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동조

by 윤재

62. 은밀한 동조



지인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비대면 모임으로 영어책 읽기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 읽고 있는 책은 『The Great Gatsvy』입니다.『위대한 개츠비』는 F.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 1896~ 1940)의 장편 소설로, 미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작품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지요.


등장인물 중 톰 뷰캐넌(Tom Buchanan)은 자동차 수리와 중고차 매매를 하고 있는 윌슨의 부인(Myrtle Wilson)과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톰은 뉴욕의 맨해튼에 아파트를 얻어 불륜의 장소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꼭대기 층에 위치하고 있는 아파트는 작은 거실, 작은 거실, 작은 식당, 작은 침실, 그리고 욕실 하나가 전부인 작은 공간입니다. 거실은 지나치게 큰 태피스트리 장식 가구 세트로 문까지 꽉 들어차 있었고, 그 안을 조금만 움직이려 해도 계속해서 베르사유 궁전 정원에서 그네를 타는 숙녀들의 장면 위로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The living-room was crowded to the doors with a set of tapes-tried furniture entirely too large for it, so that to move about was to stumble continually over scenes of ladies swinging in the gardens of Versailles).


이 소설이 출간된 지 53년이 지난, 1978년 스모키(Smokie)의 리더 싱어 크리스 노먼(Chris Norman)과 세계적인 여성 보컬리스트인 수지 콰트로(Suzi Quatro)가 부른 추억의 올드팝송 < stumblin’ in>이 생각나는 단어 - stumble이 문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타오르는 불꽃이라고,

불빛이 흔들리는 자신들의 사랑을 잡아줄 것이라고~” 하는 내용의 가사.

(Our love is a flame, Burnin’ within Now and then, firelight will catch us Stumbling in~ )

“Stumblin’ in은 크리스 노먼(Chris Norman)과 수지 쿼트로(Suzi Quatro)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처음 시작하듯이 다시 시작하자는 내용이지만, 톰과 윌슨부인은 좁은 아파트 공간에서 그들의 타오르는 정염을 녹입니다.


”ladies swinging in the gardens of Versailles “란 표현에서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1732~1806)의 그림 <그네, 1767>가 생각납니다. 프라고나르는 18세기 프랑스, 루이 15세가 통치하던 시대는 화려함과 향락으로 가득 찬 로코코(Rococo)의 절정기에 사랑, 유희, 쾌락, 욕망이라는 인간 감정의 가벼운 일면을 정교하고 감각적인 붓질로 담아낸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귀족의 일상, 정원, 은밀한 연애, 숨겨진 감정들을 연극처럼 생기 있게 묘사했으며, 이를 통해 시대의 모순과 쾌락적 심리를 드러내는 천재적인 이야기꾼이 되었습니다. 그의 그림 중 《그네》(The Swing, 1767)는 로코코 회화의 정수이자, 프랑스 귀족 사회의 은밀한 연애 감정과 도덕적 허위를 미소 속에 담아낸 역설의 명화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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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그네, The Swing>, 1767, The Wallce Collection



한 여인이 풍성한 핑크색 드레스를 입고 그네를 타며 허공으로 날고 있습니다.
그네를 밀어주는 중년 남성은 어두운 배경에 묻혀 있고, 꽃 덤불 속에서 그 여인을 올려다보는 젊은 연인이 밝게 그려져 있습니다. 볼이 발갛게 상기된 그녀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한쪽 신발을 날리며 연인을 향해 발을 뻗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단순한 놀이 장면을 표현한 것을 넘어, 그네는 욕망과 유혹의 상징, 신발은 순결의 상실, 울창한 나무와 조각들은 비밀과 위선을 감추는 귀족 사회의 장막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림은 겉보기엔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감정과 도덕 사이의 가벼운 줄타기, 권력과 욕망의 밀고 당김이 존재합니다.

이 그림은 세 사람의 삼각관계를 통해 욕망의 권력 구조를 시각화하고, 그 모든 상황을 장난기 어린 웃음으로 가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프라고나르가 시대의 심리와 부조리를 붓 하나로 가볍게 풍자한 방식인 것입니다.



『위대한 개츠비』의 톰과 머틀의 아파트에는 Versailles 정원의 여인들이 그네를 타는 장면이 새겨진 태피스트리가 등장합니다. 공간의 크기에 비해 가구들이 너무 커서 거실을 돌아다닐 때마다 그네의 여인들과 마주치게 됩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실내 장식의 묘사가 아니라, 톰의 욕망, 머틀의 허영, 그리고 그 아파트에 출입한 인물들의 사치스럽고 불안정한 욕망이 바로 《그네》의 세계관과 정서로 채워져 있다는 상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톰과 머틀의 불륜은 겉으론 활기차고 가볍지만, 그 내부엔 계급, 폭력, 속물성, 지배와 굴종이 깔려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감싸는 유희적 외관, 그것이 바로 프라고나르가 《그네》에서 보여준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프라고나르의 《그네》는 단지 사랑을 그린 그림이라기보다, 가벼움으로 무거운 것을 감추고, 밝음 속에 어두움을 숨긴 로코코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개츠비』 속 ‘그네’의 이미지가 등장하는 순간은 단지 공간 묘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타락한 욕망과 은폐된 진실이 실내 가구처럼 일상에 자리 잡고 있는 풍경을 의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네는 웃으며 하늘로 올라가지만,
결국엔 중력처럼, 반동으로 무거운 현실로 떨어질 운명을 품고 있습니다.
프라고나르가, 그리고 피츠제럴드가 혹시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요.




