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별장에서는 선생님이 가장 일찍 일어난다’라고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시작하고 있습니다.
저도 일찍 일어났습니다.
기침감기가 2주째인데 별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은 스톡홀름에 기항해서 내일까지 머물게 됩니다. 여행을 시작한 지 벌써 54일째, 거의 절반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크루즈 선이 스톡홀름 항구에 도착하기 전, 양 쪽에 많은 섬들이 보였습니다. 그중 일부는 집이 한 채 또는 여러 채 있는 섬들이 있습니다. 마치 캐나다 퀘벡주의 천 섬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섬은 앙징맞게 작고 집 또한 한 채가 아주 작은 규모로 있는 곳도 있습니다. 아마도 주말용이거나 여름용 거주지가 아닐까요? 땅이 넓고 자원이 풍부해 스톡홀름 국민들은 참 좋겠습니다.
스톡홀름은 13세기에 설립된 도시로 멜라렌 호수와 발트해의 교차점에 위치해 있으며, 초기에는 전략적인 무역 거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스톡홀름"이라는 이름은 방어를 위해 사용된 통나무를 의미하는 스웨덴어 "stock"와 섬을 의미하는 "holm"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톡홀름은 14개의 섬 위에 세워져 있으며, 50개 이상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세계에서 가장 그림 같은 수도 중 하나입니다. 도시의 수로와 녹지 공간은 그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스톡홀름을 둘러싼 군도는 약 30,000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감라 스텐 지구까지 천천히 걸었습니다. 전에 왔을 때의 기억을 되살리면서요.
오늘은 스톡홀름 국립미술관과 시립도서관에 가 보기로 했습니다.
스톡홀름 국립미술관은 스웨덴 최고의 미술관으로 스톡홀름 중심부에 위치해 있습니다. 1792년에 설립된 이곳은 스웨덴과 유럽 예술의 광범위한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어 스웨덴의 주요 문화 기관입니다.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단단한 느낌을 주는 국립미술관은 건축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슈툴러(Friedrich August Stüler)가 디자인한 인상적인 네오 르네상스 건물에 자리해 있습니다. 미술관은 2018년에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역사적 특성을 보존하면서 전시 공간을 현대화했습니다. 무료였던 입장이 코비드가 끝나고 나서 유료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무료에 대한 기대와 달리 입장권을 구입하고 들어가게 되어 구시렁대었지만 마침 해리엇 베커(Harriet Backer, 1845-1932)의 특별회고전도 전시되고 있어, 아쉬움은 희석되었습니다. 미술관은 기능과 아름다움이 혼재되어 있어 깔끔하고, 원목을 사용하고 둥근 천장에 벽돌로 쌓아 만든 지하층에는 물품보관소와 화장실이 있는데 깨끗하고 편리했습니다. 도서관도 설치되어 있어 예술문화 관련 서적이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1층의 조각정원에는 지붕에 대형 천창을 만들어 햇빛이 들어와 조각정원에 다양한 빛 그림자를 만들어 주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시되어 있는 조각들이 다른 빛으로 다가왔습니다.
중앙 입구 현관 계단을 오르다가 뒤를 돌아보면 칼 라르손의 커다란 벽화 <한 겨울의 희생>이 벽면의 상단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미술관 컬렉션에는 중세부터 현대까지의 회화, 조각품, 디자인, 가구 집기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목할만한 예술가로는 렘브란트, 르누아르, 마네, 모네, 세잔, 빈센트 반 고흐뿐만 아니라 스웨덴의 국민화가 칼 라르손과 앤 데스 존과 같은 저명한 스웨덴 예술가가 있습니다.
