것처럼 착각시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오랑캐로 오랑캐를 물리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와 같은 셈이다. 그렇다면 소음을 싫어한다면서 소음으로 소음을 제거하고 행복해했던 셈 아닌가?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소음이고 무엇이 소음이 아닌 걸까? 내 짜증과 화의 원인은 외부의 문제, 즉 소리나 사람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음’의 사전적 정의는 진동수가 불규칙하고 시끄럽게 들리며 불쾌감을 자아내는 소리의 총칭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소리와 소음을 구분하는 것은 그것을 듣는 사람일 것이다. “내"가 듣기 싫으면 소음이고 “내”가 괜찮으면 그냥 소리이며 “내"가 듣고 싶은 것은 좋은 소리나 음악이 되는 것. 그 모든 걸 정하는 주체는 나 자신이다. 게다가 거기에 화를 내는 것도 나라는 게 문제다. 


공부하기 이전에는 아니~ 그런 건 당연한 거 아냐? 반문했을 것이다. 그런데 뭐든 자연스러운 소리로 여기고 지나가면 될 일을 굳이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해 가며 짜증을 내는 건 내가 느끼고 인식하는 것만이 옳다고 견고하게 믿고 있는 비대하며 못난 자아 때문임을 깨달았다.  불교에서 “분별심"을 내지 말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객관적일 수 없는 내 기준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노여워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거니와 가장 먼저 나에게 고통을 줄 뿐이니.




소통불능의 몸


게다가 거의 평생 귀에 이어폰을 꽂고 큰 소리로 음악을 들으며 살아온 나날들로 인해  그 거대한 자아를 내려놓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인 사람들과의 소통마저 어렵게 했었다는 걸 아래 글을 읽고 알게 되었다.


“요즘처럼 소음과 이어폰에 노출되어 있으면 청력은 더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다. …(중략) 요즘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남에게 하는 힘도 약하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끈기 있게 듣는 능력도 현저히 떨어진다. 청력이 약하면 평행감각도 같이 추락하게 된다. 현대의학의 용어를 빌리면 ‘중이'에 있는 전정기관에 문제가 생긴 탓이다. 평형을 잃는다는 건 생리적 사건이기도 하지만 사건을 통째로 보는 힘, 다시 말해 맥락을 온전히 파악하는 힘이 딸린다는 의미도 된다.  그럴 때 나타나는 증상을 흔히 충동이라고 한다.”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고미숙 281쪽


단순히 내가 듣기 싫은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또 지루함을 견디기 위해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다 여겼는데, 그게 타인과의 소통불가에 맥락을 파악하는 힘마저 딸리게 했다니!  아닌 게 아니라 난 불과 3-4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이유 없이 어색하고 이야기의 흐름도 파악이 되지 않아 내향형이거나 눈치나 센스 부족이라 단정 짓고 다시 음악이나 듣자… 하며 이어폰을 꽂았는데 그게 그놈의 이어폰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다는 게 새삼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음악 없인 못 살던 나, 40대 초반을 지날 때 즈음 음악 듣기가 더 이상 편치 않았다.  꼭 들어야 할 것들을 듣지 못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내려야 할 정거장을 놓친다거나, 가족들이 하는 말을 듣지 못하고 두세 번 말하게 하던가 포기하게 만들거나. 그런데 그런 바깥의 소리를 지나치는 것만큼이나 큰 문제는 내 안의 소리도 사라지게 한다는 것. 자연스럽게 들리는 소리는 막아버리고 내 귀에 편한 소리만 줄곧 들으니 깊이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머릿속에 있는, 풀어야 할 문제들도 음악으로 다 덮어 버리는 꼴이었다. 


감이당에서 읽고 쓰는 공부를 시작 한 후엔 음악을 듣는 것이 더 불편해져 요즘은 거의 듣지 않는다. 감정이나 스쳐가는 생각만으로는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좋은 글을 위해선 ‘사유’를 해야 한다. 사유는 개념, 구성, 판단 등을 하는 이성 작용이며 어떤 것을 두루 생각하는 행위이다. 나는 그것이 나 자신과 하는 대화가 아닐까 싶다. 타인과 이야기하는데 음악을 크게 틀어둔다면 그 대화가 진지하게 잘 흘러갈 수 있을까? 나와의 대화, 사유도 마찬가지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음악은 감정을 뒤흔든다. 그렇기에 음악과 함께하는 나와의 대화는 그 음악이 조장하는 감정의 파도를 타게 되고 그러다 보면 이성 작용은 고사하고 그 사유는 산으로 가버리기 십상이다.




사람과 가까이 가려면


“보지 못하면 사물과 멀어지지만 듣지 못하면 사람과 멀어진다.” 헬렌 켈러가 한 말이다. 나는 어쩌면 사람들과, 또 나 자신과 멀어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나와도 타인과도 가까워지고, 소통하고 싶어 이어폰을 빼고 지낸다. 예전보다는 사람들과 대화도 수월해지고 조금씩 재미도 느끼지만 여전히 거슬리는 타인을 만나면 귀를 막고만 싶어진다. 


