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쪽이 진실이다

by 윤재


“조사와 재판 속에 드러나는 음모의 일부, 그 불완전한 파편 뒤에는 어떤 진실이 숨어 있을까요?”


미셸 트루니에는 <뒤쪽이 진실이다>라고 그의 글에서 답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사람은 자신의 얼굴 모습을 꾸며 표정을 짓고

양손을 움직여 손짓을 하고

몸짓과 발걸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그 모든 것이 다 정면에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그 이면은?

뒤쪽은? 등 뒤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너그럽고 솔직하고 용기 있는 한 사람이 내게로

오는 것을 보고 난 뒤에 그가

돌아서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것이 겉모습에

불과했음을 얼마나 여러 번

깨달았던가, 돌아선 그의 등이

그의 인색함, 이중성, 비열함을

역력히 말해주고 있었으니!

--미셸 트루니에, <뒷모습>, 현대문학, 2020 중에서



유난히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그린 화가들이 있습니다.

팀 아이텔(Tim Eitel, 1971- )의 그림 속 여인도 그러합니다.



팀 아이텔 산 2018 개인소장.png

팀 아이텔, 산, 2018, 개인 소장



산 앞에 서면, 나는 늘 숨을 고르게 됩니다.

요즘은 무릎 때문에 예전처럼 산을 오를 수 없지요.

대신 아래 평탄한 무장애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산의 기세와 숨결을 한 걸음 한 걸음 느끼곤 합니다.



그림 속 그녀는 우리를 보지 않고 있습니다.
등 뒤로 전해지는 긴장과 온기,
약간 뒤틀린 비스듬한 자세로 무릎을 구부려 겹쳐 앉은 자세와 어깨선,
그리고 그 앞으로 높낮이가 다른 산등성이를 이어 연결되는 도로들.


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녀와 나 사이, 그리고 내 마음속 풍경을 잇는 다리가 됩니다.


미셸 트루니에(Michel Tournier, 1924-2016)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대부분 제한적입니다.
그러나 등 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음과 존재는 깊게, 조용히 움직입니다.
팀 아이텔의 여인은 산을 바라보며 침묵 속 사유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뒷모습에서 나는 인간 존재의 고요와 긴장, 그리고 내면의 울림을 느끼게 됩니다.

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녀의 시선과 마음을 담는 거대한 그릇이 됩니다.


팀 아이텔의 색채는 차분하면서도 은밀합니다.

그의 그림은 공간, 빛, 그리고 시간성에 대한 인식을 꾸준히 탐구하며, 이러한 요소들을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합니다. 아이텔의 그림은 어떤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습니다. 대신, 공간 속 인물들의 배치, 건축적 환경에서의 빛의 감소, 그리고 색채들 간의 관계로 정의되는, 이전과 이후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을 제시합니다. 독일 출신의 팀 아이텔은 "회화는 항상 인위적이고 연출된 것이며, 순수한 사실주의라는 것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미셀 트루니에의 ”뒤쪽이 진실이다 “는 글을 읽으면서 팀 아이텔의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그의 그림으로 다시 들어가 보겠습니다.

산의 짙푸른 그림자와 하늘의 연한 청색이 어우러지며, 화면 전체에 미묘한 긴장감과 생동감을 만들고 있습니다. 여인의 등 뒤에서 비치는 햇빛은 곧 사라질 듯 부드럽게 번지고, 그 사이에 숨겨진 공간을 찾게 됩니다. 이 그림 속 공간은 물리적인 거리만이 아니라, 내면과 외면, 드러나는 것과 숨겨진 것 사이의 거리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미셸 트루니에가 말한 ‘뒤쪽이 진실이다’라는 문장처럼.

우리가 직접 마주 보지 않는, 그러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곳, 그곳에서도 삶의 본질이 드러나는 것처럼.


여인의 뒷모습은 관람자를 향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보는 이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림 안으로 끌어들이는 초대로 보입니다. 팀 아이텔의 그림은 침묵 속의 대화를 권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 내면과 외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미세한 울림을 감지하라고.



반면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으로 불리는 유영국(1916-2002)의 산은 인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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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국, 산, 1973 (사진 출처: 유영국 문화재단)



그에게 있어 '산'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그의 삶과 기억, 자연과 존재에 대한 사유가 깃든 상징이라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강렬한 원색과 단순한 형태, 면과 선의 대비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붉고 푸른색의 층위가 산의 리듬과 기세를 만들고 있습니다.
눈앞에 인물은 없지만, 산의 힘과 생명은 직접적으로 온전히 전달됩니다.

그래서일까요?

강렬한 원색과 그래픽 한 구성, 면과 색채의 대비를 통해 산의 기세, 자연의 장엄함, 내면의 리듬을 표현한

유영국은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라고 했습니다.



팀 아이텔의 산이 인간을 매개로 마음을 읽게 한다면,
유영국의 산은 그 자체로 존재하며, 내 마음을 산 위로 올려놓고 있습니다.

팀 아이텔과 유영국의 산을 나란히 놓고 바라보면, 감각의 차이가 명확히 드러난다고 할까요.
한쪽은 구체적 인간과 함께, 등 뒤에서 말 없는 사유를 건네고, 다른 한쪽은 순수한 산과 색채만으로 존재와 내면의 울림을 전합니다.


둘 다 산을 단순한 풍경으로 보지 않고,
인간과 존재, 내면과 자연을 비추는 거울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입니다.

인간의 존재와 삶의 진실은 언제나 눈앞에만 있지 않습니다.

앞이 아닌 안, 그리고 뒤에.


때로 소위 ‘보이지 않는 그 안의 무리들’이 상황과 사건을 조작하고 꾸며 내기도 합니다.

그림 속 산은 멀리 있지만, 마음속 산은 가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산 앞에서 우리는, 여인의 등처럼, 침묵 속에서 자기 자신과 세상을 온전히 느끼며 '지금 여기'를

알아차리게 된다면 우리들 자신과 주변이 조금은 더 평안해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