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임꺽정』을 읽고...
갖바치는요, 『임꺽정』에서 임꺽정의 스승이며 양주팔이란 이름의 백정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일찍부터 모든 동양사상 - 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을 통달한 인물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다 꿰뚫어보며 도술을 부리는 능력까지 갖추었습니다. 조광조 등 양반들과 친분이 상당했다고 하는 기록이 남겨진 실존 인물을 모델로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임꺽정'은 물론이고, '풍란', '여인천하' 등의 드라마에서도 갖바치 캐릭터가 단골로 등장해요.
* 갖바치: 조선시대, 갖신(가죽신) 만드는 일을 하는 직업을 가진 이를 칭하는 단어입니다.
* 『임꺽정』 1, 2권의 내용을 참고로 썼습니다.
저는 『임꺽정』을 읽는 내내, 갖바치가 참 좋았습니다.
저뿐 아니라『임꺽정』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그를 존경하고 아주 좋아합니다. 양반인 이장곤도 조광조도, 백정인 꺽정이와 두령들도 모~두 말입니다. 부럽더라고요 ^^
저는 그 이유를 그의 지식이나 능력, 또 두리뭉술 퉁쳐서 인격이나 ‘영성' 이라고 여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제가 따라하기가 힘드니까요 ! ㅎㅎㅎ
부처님께서는 사람의 귀천은 타고난 신분이 아니라 신, 구, 의.. - 즉 행동과 말과 의도로 결정된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백정으로 태어나 생불 (살아있는 부처) 로 열반한 갖바치의 화법과 그 이면의 의도, 즉 마음을 찬찬히 분석해 보기로 했습니다.
『임꺽정』에서 갖바치가 처음으로 등장하며 한 말, “어떤 손이 와서 앓는다지요 ??” (1권 66페이지)
이 문장의 주어는 “앓는 어떤 손", 익명의 아픈사람 입니다. 그 손이 누구인지, 또 나, 즉 갖바치 자신이 뭘 어쩔 것인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갖바치는 그 병자를 고치러 왔지만 그보단 그저 익명의 아픈 사람이 존재한다는 팩트가 그에게는 가장 중요합니다.
이 ‘앓는 이'는, 양반이지만 신분을 숨긴채 귀양지에서 도망치다 봉단이네서 하룻밤 묵다 병이 난 이장곤 입니다. 조용히 병자 이장곤을 돌봐준 갖바치는 또 조용~히 봉단과 장곤을 이어줍니다. 저같음 이렇게 하겠죠.. “봉단아, 내가 사람볼줄 아는데 말이야, 가만보니 저 사람이 지금은 꼴이 저모양이지만 보통 사람이 아니다. 너는 마음에 드느냐? “ 이렇게요, 하지만 대신 갖바치는, 이장곤에게 물을 떠다 주겠다는 봉단에게 그저 “네가 갖다 먹이려느냐?” 라고 묻고 그말에 “아니에요, 작은아버지도 참~” 이라며 얼굴을 붉히는 봉단이를 보며 마음을 확인하고 물밑에서 큐피트 노릇을 해 줍니다.
다 죽어가던 이장곤의 목숨을 구한것, 백정의 딸인 봉단이가 그와 결혼해 양반 높은 가문의 마님이 된 것도 모두가 갖바치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는 절대로 생색내는 법이 없어요. 저같으면 티내고 싶어서 참기 힘들었을 듯 합니다. ^^;;;
봉단네를 따라 서울로 이사한 갖바치, 이번에는 기구한 운명의 꺽정, 봉학, 유복의 스승이 되어 줍니다. 꺽정이를 서울로 데려갈 때, 비록 지 에비도 포기한 문제아지만 아이의 의사를 먼저 물어봅니다. “너는 나와 같이 서울에 가겠느냐?”, “언제 가겠느냐?” 이렇게요. 또 서울 가도 글은 배우기 싫다는 꺽정이에게 “아무려나. 너 싫은것은 고만두지. 어려울 것이 무엇 있니.” (2권 190-1페이지) 라면서 여기서도 갖바치는 '너는' 이라는 주어를 주로 씁니다. 나 보다는 너의 생각, 너의 처지가 먼저입니다.
꺽정이가 혼자 검술을 배우고 돌아온 것을 보고 꺽정의 또다른 스승 심의는 “무쌍의 검객이 되었다지? 그러나 백정의 아들이 탈이다!” 라며 껄껄 웃지만 갖바치는 “꺽정이에게도 탈이지만 세상에도 좋을것은 없으리다” 라 답하며 얼굴을 찡그리며 웃습니다. 이리 찡그린 표정을 지을만큼 꺽정과 세상을 안타까워 하는 갖바치는, 꺽정이가 도적 두목이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내색도 하지 않고 그저 찡그릴 뿐, 왜 꺽정이를 교화? 시키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사실 우리는 내가 어떤 능력이 있다고 여기면 그것을 내가 좋다고 여기는 쪽으로 무조건 쓰려고, 무엇을 이루려고만 하죠. 능력이 없어서 문제라고만 여기고요. ^^
그런데 갖바치는 그의 능력이 얼마만큼이던, “내”가 꼭 해야하는 일이 어디까지인지를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 그의 화법에서처럼 그의 행동역시 나를 내세우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이 아니라, 상대방이 딱! 필요로 하는 만큼을 조용히 도와주려 합니다.