칼 라르손(Carl Larsson, 1853~1919)은 가난과 아버지의 가정 폭력으로 ‘내던져진 삶’이라 표현되기도 할 만큼 힘든 성장 과정을 거쳤으나 화가였던 아내 카린을 만나 그녀의 온정 어린 사랑 속에 가족들의 소박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그림으로 그려냈습니다. 동화적인 소재를 많이 그렸으며 8명이나 되는 자녀들을 모델로 그리기도 했습니다. 전쟁에 참여한 스웨덴 군인들은 성경과 칼 라르손의 그림을 간직하고 참전했다는 일화도 전해지지요. 그만큼 온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의 그림은 추운 스웨덴의 겨울 한기도 녹여줄 만큼 따뜻하게 전해 졌겠지요. 그뿐만 아니라 그의 그림은 가구회사 이케아 가구와 실내장식에 모티브를 제공했다고 합니다. 미술관에는 회화 외에도 예술적 스타일과 장인 정신의 진화를 보여주는 조각, 장식 예술, 응용 예술의 중요한 컬렉션이 있습니다. 그의 그림 앞에서 따뜻하고 안온한 그의 그림 속에 잠시 머물러 동심에 젖어 보기도 했습니다.
커다란 자작나무 아래 야외 테이블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빨간 모자와 앞치마를 두른 막내는 호기심이 먼저 인지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음식보다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버지가 궁금한가 봅니다. 막내 옆의 언니는 옻차림이 흐트러져있군요. 늦잠을 자다 서둘러 나왔는지 아니면 식사가 급했는지 알 수 없네요. 화면의 왼쪽에서 커다란 둥치를 자랑하고 있는 나무는 글씨도 있고 새 모습을 그린 것 같기도 한 문양들이 있습니다. 칼 라르손은 “ 이 나무가 없었다면 이 마당은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이 나무는 훌륭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이곳을 지나는 바람이 작은 날벌레나 나방을 쫓아준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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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라르손, <큰 자작나무 아래에서의 아침 식사> 연도 미상, 32x43cm, 스톡홀름 국립미술관
칼 라르손, <Pontus>, 1890, 스톡홀름 국립미술관
칼 라르손의 부인 카린 라르손(Karin Larsson, 1859~1928)은 부유한 사업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882년 파리에서 칼 라르손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고, 결혼 후에는 화가로서의 자신의 꿈을 펼치기보다 자녀들을 양육하며 집안일을 했습니다. 화가로서의 성취는 발휘하지 못했으나, 그녀가 만든 인테리어, 집안의 침구류나 커튼, 식탁보 등의 자수는 아름답고 훌륭했습니다. 스웨덴 전통 문양인 꽃무늬를 변형시킨 디자인이나 ‘땅, 공기, 불, 물’의 네 가지 요소를 사용한 자수가 특징적이었고, 활동성이 좋은 많은 자녀들의 옷과 가구도 직접 그녀가 디자인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황금손’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집을 ‘소박하고 겸손한 집’이라고 표현을 한 칼 라르손은 아이들의 출생과 성장에 따라 조금씩 집을 고쳐가면서 생활했다고 합니다. 유연한 집, 적응적인 집이 되겠지요.
“자연을 호흡할 수 있는 전원 속 집이야말로 예술가들의 안식처가 아닐까. 번잡한 도시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행복을 느낀다”라고 한 칼 라르손의 말을 떠올립니다.
특별 전시 중이어서 만난 노르웨이 출신 화가 해리엇 베커(Harriet Backer, 1845~1932)는 역사적 건축물과 내부에서 빛의 효과에 평생 동안 매료되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그림은 풍부한 색상과 빛과 그림자의 상호작용으로 전달되는 상세한 내부 장면을 섬세하게 묘사합니다. 주제는 중산층 가정과 여성의 일상생활, 시골의 내부, 교회 및 종교적 의식, 그리고 자신의 작업실까지 소박한 실내 풍경과 독특한 정물, 음악 장면 등 다양합니다. 피아니스트였던 언니와 함께 베를린과 뮌헨, 파리와 이탈리아 등 유럽 지역을 여행하며 공부했습니다. 1900년대 초반, 해리엇 배 커는 노르웨이 예술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자리 잡게 되었지요. 다른 많은 여성 예술가들과 달리, 그녀는 미술 역사에서 평가절하되지 않았습니다. 1925년 스톡홀름에서 마지막으로 전시했을 때, 비평가들은 그녀를 "최고의 스칸디나비아 여성 화가"라고 칭송되었다고 합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유명한 화가들에게 미술교육을 받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뮌헨과 파리에서 공부를 계속하다가 서른다섯 살이 되어서 화단에 데뷔하였습니다.
