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자리에는 늘 작은 빛이 먼저 와서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바 알머슨(에바 아미센, Eva Armisen), 산책 (사진: 소울 아트 스페이스 전시회 중에서)
작고 하얀 강아지를 오른손 안에 품고 걷는 그녀의 빨간 구두가 경쾌하게 다가옵니다.
화려하게 웃지도 않고, 그렇다고 특별히 근심을 드러내지도 않는 얼굴.
그 담백한 표정은 마치 “살다 보면 별일 다 있지만, 그래도 가볍게 걸어두는 게 좋아”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삶은 늘 벼랑 끝을 오가면서도, 중간중간 괜찮은 풍경을 슬쩍 보여주어 사람을 붙잡아놓는다고. 걷는다는 건, 그 잠깐의 괜찮음에 마음을 기대 보는 일이라고.”말하는 듯합니다.
붉은색 꽃이 피어난 원피스를 입은 여인은, 가벼운 걸음으로 길을 나서고 있습니다. 바람은 그 원피스의 끝자락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고, 강아지들은 그 바람이 마치 자기들을 위한 인사라도 되는 듯 고개를 살짝 들고 주위를 바라봅니다.
사람들은 흔히 에바 알머슨의 그림을 떠올리면 ‘행복’을 먼저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 행복은 번쩍거리는 기쁨이 아니라, 속삭이듯 은근한 따뜻함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여인의 얼굴도 그렇지요. 활짝 웃지도, 딱히 무표정하지도 않은 그 사이.
삶의 소소한 기쁨이 마음 한쪽에서 은근히 피어오를 때 나오는 표정.
그래서 문득 궁금해집니다.
지금 이 여인은 걸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단순하게 보이는 선으로 형태를 제시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부터 금방이라도 말 걸어올 것 같은 친근함이 있습니다. 마치 어린 아동들이 그린 것 같아 가볍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단순함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덜어낸 것으로 보입니다. 복잡한 감정을 억지로 구획하려 하지 않고, 마음이 자연히 흘러갈 자리를 남겨두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그림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숨을 한 번 고르게 됩니다.
그림 속 여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행복이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그냥 오늘 조금은 괜찮은 걸음을 내딛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행복을 추구하며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중 한 가지는 행복하려면 행복한 사람들 곁에 가라는 것도 있지요.
행복한 그림들을 보러 부산에서 전시 중이었던 에바 알머슨의 전시회에 갔었습니다.
(전시 안내 포스터)
심리학에서 긍정심리를 제안한 학자가 있습니다.
마틴 셀리그먼(Martin E.P. Seligman)은 1942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심리학자로, 오늘날 ‘긍정심리학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과 철학, 과학에 두루 관심을 보였으며, 이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의 학문적 기반은 전통적인 심리학 연구에서 출발했지만, 점차 인간의 강점과 가능성에 주목하는 방향으로 옮겨갔지요.
셀리그먼은 초기 연구에서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 이론을 제시해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이론은 반복되는 통제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개인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게 되는 현상을 설명하며, 우울증 이해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왜 인간의 고통만 연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이를 계기로 인간의 행복과 회복탄력성을 탐구하는 새로운 영역에 뛰어들었습니다. 그의 연구와 주장은 심리학의 초점을 병리와 결핍 중심에서 벗어나, 인간의 강점·미덕·행복·삶의 의미에 대한 과학적 연구로 확장시키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에바 알머슨(Eva Armisen, 1969~ )은 어린아이 같은 감성으로 유명한 스페인 예술가로, 보는 이들을 매료시키는 매력을 끊임없이 발산합니다. 그녀의 작품은 가족, 사랑, 그리고 함께하는 공존을 주제로 하며, 일상 속 소소한 순간들을 섬세하게 묘사합니다. 에바 알머슨의 작품 속 인물들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일상을 살아가며, 삶의 소소하고 소박한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는 기쁨을 일깨워줍니다.
에바 알머슨의 예술적 비전은 평범한 것을 고양시키고, 일상의 리듬 속에서 비범함을 드러내며, 감정과 깊이로 고동치는 세상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상쾌한 낙관주의를 불어넣습니다.
