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리어왕』은 왕의 몰락을 다룬 비극이지만, 그 중심에는 두 노인이 있습니다. 왕이었던 리어와 귀족이었던 글로스터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았으나, 놀랍도록 닮은 방식으로 무너집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은 단순한 가족 갈등을 넘어, 권력과 상속,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날카롭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수백 년 전 영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상속 분쟁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어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리어왕은 자신의 왕국을 세 딸에게 나누어 주면서, 누가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지 말로 증명하라고 요구합니다. 이 장면은 현대 사회에서 부모가 재산을 나누어 주며 자녀의 효도나 감정 표현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모습과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부모의 재산을 둘러싸고 자녀들이 경쟁하듯 효도를 과시하거나, 반대로 부모의 기대에 맞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상속에서 배제되는 사례가 종종 발생합니다.
셰익스피어가 주로 활동한 시기는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의 재위 시기로 영국이 세계제국으로 도약하던 전환기였습니다. 이 시기 영국은 겉으로는 안정되어 보였지만, 실제로는 왕위 계승 문제, 귀족 세력 간의 갈등, 반역과 음모에 대한 공포가 끊임없이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맥베스』, 『햄릿』, 『리어왕』처럼 왕의 몰락, 정통성 없는 권력, 반역과 암살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성서와 고전을 중심으로 읽기와 쓰기를 배웠던 세익스피어는 언어의 창조자로 불리며 풍부한 영어 표현력의 기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리어왕』이 작품을 읽으며 나는 이 두 인물 리어왕과 글로스터 백작이 단순한 주연과 조연의 관계가 아니라, 셰익스피어가 인간 인식의 실패를 두 방향에서 보여주기 위해 나란히 세운 거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리어왕의 비극은 사랑을 잘못 이해한 데서 시작되지요. 그는 세 딸에게 사랑을 말로 증명하라고 요구하며, 사랑을 수량화하고 비교 가능한 것으로 만듭니다. 이때 리어가 진정으로 보고 싶었던 것은 딸들의 마음이 아니라, 자신이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는 왕이라는 지위를 내려놓으면서도, 아버지로서의 권위와 감정적 소유권은 그대로 유지하려 했던 이 모순 속에서 리어는 말에 취했고, 침묵 속의 진실을 읽지 못했습니다.
책 속으로 잠깐 들어가 보겠습니다.
리어왕: 딸들아, 말해다오. 나는 지금 국가의 주권도, 국토의 영유권도, 정무(政務)의 번거로움도 모두 버리려 하는 만큼, 너희들 중에서 대체 누가 제일 나를 사랑하는지 말해보지 않겠나? 효심이 지극한 사람에게 나는 가장 큰 재산을 주게 될 것이다. (애정을 계량화합니다)
장녀 고너릴과 차녀 리건은 아첨하며 사랑을 과장합니다.
고너릴: 저는 말로는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버님을 사랑합니다.
눈보다도, 운동의 자유보다도, 행동의 자유보다도 더 사랑하옵고, 값이 비싸거나 진귀해서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그 무엇보다도 더 사랑하옵고, 미덕과 건강과 미와 명예를 겸비한 생명보다도 더 사랑하옵고,
자식이 아비에게 바친 최대의 사랑, 또 아버지가 받은 최대의 사랑을 가지고 사랑하옵고, 숨을 모자라게
하고, 말을 침묵시키는 그러한 사랑으로 사랑하옵고,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그 전부 이상으로 사랑하
옵니다....p.12-13
리건: 저도 언니와 지금(地金)이 같사옵니다. 그러하오니 언니와 같은 갑을 매겨주시옵소서.
언니는 아버님에 대한 저의 사랑을 빈틈없이 그대로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그것으로는 아직 표현이 부족하옵니다.
제가 감히 말씀드린다면 가장 귀한 감각이 가질 수 있는 기쁨이라 할지라도 효행 이외의 기쁨은
모두 저의 적이옵니다.
저는 아버님에 대한 효행을 다하는 일만을 최대의 행복으로 느끼고 있사옵니다....p.14-15
막내 딸 코델리어는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솔직하게 표현하여 화를 돋웁니다.
코델리어: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버님.
슬프게도 저는 저의 마음을 입에 올려 말할 줄 모릅니다.
저는 아버님을 자식된 도리에 의해서 사랑하올 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옵니다.