‘진짜 상류층(Old Money)’출신으로, 엄청난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인물인 톰 뷰캐넌(Tom Buchanan).


거만하고 권위적인 성격을 가진 상류층 백인 남성인 톰 뷰캐넌은 육체적으로도 크고 강하며, 자신이 가진 사회적 지위(상류층, 부, 백인 남성)의 힘을 무기로 사용하며 인종차별주의적인 시각과 강한 남성 우월주의 성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데 거리낌이 없으며, 도덕적으로는 이중적이며, 아내인 데이지(Daisey Buchanan)가 다른 남자(개츠비 Jay Gatsby)와 가까워지는 것은 참지 못하면서 본인은 거리낌 없이 외도를 합니다. 위선과 자기 중심성이 그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머틀 윌슨은 허영심이 강하고 현재의 삶에 대한 불만이 크며 상류 사회로의 진입을 꿈꾸고 있습니다. 허영심이 강하고, 톰과 함께 있을 때는 자신이 진정한 부인이라도 되는 듯 행동하려 합니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용당하고 있는 상태이며, 진정한 힘을 가진 자들 사이에서 매우 취약한 불안정한 내면을 가진 존재입니다.


이들의 관계는 당시 미국 사회의 계급 갈등과 성적 이중잣대, 도덕적 타락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톰은 머틀을 사랑하기보다, 필요할 때만 이용하고 쉽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톰은 권력을 가진 위선자이며, 머틀은 허영과 욕망에 휘둘리는 희생자이기도 합니다. 도덕의 붕괴, 현대 사회의 공허함과 욕망을 상징하는 서사 장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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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IMDb, <위대한 개츠비> 중에서



Chapter II의 아파트 장면은 1920년대 미국 상류사회의 허위의식, 계급적 탐욕, 그리고 도덕적 마비 상태를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장면들은 주인공 개츠비의 순정이나 데이지의 나약함보다,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의 "암묵적 동조"에 있다고 보입니다. 이러한 동조의 심리 기제는, 심리학자 솔로몬 애쉬(Solomon Eliot Asch, 1907 ~ 1996, 폴란드계 미국인 게슈탈트 심리학 및 사회 심리학의 선구자 )의 동조 이론(Confirmity Theory), 그리고 공감과 인지적 합리화의 개념으로 접근해 볼 수 있겠습니다.


뉴욕의 아파트는 톰과 머틀이 비밀리에 만나는 불륜의 장소이며, 그 자체가 상류층의 위선, 도덕적 공허함, 계급의 착각, 인간관계의 파괴를 상징합니다. 이 아파트는 단순한 설정이 아니라, 미국 사회의 타락한 단면과 인물 내면의 부패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중요한 공간입니다.


톰과 머틀의 뉴욕 아파트에 모이는 사람들은, 분명히 두 사람의 부도덕한 관계를 알고도 묵인하거나 동조합니다. 금주법이 발동되고 있던 이 시기에, 이들은 술과 수다, 파티에 휩싸여 도덕적 비판 대신 흥미와 오락성에 몰두합니다.


이 아파트에 동행한 닉 캐러웨이(Nick Carraway)는 이 소설의 서술자이자, 독자와 이야기 사이의 중간자입니다. 그는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 사람-판단을 유보하는 사람, reserve all judgements”이라며 객관적 위치에 있으려 하지만, 사실상 그는 도덕적 판단을 회피함으로써 침묵 속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톰이 머틀을 폭행하는 장면, 데이지와 개츠비의 위험한 관계, 그리고 파멸을 향해 가는 모든 순간에 닉은 비판도, 개입도 하지 않고 물러섭니다. 심지어 닉은 톰의 부인인 데이지(Daisey)와는 친척 관계입니다.


그의 침묵은 자신의 중립적 시선을 유지하기 위한 인지적 합리화이자, “그들의 세계는 내가 속한 곳이 아니다”라는 거리 두기를 통한 자기 정당화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톰과 머틀의 아파트 파티에 동참하고,

그 속에서 사람들의 허영과 도덕적 타락을 매혹적으로 바라보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태도를 보여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기도 합니다.

