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아무도"라 부른 사람.
고대 바다 위, 오디세우스는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 앞에서 스스로를 “우티스(utis, nobody)”라 불렀습니다.
그 한마디는 두려움이 아니라 전략이었지요.
오디세우스는 이 이름을 속임수로 사용해, 키클롭스가 동족에게 “아무도 나를 해치고 있지 않다”라고 외치게 만들어 도움을 받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티스(utis 고대 그리스어, nobody)”는 실제 이름이 아니라 전략적 가명이자, 생존을 위한 말장난이었습니다. 이름을 숨김으로써, 그는 적의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워냈던 거지요. 그 ‘아무도’는 사라짐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기술이었고, 오디세우스 그 자신을 지키는 단단한 방패였으며, 다시 이름을 되찾기 위한 은밀한 잠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 속, 한 여성이 조사 직전 흔들거리는 몸짓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나 같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이 말속에도 전략적 자기 방어가 숨어 있을까요
어쩌면 그녀의 ‘아무것도’는 돌아올 이름조차 잃어버린 슬픈 부메랑이 되지 않을까요
자기부정의 이 단어를 사용한 그녀의 ‘아무것도’를 들으며, 나는 오딜롱 르동의 그림 《Le Cyclope》를 떠올렸습니다.
오딜롱 르동, <키클롭스>, 1914, 크뢸러 뮐러 미술관 소장
그림 속 거대한 눈은 단순한 신체 일부가 아니라 인간 영혼의 창이며, 타인의 내면을 꿰뚫어 보려는 의지 또는 그 반대로 자신을 지키려는 방어기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푸른 언덕 너머, 거대한 외눈이 숨어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 눈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하지만, 어쩌면 세상으로부터 숨어 있는 건 그 눈 자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눈꺼풀 주변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어, 위협보다는 묘한 호기심을 자아냅니다. 멀리 언덕 아래에는 인어처럼 보이는 여성의 나신이 누워 있고, 그 모습은 마치 꿈속에서만 가능한 만남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회화의 색채는 르동 특유의 환상성과 모호함을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언덕의 녹색과 보라색조들은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으로 어우러져있고, 하늘의 색은 실제 하늘보다 더 따뜻하게 경계를 풀고 번져 있습니다.
그 강렬한 색의 대비 속에서, 거대한 눈은 존재감을 드러내면서도 언덕 뒤로 숨어 있습니다.
숨으면서 바라보고, 바라보면서 숨는 시선.
이 ‘시선의 양면성’은 오디세우스의 ‘아무도’와 여인의 ‘아무것도’를 동시에 닮았습니다.
‘아무도’의 눈은 언제든 다시 나설 준비를 한 채 세상을 응시하지만,
‘아무것도’의 눈은 이미 물러나 언덕 뒤에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숨는 것과 바라보는 것, 드러남과 부재가 뒤섞인 채,
그 눈은 오디세우스의 ‘아무도’처럼 기민하고,
여성의 ‘아무것도’처럼 음흉하기도 합니다.
르동의 키클롭스는 단순한 괴물 묘사라기보다는, 존재와 부재, 드러남과 은폐, 경계와 침범 사이를 오가는 인간 내면의 은유로 생각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 숨을 필요가 생깁니다.
그러나 그 숨김 속에 ‘나는 존재한다’는 믿음이 살아 있지 않다면,
그것은 방패가 아니라 굴레가 되겠지요.
그림 속 외눈박이 거대한 눈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지금 살아남기 위해 숨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사라진 채 바라보기만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