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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르고서는 나뭇잎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by 윤재

“내가 모르고서는 나뭇잎도 움직이지 않는다 “



오만함이 느껴지는 이 말!


한때 칠레의 대통령이자 독재자, 학살자로 1973년 당시 미국 닉슨 정권과 CIA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잡았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한 말이라고 합니다.(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런 말이 가능했단 의미이겠지요) 피노체트는 쿠데타 성공 직후, “민주주의란 때로 피로 목욕을 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로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도 했답니다.


17년 오랜 기간의 철권통치로 정적들과 반정부 민주화 운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긴 했으나, 그와 동시에 칠레 경제의 기틀을 다졌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의 독재자들과 비견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피노체트가 사망하던 날, “오늘은 악마들에게 나쁜 날입니다. 왜냐하면 피노체트가 악마들에게서 지옥의 대통령직을 빼앗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말로 그의 죽음을 평가한 사람도 있었답니다. 자신의 죽음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사과의 말 한마디 하지 않은 피노체트와 그에 못지않게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면서 국정을 좌지우지했다는 그의 부인 루시아 하리아트.


피노체트 칠레 대통령의 사망 소식에 '애도'를 표하는 목소리보다는 독재자의 '단죄'가 무산됐음을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졌다고 당시 언론은 전했습니다.


하리아트는 ‘독재자 피노체트를 만든 여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녀의 별명이

“70~80년대 칠레의 왕비”였다고요...


피노체트 집권기 약 10%에 해당하는 칠레 국민이 해외로 도피했고, 구금, 고문 등의 가혹행위로 사망하거나 실종된 사람들이 매우 많았고 체포 구금된 여성들은 가혹한 성폭력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피노체트 정권에서 자행된 고문과 가혹 행위 과정에서 반정부 인사들에게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주기 위해 높은 볼륨의 음악을 듣게 했다고 하는데, 시고니 위버가 출연한 영화 <진실, 원제는 Death and the Maiden>는 그 잔인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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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여전히 반복되며 곳곳에서 평행이론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천박하게 해석하는 사람들 때문에 가면은 점점 두터워진다 “라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말했습니다.


피노체트의 무자비를 생각하게 된 오늘, 가면의 화가 제임스 앙소르(James Sidney Ensor, 1860~1943)가 생각났습니다.

앙소르는 인간의 본성을 어리석고 악하며 가면을 쓰고 속임수와 위선을 행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그 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혼란과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날카롭게 포착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앙소르의 작품은 종종 강렬한 색채와 왜곡된 형태를 통해 현실을 넘어서 인간 내면의 불안과 모순을 드러내며, 그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때때로 기괴하고 상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앙소르의 어린 시절은 예술적인 분위기와 혼란이 공존했던 시기였습니다.

그의 부모가 골동품 가게를 운영했으며, 성장 과정에서 가면은 익숙한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앙소르의 그림은 호응을 받지 못하고 외면당하면서 고립된 삶을 살았지만 다행히 말년에는 인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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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앙소르, <현명한 법관들>, 1891, 개인 소장




<현명한 법관들>은 단지 예술 작품에 그치지 않고, 사회와 정치,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철학적 통찰을 제공합니다. 앙소르는 자신의 예술을 통해 권력과 위선, 진리와 거짓의 경계를 날카롭게 드러내며, 그 시대 사람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현명한 법관들>은 1911년에 그려진 작품으로, 앙소르가 당시 사회와 정치적 권력에 대해 갖고 있던 깊은 의문과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의 제목은 "지혜로운 판사들"을 의미하지만, 앙소르가 묘사한 판사들은 실제로 '지혜'보다는 '위선'과 '허구'를 상징합니다. 이 작품에서 판사들은 고전적인 법복을 입고,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권위를 과시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기괴하게 왜곡되어 있어 실제로 이들이 지혜롭거나 도덕적인 인물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앙소르는 이 작품을 통해 사회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 특히 정치적, 법적 권위를 지닌 인물들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이끌어가는지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들 권위자들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해결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위선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림 속 판사들은 실제로 사회를 공정하게 다스리는 '지혜로운 존재'가 아니라, 권력을 이용해 사회를 왜곡하는 존재들로 그려져 있습니다. 앙소르가 묘사한 이러한 왜곡된 형태와 기괴한 표정은 그들이 단지 표면적인 '지혜'를 내세우고 있을 뿐, 그들의 실질적인 본성은 부조리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림으로 들어가 볼까요


가녀린 종아리 밑으로 못 박힌 발에서 선혈이 선명합니다.


땀을 흘리고 비말을 튀겨가면서 심지어 콧물까지 흘리면서 열심히 변호하는 변호사의

변론은 흩어지고.

자의식적인 거짓 미소나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각자의 가면을 쓰고 있는 법관들

험악한 인상들을 쓰면서 범죄를 규명하려고 하는 검사들

테이블 위에는 피 묻은 흉기와 절단된 신체의 일부와 틀니까지 범행 증거물들

화면 아래에는 이 상황이 당혹스러운 세 명의 피의자들


이미 저울은 균형을 이루지 않고 한쪽으로 많이 기울어진 상태이고,

이 그림은 1860년 벨기에에서 일어난 살인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된 지 몇 달 후에 진범이 체포되었던 중대한 오심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공정과 진실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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