사진 출처: 에바 알머슨 홈 페이지
“그의 작품은 일상생활과 일상을 특별한 무언가로 묘사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감정으로 가득 찬 살기 좋은 세상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생동감 넘치고 낙관적인 관점을 제시합니다. 회화와 판화가 이 작가의 가장 흔한 매체이지만, 그녀의 작품이 지닌 독창성과 전달력 덕분에 알머슨은 공공 미술 설치, 광고 캠페인, 영화 및 텔레비전, 출판 프로젝트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 협업하게 되었습니다. 2016년에는 해녀(제주도의 여성 해녀)의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후보로 협력했고, 2017년 6월에는 이 여성들의 놀라운 이야기를 담은 책 ‘엄마는 해녀다’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 (에바 알머슨 홈페이지에서 인용)
알머슨의 <가족, family>, <함께, together>, <사랑>, <행복> 등은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가족이 서로를 감싸며 서 있는 모습은, 어딘가 투박하면서도 믿음직스럽습니다.
그림 속 인물들은 과장된 표정 하나 없이, 서로의 온기를 당연하다는 듯 나누고 있지요.
셀리그먼이 말한 행복의 구성 요소 중 ‘관계(relationships)’는 그 자체로 강력한 지지대가 되는 것이지요.
셀리그먼의 연구가 가르쳐 주는 것은, 행복이란 기다림의 결과가 아니라 연습의 흔적이라는 것입니다.
알머슨의 그림을 오래 바라보다 보면, 그 말이 어느새 실감으로 다가옵니다.
걷는 순간의 가벼움, 이유 없는 미소, 꺼지지 않는 가족의 등불.
이런 평범한 장면들이 하나 둘 쌓여 마음의 결을 바꾸고, 삶의 방향을 조금씩 밝은 쪽으로 틀어놓게 됩니다.
아마도 그림 속 인물들은
“행복이란 건 별게 아니다.
살다 보면 불쑥 찾아오는 작은 불빛 같아서,
그걸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마음이 중요하다.”라고 말하고,
그리고 셀리그먼은 거기에 덧붙였을 것입니다.
“그 마음을 자꾸 써보는 것, 그것이 바로 긍정심리학입니다.”라고.
결국 행복은 멀리서 온 손님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서 조용히 빛을 내고 있었던 작은 등불인 것이지요.
우리는 다만 그 불빛을 알아볼 틈을 때때로 놓치고 있었을 뿐.
두 사람의 세계는 멀리 떨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같은 자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것 같습니다. 셀리그먼은 인간 내면에 대한 과학적 탐구로 행복의 구조를 밝혀내고, 알머슨은 그 구조가 일상 속에서 어떻게 빛나는지를 따뜻한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언어로, 한 사람은 색으로, 행복이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순간들 속에서 천천히 자라나는 경험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문득, 셀리그먼의 PERMA 모델(긍정정서(Positive Emotion), 몰입(Engagement), 관계(Relationships), 의미(Meaning), 성취(Accomplishment)라는 5가지 요소로 행복의 구조를 설명하는 모델)이 알머슨의 그림 속 장면들을 생각나게 할 때가 있습니다.
밝은 색감 속 인물들의 표정은 긍정정서를,
몰입한 산책과 포옹은 삶의 참여를,
서로 기대어 웃는 얼굴들은 관계의 힘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이 결국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는 의미와 성취의 작은 씨앗으로 이어집니다.
나는 종종, 행복이란 거창한 계획을 세우거나 먼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잠시 들여다보고 ‘잘 지내고 있니?’라고 묻는 온순한 관심에서 시작된다고 느낍니다.
마치 알머슨의 그림 한 장이 방 안의 공기를 조금 따뜻하게 바꾸듯, 셀리그먼의 문장은 마음의 방향을 살짝 바로잡아 줍니다.
행복은 결국 우리가 스스로에게 건네는 작은 연습입니다.
눈앞의 풍경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고, 옆 사람의 미소를 한 번 더 기억하고, 내 안의 밝은 부분을 조용히 흔들어 깨우는 일.
그 소박한 연습이 쌓여 마음이 제 모양을 찾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알게 됩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서 조용히 빛을 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산 소울 아트 스페이스에서 전시된 ‘Inner Landscapes’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림 속에서 아름다움과 행복을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산책도 경쾌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