해리엇 베커, <The Farewell, 작별인사> 1878, 국립 미술, 건축, 디자인 박물관
떠나는 그녀의 앞날이 진정 평안하길 기도하듯 잡은 아버지로 보이는 그의 두 손, 차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며 비키는 그녀의 시선, 어머니일까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끼며 이별의 슬픔을 막아내는군요. 방 안의 분위기를 짐짓 무시하며 어서 떠나자고 무거운 가방을 들고 재촉하는듯한 모자 쓴 남자. 찻잔 속이 차는 식어가는 것 같습니다.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려는 듯 준비한 소박한 꽃다발이 식탁 위에서 헤어짐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화가 자신도 외국에서의 공부를 반대하는 부모님 곁을 떠나 뮌헨, 파리 등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고 하지요. 지금이야 비행기로 두 시간 이내의 거리지만 당시에는 긴 시간의 이동, 불편한 통신 수단 등 막막하고 불안한 여정이었을 것 같지요.
해리엇 베커, <타눔 교회에서의 세례식>, 1892, 스톡홀름 국립미술관
드디어 주인공이 입장하는군요. 성장을 한 엄마의 팔에 안겨 아이가 교회 입구에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교회 홀에서 기다리는 친척은 고개를 돌려 그들의 입장을 기대하고 있네요. 아이에 대한 신의 은총을 기원하는 유아 세례식은,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며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성인으로의 성장을 기원하는 부모와 친척들의 기대와 염원을 담는 시간이 되겠지요. 교회 입구의 나뭇결과 마룻바닥이 오래된 교회의 나이결을 보여주듯 고풍스럽고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해리엇 베커의 그림은 색채 선택, 빛의 유희, 디테일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고 합니다. 그녀의 작품과 삶은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자연이나 소박한 농장 생활의 풍경, 초상화 등 해리엇 베커의 그림은 모든 것이 부드럽고 편안하게 다가왔습니다.
프랑스의 오르세 미술관은 “해리엇 베커, 색채의 음악”란 주제로 2024년 9월 24일부터 2025년 1월 12일까지 해리엇 베커 전시를 진행 중입니다.
스웨덴 국립미술관에서 시립 도서관은 조금 먼 거리이긴 했지만 우리는 옛 추억들을 되새기며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오늘 우리가 걸은 걸음은 23,000보네요. 아직은 튼튼한 다리가 있어 다행입니다. 이 도시를 포함해서 북유럽을 여행했을 그 당시는 우리가 다시 또 오게 될 것을 예상하진 못했기에, 이번 방문이 한층 더 새롭고 설레고 기뻤습니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건축’으로 추천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스톡홀름 시립 도서관은 1918년 스웨덴의 명가 발렌베리 재벌의 기부금으로 설립이 추진되고, 스웨덴의 대표적인 건축가인 군나르 아스플룬드가 설계한 건물로 네모난 상자 위로 원통이 솟아있는 모양으로 건축되었습니다.
아스플룬드의 설계와 감독하에 10년의 세월을 들여 1928년에 완성된 도서관은 아스풀룬드 하우스라고도 불린답니다. 신고전주의와 모더니즘을 혼합해 설계한 공공 도서관을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은 건축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건축과 풍부한 자료,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스웨덴 건축의 걸작으로 간주되고 이후 많은 공공건물 설계에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원주형의 높은 건물을 사각의 저층 건물이 둘러싸는 구조는 스톡홀름에서는 특이한 디자인이고, 붉은 갈색의 매끄러운 외벽은 공원의 경치와 멋지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3층으로 된 원형 서가는 360도를 삥 둘러 꽂혀 있는 장서들은 처음 보는 이들에게는 탄성을 자아내게 하고, 자주 온 사람들에게는 평안함을 주고, 1층 원형홀에는 단순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의 열람실이 있어 인상적입니다.
