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by 윤재


어제는 에어컨을 켜지 않고 하루를 보냈습니다.

매미소리만 바람 따라 들려옵니다.

8월.

이 여름도 조금씩 거리 두기를 하는가 봅니다.

오늘 아침에 만난 시는 <각시투구>입니다.



화려한 꽃 모습을 자랑하는 각시투구꽃은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또는 “밤의 열림”이라는 꽃말을 가진 미나리아재비과의 한 종류입니다. 전투 중 화살에 맞아 전사한 장수가 투구꽃으로 다시 태어나, 그의 용맹함을 기리는 상징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꽃 모양이 마치 병사가 투구를 쓰고 있는 것 같아 ‘투구꽃’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각시"라는 접두어가 붙은 것은 꽃이 작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합니다. 투구꽃은 뿌리, 꽃잎, 잎 등이 독성이 강한 식물로 알려져 있으며, 영화나 소설 등에서 살인 사건의 소재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독성 때문에 죽음과 저주를 상징하는 꽃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마치 너무 뜨거운 여름 한낮처럼, 섣불리 안심하면 안 된다는 듯 가까이하기에는 조심스러운 꽃입니다. 식물의 독성은 생리 작용의 노폐물이 누적된 것으로 배설할 통로가 적절하지 않아 체내에 쌓인 형태라 하니, 우리가 잘 먹고 잘 배출하는 것, 스트레스를 쌓아두지 말고 잘 해결하는 것 등이 중요한 것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겠지요.




출처 경기문화관광신문.png

사진출처: 경기문화관광신문



영화 '조선 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에서 여주인공이 청보라색 투구꽃을 고깔처럼 쓰고 있는 포스터는, 그 강렬한 색감과 단호한 표정이 꽃의 기질을 닮아 인상적이었습니다.



영화 조선명탐정.png

사진출처: 씨네 21



이 꽃은 생존을 위한 흥미로운 독특한 전략을 사용하고 있는데, 해마다 뿌리를 옮기며 자란다고 합니다. 같은 자리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뿌리를 이동시키는 생존 전략. 마치 처음부터 유목민의 지혜를 설계도에 새겨 넣은 듯합니다.



각시투구


이신율리


내 속은 빨강이어서

독으로 향하는 첫 마음 같아서

오후의 궁리는 시작된다


독이 자란다면 구름은 알까

삶이 어긋나는 오기처럼 구름이 일까


자란다는 건 독을 키우는 일


독으로 자라는 잎사귀를 따라 여름이 흘러가거나

축제를 끝내기도 하고 나를 꺼내놓기도 하면서

여름이 여름의 둘레를 재는 동안

팔월은 사방을 허물어 쓰러지기도 하는데


잘 달인 비밀은 뜨거워야 하니까

아무도 모르는 여름을 훔쳐 활을 당긴다

내일에 대해 물으면 자막 없이 한 방향으로

전투적인 화살이 꽂히는 곳


오후의 숲이 붉게 부풀어 오른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암호

혼수상태 치명적인 팔월


만져지는 것은 모두 독의 결 같아서

자줏빛으로 투구꽃을 그리고 독하게

폭염이라고 말하는


팔월을 힘껏 던지자 얼어붙은 밤이 열렸다*


* ‘밤의 열림’은 각시투구꽃의 꽃말이다.