아버님, 아버님께서는 저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시고 사랑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딸된 도리에 맞게 저는 그 은혜에 보답하려고 아버님께 복종하고, 아버님을 사랑하고,
가장 아버님을 존경합니다.
언니들은 오직 아버님만을 사랑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왜 언니들은 결혼을 했을까요?
아마 제가 결혼한다면 그 손에 저의 맹세를 받으실 분이, 저의 사랑의 절반을, 저의 걱정과 책무의
절반을 가져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니들처럼 결혼을 하면 아버님만을 사랑할 수는 없사옵니다...p.16-17
글로스터 역시 비슷한 오류를 범하지요.
글로스터의 비극은 시각(seeing)과 인식(knowing)의 분리를 보여줍니다. 그는 에드먼드의 말과 위조된 편지를 “보았고”, 에드가의 진실된 침묵과 행동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들들의 관계를 혈통과 문서, 외형적인 증거로 판단합니다. 서자인 에드먼드가 모략을 위해 위조한 편지를 보고 즉시 분노하며, 진실된 아들 에드가의 침묵을 의심으로 받아들입니다.
글로스터: “오, 악한, 악한! 이 편지의 내용과 다름이 없구나! 가증스런 악한!
무도하고 잔혹한 악한! 짐승만도 못한 놈이다!
얘, 그놈을 찾아내라. 그놈을 잡아야겠다. 가증스런 악한!
그놈이 어디 있니?”.......p.38
글로스터는 “본 것”을 “안 것”으로 착각했고, 판단하기 전에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미 인식의 차원에서는 눈먼 인간이었습니다.
리어왕이 폭풍 속에서 광기에 가까운 상태로 방황하는 장면은 이 작품의 철학적 정점입니다.
리어왕: "내 마음에 불어닥치는 이 폭풍우는 나의 오감에서 모든 감각을 탈취해버리고, 남는 것은 오직
여기서 격렬히 울리는 마음의 고통뿐이다. 배은망덕한 불효자 놈!" ...p.148
"입을 옷도 없는 가엾은 사람들아, 너희가 어디 있든지 이 무정한 폭풍우를 맞으면서 의지할 곳
없이 견디고 있겠지.
머리에는 덮을 것도 없고, 먹을 것도 없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구멍투성이인 누더기를 걸친
사람들아, 어떻게 이러한 폭풍우의 밤을 견디려는가?
아, 나는 지금까지 너무도 그런 일을 모르고 지냈다.
영화를 누리는 자들이여, 이것을 약으로 삼아라.
불행한 사람들의 처지를 스스로 느낄 수 있게, 네 자신이 이 비바람을 맞아봐라.
그러면 너희도 남은 것을 그들에게 나누어주고, 하늘의 정의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p.150-151
이때 리어는 더 이상 왕이 아니라, 고통받는 한 인간으로서 처음으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합니다. 그는 비로소 가난한 자와 버림받은 자를 떠올리며, 자신이 권력의 보호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현실을 외면해 왔는지를 깨닫습니다. 이 깨달음은 너무 늦게 찾아온 진실이지만, 셰익스피어는 이를 통해 인간의 성숙이 종종 파멸과 함께 온다는 냉혹한 진실을 보여줍니다.
리어는 왕권을 잃고, 글로스터는 눈을 잃는 상실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 상실은 단순한 처벌이 아닙니다. 셰익스피어는 이 잔혹한 과정을 통해 인간이 무엇을 잃어야 비로소 자신을 보게 되는지를 묻는 것은 아닐까요. 리어는 광기 속에서 가난한 자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고, 글로스터는 실명 후에야 진정한 아들이 누구였는지를 깨닫게 되는, 두 사람 모두 보호막이 사라진 뒤에야 인간이 되는 것이지요.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은, 이 깨달음이 결코 구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리어는 코딜리어와 화해하지만 그녀를 잃고, 글로스터는 진실을 알지만 다시는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
리어왕: “개나 말이나 쥐 같은 것도 생명이 있는데, 너는 왜 숨이 없느냐?
너는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결코, 결코, 결코, 결코, 결코!
제발 이 단추를 좀 풀러다오, 고맙다.
이게 보이니?
이 애를 봐라.
이 애 입술을, 이봐, 이봐” .....p.278
코딜리어는 죽고, 리어도 죽지만,
글로스터는 상대적으로 길게 살아남습니다.
이는 의미심장합니다.
셰익스피어는 “깨달은 자에게는 고통스러운 삶이 남는다”는 잔인한 진실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요.