최근 한 세미나에서 발제와 진행을 했다. 원래 요란했던 한 도반, 그날따라 더욱더 모임 시간 내내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토론은 고사하고 동네 아줌마 브런치 수다가 되어버린 3시간.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분노와 괴로움이었다. 그런데 고작 그런 일에 왜 나는 며칠간이나 화가 나 있었을까? ‘내’가 최선을 다해 준비한 발제문의 반도 채 진행하지 못했던 것과 그의, ‘내 기준’으로는 너무 크고 거슬리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결국 좋고 싫은 소리를 구분하는 분별심과 비대한 자아의 공격에 무너져 버린 셈이다. 


잊고만 싶은 날이었지만 그 사건과 흡사한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며 내 마음을 들여다보니 열등감, 우월감, 인정욕망 등의 탐진치(탐욕, 분노, 어리석음)로 똘똘 뭉친 못난 마음이 명확히 보여 괴로웠고 자괴감마저 들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가 보기로 했다. 내 기억 속 최초의 소음은 아버지의 고함소리, 잔소리, 마구 던져지던 물건들의 부서지는 소리들이다. 아버지의 분노는 마치 불발탄이나 지뢰밭 마냥 언제 어디서 어떻게 터질지 몰라 항상 조마조마했다. 게다가 그 내용도 대부분 내겐 앞뒤가 맞지 않고 부당하며 시대착오적이라 여겨져 참지 못하고 반발하면 십중팔구 맞거나 설교가 몇 배 길어지는 더 큰 화를 당하는데도 무기력하게 듣고만 있는 것이 종종 모욕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그 어마어마한 화는 어디서 온걸까? 출생과 동시에 모친을 여의고, 처녀장가들어 따로 사는 아버지에게 어미 죽인 자식이라 미움받으며 이유 없이 심한 구타를 당했던 어린아이, 버스비조차 없이 배 주리며 가난했던 청년 시절엔 부자만 되면 행복해질 거란 확신으로 이 악물고 온갖 모욕과 고초를 겪으며 사업체를 일군 인생역정, 숨 쉴 틈 없이 달려가던 와중 억눌린 분노를 다스릴 여유 따위는 사치 아니었을까. 게다가 지금 내 나이, 겨우 40대의 아버지는 그 화와 고됨을 기댈 곳조차 없었겠다-에 생각이 이르니 당시 공포스러워 미치도록 듣기 싫었던 소리들이 슬픔과 외로움의 하소연으로, 처량하게 여겨졌다. 


나도, 아버지도, 또 아버지의 아버지도… 모두 삶의 번뇌에 힘들어하는 작은 한 존재일 뿐. 





마침내, 시작된 소통


80대의 아버지는 아직도 주 6일을 출근하시며 쉼 없이 달려가고 계신다. 안부전화를 드리면 바빠서, 혹은 회사일 등으로 좋지 않은 상황일 때가 많아 짜증과 함께 서둘러 끊으시곤 하니 점점 더 연락이 뜸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얼마 전 내 생일, 그래도 이런 날 부모님께 감사 인사는 드려야지 싶어 전화드리니 아버진 마침 내 동생에게 화가 나 있던 상황, 내게도 불똥이 떨어졌다. 


생일날 부모님께 전화드렸다 화받이? 가 된 셈이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았다. 좀 더 자주 전화하라고 버럭! 하시는 모습에 “에잇~언제는 전화하면 왜 했냐고 버럭 했으면서!" 하는 반발심도 생기지 않았다. 끝까지 명랑한 말투로 죄송하다고 했다. 아…외로우신가 보다. 욕먹든 말든 전화 자주 드려야겠구나. 끝. 


이틀 후 울리는 벨 소리, 아버지였다. 그날 몸도 힘들고 나이 들어 인생이 허무한 마음에 괜한 화를 내셨다고 사과 비슷~한 말씀을?!! 이례적인 일이다. 세상도 사람도 참으로 끊임없이 변하는구나! 놀라우면서도 의아했는데 아래 글을 읽고서야 납득이 되었다.


“경청이란 서비스가 아니라 상대방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정확히 간파하는 힘이다. 일단 핵심을 정확히 알아야 새로운 출구나 길을 안내해 줄 수 있는 법이다.”『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고미숙 420쪽


듣기 불편한 말 일지라도 나에게로 향한 공격이라 여기지 않고 경청해 핵심을 파악하는 통찰을 할 수 있어야 진짜 그를 도울 수 있고, 동시에 나의 마음도 평온하며 뿌듯해진다는, 나에게도 좋고 남에게도 좋은 “자리이타” (自利利他)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소통의 시작은 분별없이 모든 말과 모든 소리를 열린 귀와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 ‘내 귀에 캔디' 같은 달콤한 소리 말고는 귀를 막는다면 마치 어린애 같은, 좋은 것만 취하겠다는 이기심으로 가득한 성장이 멈춘 인간일 것이다.  내가 그렇게 살았다는 것이 진심으로 부끄럽다. 


이젠 알았으니 앞으로 남은 생에서는 그 어리석음을 덜어내고 어떤 소리든 경청해 세상과 소통하며 바른길을 안내해 줄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고 나이 들어갈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 2022년 12월 23일 감이당 금요 대중지성 4 학기 에세이 최종 발표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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