“나는 안에서, 동시에 밖에 있었다.” (“I was within and without, simultaneously enchanted and repelled by the inexhaustible variety of life.”) 닉의 이 말은 그가 결국 내면적으로는 이 세계에 일정 부분 동조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아파트에는 머틀의 여동생 캐서린(Catherine)도 합석합니다. 머틀의 여동생 캐서린은 언니의 불륜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입장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캐서린은 불륜을 비판하지도 않고, 오히려 언니가 “톰과 정말 사랑하고 있었다”라고 말하며 정당화합니다. 머틀이 죽은 후, 그녀는 언니가 톰을 전혀 몰랐다고 거짓으로 진술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자매애를 넘어서, 사회적 망신을 피하고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규범적 동조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가족의 잘못을 덮기 위한 감정적 공감, 그리고 사회적 수치심을 피하기 위한 인지적 합리화가 동시에 작용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아파트 장면에만 잠깐 등장하는 사진작가 맥키(McKee)는 예술가의 현실 적응과 침묵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의 예술은 본격적인 전시나 비평에서 주목받는 것이 아니라, 상류층에 잘 보여야 살아남을 수 있는 수준의 장식적 사진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는 톰과 머틀의 아파트 파티에 참석하면서도 톰의 불륜이나 폭력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유보하며, 톰이 속한 계층에서 작업을 시작할 수 있게 톰의 조력을 기대하며, 기회주의적 침묵과 사회적 동조를 선택합니다. 이것은 사회적 윤리를 따르기보다는, 상류층의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사진 예술 작업을 확장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는 권력 앞에 침묵하고 동조함으로써 기회를 얻으려는 어떤 무기력한 예술가의 초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위대한 개츠비』의 진정한 공범은, 비도덕한 자들이 아니라 침묵하는 자들일 수 있습니다.
닉, 캐서린, 맥키는 모두 직접적으로는 부정한 행동을 하지 않지만, 그 세계의 질서를 묵인하고, 이해하며, 판단을 유보함으로써 도덕적 붕괴에 기여합니다. 이들은 공감이라는 감정과 합리화라는 사고를 통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와는 반대되는 현실에 조용히 순응합니다. 그들의 침묵은 단지 중립이 아니라, 도덕적 책임 회피를 위한 심리적 방어기제이며, 결과적으로 파멸의 공동 책임자가 되고 있습니다.



『위대한 개츠비』의 시대적 배경인 1920년대는 외형적 풍요와 쾌락에 집중했지만, 내면적으로는 깊은 허무와 소외를 동반했습니다. 이 시대는 겉으로는 화려하고 자유로웠지만, 그 이면에는 불안정한 가치관과 공허함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위대한 개츠비』는 바로 그 "화려한 허상 뒤의 공허와 부패"를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이 뉴욕 아파트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그 시대의 도덕적 붕괴, 계급에 따른 윤리의 이중잣대, 쾌락에 대한 집착,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는 상징적 무대입니다.


톰과 머틀의 불륜을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묵인하는 이유는, 그들이 속한 사회가 이미 도덕보다 계급, 쾌락, 권력을 우선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물은 그 시대의 병든 가치관의 일부로서, 무기력하거나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덕적 판단을 유보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누군가의 잘못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소설의 진짜 비극은 개츠비의 죽음이 아니라, 그 죽음을 방관한 ‘선한 자들’의 침묵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이 소설은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지금 이 시대 역시, 성공과 이미지, 자본과 욕망이 인간의 진실을 가리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하게 됩니다.



우리는 종종 권력자들의 비리를 공식 석상이나 제도 속에서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부패와 도덕적 붕괴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사적 공간'에서 은밀히 작동하지요.


오래전에 당시 정부의 고위 인사가 서울 모처의 민간 아파트에서 비공식적으로 지인들을 만나거나 대화를 나눈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며, 그 공간이 단순한 사생활의 장소가 아닌, 공적 책임을 피하는 회피의 장소로 기능했음이 드러난 보도가 있었습니다. 공적 책임을 지닌 자가 공공의 공간이 아닌 폐쇄된 아파트 공간에서 활동을 이어갔다는 점은 그 자체로 정보 은폐, 권력 사유화, 사적 친분 네트워크의 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이러한 방식은 기관의 투명성과 공적 감시를 무력화시키며, 공적 책임의 무게를 사적인 공간 뒤에 숨기는 전형적인 ‘권력자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톰의 맨해튼 아파트나 그 고위 인사의 아파트 모두, 사생활 보호가 아닌 책임 회피와 권력 은폐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비슷한 맥락을 지니고 있습니다.
공간은 중립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공간은 권력을 숨기거나 드러내는 정치적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권력자나 부유층들의 세컨드 '아파트' 속에서 어떤 일들이 은폐되고 있는지 또는 모의되고 있는지?
『위대한 개츠비』가 보여주는 1920년대의 위선과 지금 우리의 현실은, 단지 무대와 배경만 바뀌었을 뿐 도덕의 침묵이라는 본질은 닮아 있습니다.



"그들만의 방, 그들만의 아파트, 그들만의 영역."
도덕이 닿지 못하는 공간이 늘어날수록, 민주주의는 점점 더 그림자 속으로 물러서게 되지 않을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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