결국 병해대사라는 이름으로 칠장사로 들어가 생불이 된 것도, 내 능력으로 타자와 세상을 어찌 해보려는 것은 허상일 뿐이고 모든 존재를 돕는 일은 그저 자기 자신을 극한까지 수련해 나라는 자아를,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영성을 터득하는 것이라 여겨서 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갖바치와는 사뭇? 다른 ! , 우리가 쓰는 화법은 어떠할지 한번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주어는 없다" 라는 말, 들어 보셨나요? 정치권에서 최근까지도 종종 애용하곤 하던데요^^
?? 혹시 모르신다면 - 참고하세요 (주어를 생각하다 보니 떠오른 ㅎㅎㅎ)
https://namu.wiki/w/%EC%A3%BC%EC%96%B4%EB%8A%94%20%EC%97%86%EB%8B%A4
주어는 없다 - 나무위키
1. 개요 : 인터넷 에서 유행하는 문장으로, 법적 문제를 회피하기 위한 초필살기 중 하나.
namu.wiki
아무튼 이런 말들이 세간에 회자되는 것처럼, 한국어에선 (중국어 역시) 주어가 없어도 문장이 완성됩니다. 반면 영어는 대부분의 경우 주어가 꼭! 필요해요. 그래서일까요? 우리가 무심히 사용하는 언어에서 '나'를 쓰지 않고도 얼마나 ‘나’ 를 많이 내세우는지를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애 서울대 보냈어” 라는 식의 말 많이 들어 보셨죠? 거기에서 사실, ‘보냈다’는 주체는 ‘나’ 입니다.
하지만 “우리애는 지방에 그냥 그런 대학 보냈어…” 라는 말은 생소합니다. ^^ “그냥뭐~지방대 갔어” 라고 하죠. 좋은대학은 "내"가 보낸거고 자기 기준에 별로인 대학은 "애가" 간겁니다. ㅎ
이 얼마나 어마어마하며 엄청난 착각에 빠진 거대한 자의식이 숨겨진 언어 습관인가요?!!!
저의 화법 역시 다르지 않았어요. 나를 내세우며 내 생각, 내 입장, 내 욕망이 먼저였고 상대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먼저 생각하고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학기, 갖바치를 분석하면서 갖바치 따라하기 프로젝트를 실행 중인데요. 특히 사춘기 아들과 대화할때 말하기 전, 갖바치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대부분의 경우 입을 다물게 되더라고요. ㅋㅋ효과는 예상보다 매우 강력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실천했던 '갖바치 화법 배우기 행동 지침 5단계' 를 소개드립니다.
1. 사랑이라는 전제가 깔린 관찰
2. 상대를 내 잣대로 판단, 비난하는 마음 지우기
3. 나 말고, 그사람에게 필요한 말을 하기.
4. 그런 말이 생각나지 않으면 침묵.
5. 안타까움 등의 감정은 표정으로만 사알짝 나타낼 것.^^
사실 처음엔 갖바치가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게 너~무 부러워서 따라하고 싶었는데요…
이걸 실행한 지 100일쯤 되었을까요? 그토록 지랄맞았던, 자길 쳐다보지도 말라며 눈을 부라리고 겸상조차 하지 않던 중2 아들이 저를 보고 환하게 웃기도 하고, 맨날 잠궈놓던 방문을 열고 나와 제 옆에서 기타를 치질 않나, 웃긴 유튜브 영상을 같이 보자고 하는 그런, 어찌보면 지극히 평범한 일들이 뭣보다 큰 기쁨이었기 때문에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다는 제 자의식 가득한 욕망은 어느새 희미해 지더라고요.
그런것은 전혀 중요한게 아니었어요. 나 먼저 상대에게 기쁨과 의지가 될 말과, 행동과, 마음을 가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이타심, 모두를 이롭게 하는 그런 영성으로 가는 시작이겠지요.
“대체 뭣이 중한지???!!!” 를 온 몸으로 깨닫게 해 준 ...
갖바치의 ‘자아' 없는 화법과 마음 배우기, 몸과 마음에 완전히 새겨질 때 까지 정진하겠습니다.
2023년 감이당 금요 대중지성 2학기 "스토리텔링" 저의 마지막 발표 내용 입니다. 소설을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해 보충 설명만 조금 더 넣었습니다. 『임꺽정』10권 중에서 이야기를 찾아 '영성'에 관련된 스토리텔링 스크립트를 써서 발표 하는것이 2학기의 과제였습니다.
- 고미숙 선생님의 발표 평가 녹취 -
"목소리도 좋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잘 풀어갔어요. 외워서 한다는 느낌이 안들잖아요. 그런데 많이 외웠겠죠. 많이 외우고 연습도 많이 했을텐데, 자기가 그것을 생활에 계속 접맥을 했기 때문에 그러면 이야기를 저렇게 자연스럽게 할 수 있죠. 이게 아까 제가 얘기한 게 바로 저런거 거든요. 그러면 암기한 걸 막 더듬을 필요가 없는거죠. 이미 자기가 '주어가 없다' 는 갖바치의 대화법 이런걸 만들어가지고 적용을 해 봤으니. 이렇게 섞이면 언제 어디가서도 갖바치 얘기를 막 할수가 있어요. (생활과) 안섞이면 외운걸 까먹고 나면 없어지는거죠. 이 차이를 아시겠죠? " (2023. 7월 7일 금요일 감이당)
고미숙 샘께서 "생활에 접맥" 하는것이 중요하다는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잊지 않고 공부를 계속 일상에 적용하고자 기록을 남깁니다. 자랑도 좀 하고... (여전히 어마어마한 자의식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