게다가 책 대출도 상당히 자유롭다고 합니다. 스톡홀름 시민은 물론 단순 여행자들도 여권 등의 간단한 신분 확인만 하면 자유롭게 책을 빌릴 수 있고, 반납은 도서관뿐만 아니라 시내 곳곳에 공공 도서관의 책을 반납하는 곳을 이용하면 된다고 하니 편리하겠습니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고, 아스풀룬드의 설계작을 보고 싶은 욕망이 생겼었는데, 그중 하나를 이루어 기뻤습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구절 중에는 “아스플룬드의 건축을 모국 스웨덴에서 널리 기억하게 된 것은 스톡홀름 시립도서관보다 오히려 ‘숲의 예배당’ ‘숲의 화장터’ 등을 포함하는 ‘숲의 묘지’에 의해서였을 것이다.”라고 적었습니다.
책에는,
“‘숲의 화장터’가 완성된 것은 1940년의 일이었다. 아스플룬드는 쉰다섯이 되어 있었다. 그 완성을 누군가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갑작스러운 심장 발작이 아스플룬드를 덮쳤다. ‘숲의 묘지’로 시작한 건축가의 마지막 일은 원이 닫히듯 ‘숲의 묘지’가 되었던 것이다. 아스플룬드는 자기가 설계한 화장터에서 화장되었고, 재가 되어 ‘숲의 묘지’에 매장되었다.
‘숲의 화장터’ 스케치는 완성되기 십 년 전부터 그리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입구 부근에 십자가가 아니라 오벨리스크가 세워질 계획이었다. 오벨리스크에는 ‘오늘은 나, 내일은 당신’이라는 말이 새겨져 있었다. 예전에 ‘숲의 예배당’을 위한 스케치에 아스플룬드가 써넣은 말은 ‘오늘은 당신, 내일은 나’였다. ‘나’와 ‘당신’은 언제 바뀐 것일까? --- p.187-188”
이번에는 ‘숲의 묘지’는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아마 다음 방문에서는 찾아가지 않을까요.
마쓰이에 마사시의 <그해 여름은 그곳에 오래 남아>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너무 많은 기대를 했었나 봅니다. 시립도서관은 예상보다는 작은 규모였습니다. 독특한 원통형 독서실의 열린 공간은 빛이 잘 들어오게 만든 것 같습니다. 소설 덕분인지 한국인과 일본인으로 보이는 관광객이 많이 보였습니다. 저도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아마 이 도서관까지 찾아가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국립미술관 관람과 시립도서관 방문을 마치고 귀선 하는 길에 폭우가 갑자기 쏟아졌습니다. 마침 우산을 준비해 가긴 했지만, 감당이 안 됩니다. 우산이 뒤집어지고, 부서져서 구부러진 우산살을 내가 한 손으로 잡으며 왔는데, 그 손가락을 타고 소매 속으로 빗물이 스며들어 옷이 많이 젖었습니다. 우리의 양 어깨도 흠뻑 젖었고요.
서로 우산 하나에 의지해 기대며 가는 길에, 김후란의 <존재의 빛> 한 구절 ‘ 사람들아/ 서로 기댈 어깨가 그립구나’하는 글귀가 생각났습니다.
우리는 ‘singing in the rain’ 리듬을 콧노래로 부르며, "우리 이렇게 양팔을 비에 젖게 하며 다른 한쪽 어깨는 서로 의지하고 기대며 가요"라고 서로에게 말했습니다.
저녁 후 극장에서 진행하는 스웨덴 출신의 가수 Johan Anderson의 쇼를 잠깐 보고 나서, 또 다른 공연장인 Universe Lounge로 갔습니다. ABBA white party가 8시부터 시작합니다. 승객들이 ABBA의 무대의상과 비슷한 풍의 하얀색 옷들을 입고 블링블링한 장신구를 하고 ABBA의 흥겨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춥니다.
그나저나 죽기 전에 봐야 할 건축 중 하나를 보게 되고, 서로에게 기댈 어깨가 있어 위안이 되는 저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