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일기

by 윤재

“육지를 떠난 고깃배들이 먼바다에서 집어등을 밝히고 있었다. 그 불빛이 언제까지고 이어졌다. 그녀는 전에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질리지도 않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막막한 어둠 속에서 수평선을 만드는 것은 그 불빛들이었다. 그게 없었다면 다만 어둠일 뿐인 공간을 수평선으로 나누는 것. 그녀는 그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압도적인 공간에게 내던져진 인간에게....... 그것은 참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황정은, <명실>,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2016 중에서



밤바다 한가운데서 저 멀리 불 밝힌 고깃배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늘에는 쏟아질 듯한 별들이, 때로는 어스름한 달무리가..... 아련하고 쓸쓸함이 그때 함께 했습니다.


황정은 작가의 소설 『아무도 아닌』 중에서 <명실> 속 장면은 고요한 묵시로 다가옵니다.

“그게 없었다면 다만 어둠일 뿐인 공간을 수평선으로 나누는 것” - 바로 이 문장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얼마나 많은 ‘어두움’ 위에 조용히 그어진 ‘빛’들을 잊고 사는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밤바다는 공간 그 자체로 존재의 깊이를 드러내곤 합니다. 말 없는 바다, 광막한 어둠, 그 가운데 놓인 작은 생명의 불빛들. 그것은 누군가의 삶의 흔적이자 현장입니다. 그것은 삶이 끝없이 어두워 보일지라도, 그 안을 나아가고 바라보게 하는 어떤 힘. 바로 그 힘이 문장의 깊은 곳에서 조용히 반짝이고 있습니다.

문장의 힘에 업혀, 조금 더 나가 보겠습니다.



황정은 작가는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 ‘올해의 문제소설’에 선정되고, '한국일보 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 굵직한 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문단의 큰 주목을 받아온 작가입니다. 그의 작품에 대해 “인간 삶에 도사리고 있는 유령적 순간을 날카롭게 묘파 하는 황정은 소설의 압도적인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거나 “마치 어떤 맹수가 먹잇감을 점찍고 한참을 노려보다가 단 한 번의 돌진으로 대상을 정확히 가격하여 쓰러뜨리듯이, 쓴다.”든가 “오늘날 우리의 젊은 세대를 관통하는 어떤 사회 역사적인 그늘에 몸을 담그고 나온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가히 황정은 스타일이라고 부를 만한 경지다.”라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정제된 문장과 깊은 감각으로 우리 시대를 응시해 온 소설가‘라는 소개를 받고 있는 황정은 작가가 ’ 계엄과 탄핵, 슬픔과 분노, 다정함과 고마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에게 필요한 문장‘이란 소리를 들으며 작고 단단한 기록들을 출간하였습니다.

『작은 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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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말합니다.

“분노하는 마음으로는

내게 미운 이들과 동행하기 어렵지만

슬픔으로는 함께 할 수 있지.

슬픔으로 세상 보기. 단념하지 말고”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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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는 12월 3일 자를 가리키며 시작합니다.

“..... 번역서 두 권을 주문하는 김에 귤을 샀다. 지난달에 백두대간수목원을 방문하고 들은 이야기도 곧 원고로 정리해야 한다. 오늘은 원고지 다섯 매를 썼는데 밤에 한번 더 보면서 다듬고 싶다.


오후 열 시 이십 삽분


계엄. ”... p. 10



“그 추운 밤을 그 자리에서 보낸 사람들도 놀랍고, 그들에게 난방 버스며 음식이며, 바람 넘는 고개에서 버티는 데 도움이 되는 물품들을 즉시 보낸 사람들도 놀랍다. 그건 나라에서 받은 것이 없어도 위기가 닥치면 들불같이 일어난다는 어느 민족의 성격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남의 곤경과 고립을 모르는 척 내버려 두거나 차마 두고 갈 수는 없는 마음들 아닐까. 남의 고통을 돌아보고, 서로 돌볼 줄 아는 마음들.”.... p.58



“누가 그랬나. 케이팝과 응원봉의 물결을 보며 축제 같다고. 그런 면도 물론 있지만 이 집회의 가장 깊은 근원을 나는 그 순간에 본 것 같았다. 슬픔. 저마다 지닌 것 중에 가장 빛나는 것을 가지고 나간다는 그 자리에 내가 바로 그것을 쥐고 나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무사를 바라며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그 자리에 남아 밤샘 집회를 하고 있다.
눈 내린다.
파주에도 서울에도.”... p.85



“이름들을 기록해두고 싶다.
윤석열, 한덕수, 최상목, 심우정, 이제 지귀연.”... p.114-115


“오늘은 투표로 그를 대통령 자리에 올리고도 주말마다 레저를 즐기고 스포츠를 관람하러 간다는 어느 부부를 속으로 원망했다.
너희가 만든 세상,
죽은 사람들,
그들을 생각해서라도
거리로 나가.
밤이라도 새워.
감기에라도 걸려.
양심이 있으면 그렇게라도 병들어.

이런 생각을 하느라 종일 비참했다.”... p.155-156



“12월부터 4월까지의 일기를 원고로 내보낼 준비를 하며 다시 보니 그간 그 선이 조금씩 오른쪽으로 이동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걸 생각할 여력이 없다는 이유로 계엄과 탄핵, 그것 말고 다른 것은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김보리는 이게 보였다는 것 자체가 지금은 좀 여유를 회복했다는 의미일 거라고 했다. 이렇게 되기까지 잘 싸워준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라고. 우리의 마지노선, 그것은 오른쪽으로 간 것이 아니고 아래로 내려간 것이라고.
그렇지, 그렇지, 하면서도 그래도, 그래도, 하고 자꾸 말을 덧붙였다.”... p.184-185



작가는 말합니다.

“가능성만을 바랄 수 있을 뿐인 세계는 얼마나 울적한가.

희망을 가지고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가 너무나 어려운 세계, 그 어려움이 기본인

세계는 얼마나 낡아빠진 세계인가.

너무 낡아서, 자기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세계.

다만 이어질 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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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과 봄, 늦봄에서 초여름 동안 불안과 분노와 두려움의 시간을 경험했던 분들께 『작은 일기』를 권합니다. 누군가의 기록과 문장으로 그 시간들이 위로받기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