--이신율리, 『호수 빼기 참새』, 시인의 일요일, 2025년



이신율리 시인은 2019년 오장환신인문학상 수상과 202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을 통해 신예 시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등단 당시 심사를 맡았던 안도현 시인과 유성호 교수는 이신율리의 시가 “사람살이의 외관과 생태와 속성이 인생론적 깊이를 함축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수없는 ‘사이’에서 벌어지는 생의 파노라마가 환상성과 역동성을 함께 거느리면서 그림처럼 사진처럼 다가온 선물이자 이벤트였다.”(세계일보, 2022.1.1.)며 한껏 부푼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시인은 복잡한 감정선과 다층적 서사에도 능하다. 반어, 은유, 역설 등이 중첩되어 시적 의미를 깊게 구성한다. 그는 표면적인 이미지 너머에 숨겨진 복합적인 감정선을 드러내며, 독자가 시의 층위를 다양하게 해석하도록 열린 공간을 마련한다...(책 소개 글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는 모르는 것으로 가득하지만 우리는 또한 시를 통해 모르는 곳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세계이기도 하다. 이신율리 시인의 시집에서 가장 주목할 점이 있다면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세계 속에서 모르는 세계를 불쑥 끄집어내거나 우리가 모르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세계 속에서 이미 우리가 알고 있었으나 인식하지 못했던 세계를 또 불쑥 꺼내 든다는 것이다. 이때 발생하는 긴장감은 끊임없이 시인의 시 세계에 대해 집중하게 만들고 있으며, 시인이 재구성하고 새롭게 배치하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생각하지 못했던 세계를 만나는 희열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시를 쓰는 일이 이 세계의 단체성이나 획일성이 아닌 개인의 고유성을 향해 가는 작업이라는 것을 이신율리 시인의 시가 바라보는 방향을 보면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출판사 서평 중에서)



여름의 속살은 붉습니다.
그 붉음이 처음의 심장처럼, 아직은 다 아물지 못한 상처처럼, 안쪽 깊은 곳에서 서서히 독이 자라고 있습니다. 오후의 숲은 숨을 고르듯 팽창하고, 그 속에서 붉음도 함께 부풀어 오르고 있습니다.

독이 무르익으면 구름은 알까요.

우는 생처럼 흐려지는 구름, 그 흐림 속에서 잎사귀마다 여름이 스미고, 여름마다 또다시 독이 번지고 있습니다. 축제가 끝나고, 나를 꺼내는 순간에도 여름은 여름의 둘레를 돌고 있군요.


그런데 8월은 무너지고 있네요.


잘 알려진 비밀일수록 뜨거워야, 강렬해야 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여름을 훔쳐 활시위를 당기면, 자막 없는 방향으로 화살이 날아가는 것처럼.

어디에 박히든, 그것은 전투의 화살.

그 날카로움 앞에서 오후의 숲은 다시 붉게 부풀고, 낙하하는 한 방울의 비밀은 치명적입니다.

만져지는 모든 것은 독 같고, 그 독은 투구꽃의 맹렬함을 닮았습니다.


폭염이라 부르는 이 계절은....... 마침내 얼어붙은 밤을 열고 맙니다.

그 밤의 꽃, 야화(夜花)는 여름의 가장 깊은 심장, 붉고도 차가운 심장이 됩니다.


감각적인 새로운 시를, 또 그 시의 주인공 - 시인을 만나는 행복을 오늘 만끽했습니다. 시인은 수상소감에서

희망이 텅텅 비었던 정오의 숲에서 길을 잃고 나를 잃었던 시간들 쓸모없는 것에 관심이 많아 세계를 건너 너에게로 간다고 썼습니다. 우주가 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깨어나 또 다른 나를 찾아 젤리를 뿌리고 스티커를 붙여 내 안에 어떻게 나를 배치할까 궁리합니다”라는 시처럼 읽히는 소감을 밝혔습니다. 시인을 알기 전, 시의 언어로 그는 아주 젊은 시인일 거라 짐작했었습니다만, 시인은 1959년생입니다. 익숙하거나 관습적인 감각이 아닌 그의 신선한 감각이 부럽습니다.


이미지를 통한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의미 부여와 만남을 통해 어쩌면, 어쩌면 아주 조금, 제 학습의 폭이 깊어지는 순간입니다.


여름의 도심 속에서도 우리는 자주 뿌리를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머무르는 자리에 열기가 너무 쌓이면, 조금 비켜서서 숨을 고를 필요가 있듯이.

매미 소리와 바람을 들으며, 여름과 나 사이의 거리감을 조절하는 것.

그것이 이 계절을 건강하게 살아내는 방법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