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 『수런거리는 뒤란』, 창작과 비평사, 2000
출간하는 시집마다 독자의 관심과 사랑, 평단의 관심을 받은 시인 문태준(1970~) 은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으며, 고려대 국문과와 동국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습니다.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처서處暑』 외 9편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자미』를 포함하여 많은 시집과 시 해설집을 출간하였습니다.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미당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 애지문학상, 목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두루 수상했습니다.
시집이며 제목인 <수런거리는 뒤란>에서는,
... (하략) ”라는 서정의 세계가 익숙해서, 순박하고 친근합니다. 그는 서정을 얘기하면서도 관계에 주목한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날이 어두워져 컴컴해지는데도 아직 돌아오지 않는 부모님을 기다리면서, 기다림 때문에 눈과 귀가 발달된 것 같다고 시인은 말했습니다. 시 ‘처서’는 그의 등단작인데, 시골 고향집에 머무르며 가을을 맞은 때의 소회를 적은 시인데, 요즘도 처서 즈음에는 지인들로부터 안부 전화를 많이 받게 된다고 시인은 후일담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풍경과 시간이 조합되어 있는 시 <처서>를 읽으면 마음 한편이 고요해집니다. 울타리 밑 그늘을 파는 개나, 양철로 덮어둔 고추 같은 장면들은 어쩌면 너무도 소박해서 시가 될 것 같지 않은 지나간 옛 풍경들인데도 그 사소한 풍경들이 모여 어느새 시인에게도, 내 안에도 가을빛을 드리웁니다. 단순한 농촌의 풍경 같지만, 그 속에는 이미 계절이 깊어져 가고 있다는 기척이 스며 있습니다. 가을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늘어나듯 조금씩 다가오는 것임을 시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태준 시인의 「처서」를 읽다 보면, 눈앞에 한 장의 그림이 펼쳐집니다. 울타리 밑 그늘을 파는 개, 양철로 덮어둔 고추, 바람에 흔들리는 갈빛 옥수수, 그리고 달빛에 서늘히 식어가는 집. 마치 오래된 농촌 마을의 풍광을 그린 수묵화나, 따뜻한 색감의 수채화 한 폭 같습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보았으나 지금은 보기 힘든 풍광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마저 들게 합니다. 시 속에는 화려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계절의 숨결이 묻어납니다. 처서가 지나면 들녘은 마지막 숙성을 위한 과업으로 바빠집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거두는 일들이 남아 있습니다. 처서에 이은 시간의 관계성을 생각하니 단원 김홍도의 그림 하나가 연결됩니다.
김홍도(金弘道, 단원, 1745~1806)는 조선 정조 시대 문예 부흥기의 대표적 화가로, 풍속화뿐 아니라 자연 풍경을 담은 산수화와 농촌의 계절적 장면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김홍도, <벼타작>,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의 그림 <벼타작>은 단원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로, 《단원 풍속도첩》에 수록된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그림은 벼를 털어 알곡을 거두는 농민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당시 서민들의 삶을 해학적인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특히 벼를 타작하는 농민들과 그 옆에서 곰방대를 물고 쉬고 있는 양반의 모습을 한 장면에 담아 신분 또는 계급 간의 관계를 보여주지만, 격렬한 대립보다는 김홍도 특유의 중용적인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주변 배경을 생략하고 인물의 동작과 자세에 집중하여 인물을 부각한 그림을 들여다보자면, 온정적이면서도 예리한 시선으로 인간과 삶을 묘사한 것이 보입니다. 김홍도는 인물들의 동세를 정밀하게 관찰하고, 그들을 이해하며, 일과 관계를 담담한 정서로 표현했습니다. 곰방대를 물고 있는 갓 쓴 인물은 의관을 갖추고 다리를 꼬고 기대어 앉아 일꾼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의 곁에는 술병과 술잔도 보입니다. 그는 올 한 해의 풍작을 예상하는듯한 한가한 그의 시선이 마주하고 있는 곳에는 고된 노동의 강도를 보여 주듯 웃통을 벗거나, 웃옷을 풀어헤친 채 일꾼들이 볏단을 치대고 있습니다. 거친 노동으로 땀이 흘러내릴 것만 같고, 리드미컬한 벼타작의 소리와 흩어진 낱알들을 모으는 비질 소리가 들리는 것 같군요. 고된 노동의 힘듦을 경감시키려는 노동요마저 들리는 듯합니다. 색채는 거의 들어가 있지 않지만, 그림은 역동적입니다. 인물됨이 신선과 같아서 ‘화선(畵仙)’이라고 불리고, 또 나라 안의 으뜸가는 화가라는 뜻으로 ‘국화(國畵)’라고도 불렸던, 요즘 시대로 하자면 국민화가라는 뜻으로 평가되는 김홍도는 그림뿐만 아니라 시서화악에 두루 걸친 재능과 교양을 갖추고 있어서 인품과 실력이 작품의 품격을 더욱 높였습니다.
처서는 24 절기 중 14번째 절기로,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더위가 그친다(處暑)'는 뜻입니다. 예전에는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삐뚤어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처서 이후에는 귀신같이 더위가 가시고 선선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일컬어 마법, 마술을 뜻하는 영단어 ‘Magic’과 합성하여 이른바 ‘처서 매직 magic’이라고도 칭했지만, 지금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실종된 처서 매직을 찾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올여름의 더위는 물러갈 줄 모르고 강경합니다만, 달빛이 차갑게 식어가고, 이름 모를 벌레 소리가 별빛처럼 시끄럽게 들려오는 순간이 다가오겠지요. 그때가 되면 풍성한 가을의 결실 속에서 제 쓸쓸함도 함께 뒤섞이지 않을는지요.
시인의 담담한 시어들이, 계절은 늘 흘러가고, 그 속에서 우리의 삶도 흘러가지만, 사소한 풍경 하나하나가 결국은 나를 살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시간 속에서 드러나는 풍경이 어떻게 삶의 감각으로 이어질지 이번 가을이 궁금해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