그의 생존은 구원이 아니라 깨달음의 대가입니다.
셰익스피어는 깨달음을 보상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인간에게 묻습니다.
“너는 언제 진실을 보려 하는가, 그리고 그때는 이미 너무 늦지 않은가.”
이 지점에서 『리어왕』은 단순한 도덕극을 넘어섭니다. 리어와 글로스터는 악인이 아니었고, 의도적으로 타인을 해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만 자기 확신에 취해 있었고, 판단을 성찰보다 앞세웠습니다. 이 점에서 그들은 특별한 인물이 아니라, 누구나 될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리어왕』이 특히 비극적인 이유는, 진실을 말한 인물들이 모두 고통받는다는 점입니다. 코딜리어는 정직했기 때문에 추방당했고, 끝내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는 셰익스피어가 살던 시대, 즉 정치적 발언과 진실이 쉽게 억압되던 사회의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이는 인간 사회가 얼마나 거짓에 관대하고 진실에 잔인한지를 고발하는 장면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다른 비극들과 마찬가지로, 『리어왕』은 명확한 구원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간은 권력과 감정에 취해 있을 때 가장 쉽게 판단을 그르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말로 증명될 수 없고, 권위는 인간을 보호하지 않으며, 진실은 언제나 조용하다는 점을 이 작품은 집요하게 반복합니다.
결국 『리어왕』은 한 왕의 몰락기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과신할 때 어떻게 무너지는가에 대한 철학적 기록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시대를 살아낸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인간을 관찰한 작가로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으로 타인의 마음을 판단하고 있는가?”
이 질문이 여전히 유효한 한, 『리어왕』은 과거의 고전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작품으로 남습니다.
이 작품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읽혀야 하는 이유는, 리어와 글로스터가 여전히 우리 곁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바로 우리 자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을 덮으며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았습니다.
나는 누구의 말을 믿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나는 혹시 아직 잃지 않았다는 이유로, 너무 많은 것을 당연하게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리어와 글로스터의 비극은 “권력을 가진 노인의 몰락”이 아니라, 성찰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종착지에 대한 경고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쉽게 판단하지만, 늦게 이해하고, 너무 늦게 깨닫곤 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은 말없이 사라집니다.
문학과 그림을 자연스럽게 이었던 화가들이 있는데,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어왕』첫 장면을 묘사한 에드윈 오스틴 애비의 리어왕 그림을 살펴보겠습니다.
에드윈 오스틴 애비, <리어왕 1막 1장>, 1898,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에드윈 오스틴 애비(Edwin Austin Abbey, 1852-1911)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다재다능한 삽화가, 화가, 벽화 작가로 문학적, 역사적 장면을 그린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1878년 자료 수집과 작품 활동을 위해 영국으로 건너갔고, 이후 대부분의 삶을 영국 런던에서 보냈습니다.
에드윈 오스틴 애비의 <리어왕 1막 1장>은 침묵과 움직임 사이의 순간, 리어가 코델리어를 배척하고 퇴장하는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화폭의 중심에는 흰옷을 입은 코델리어가 있습니다. 그녀는 언니들을 향해 살짝 고개를 돌리고 있으며 그녀의 손에 프랑스 왕이 정중하게 키스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신체적 접촉은 버려진 딸에게 한 사람의 연대와 존중이 담겨 있는 정중함이 담겨 있습니다.
풍부한 장식과 화려한 옷차림의 두 언니들 시선은 코델리어를 향하지만, 표정에는 진실이 담겨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책의 내용을 알고 그림을 봐서인지...
리어왕은 화면 오른쪽 뒤편으로 광대 복장으로 보이는 인물의 부축을 받으며 물러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장면에서 중심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의 중심에서 사라진 존재로 그려져있습니다. 그가 했던 극단적이고 비합리적인 결정 - 사랑을 말로 증명하길 강요하고 그렇지 않았던 코델리어를 배척한 - 이 모든 것은 이제 뒤로 물러나게 됩니다.
빛은 코델리어 위로 부드럽게 쏟아지고, 그녀의 흰 옷은 주변의 어두운 색채와 대비됩니다. 그녀의 정직함과 단호함, 그리고 버려짐으로써 오히려 더욱 또렷해진 인간적 존엄이 이 빛을 통해 서정적으로 발현되고 있습니다. 흰 옷은 단순히 색의 표현이라기 보다 진실이 감각으로 드러나는 의도가 포함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그림은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과장된 말이 아니라 조용한 존중으로 드러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