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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드웨이 부기 우기, 뉴욕

by 윤재

새벽 빗속, '잠들지 않는 뉴욕의 아침' 노랫말처럼 뉴욕의 아침이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운명처럼 맨해튼 크루즈 터미널에 닻을 내리며, 나는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도시의 심장 속으로 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브루클린 터미널이 아닌 맨해튼에 있는 크루즈 터미널 부두에 정박하게 되어 맨해튼에서의 시간을 편리하게 즐길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뉴욕은 케이프타운, 스톡홀름에 이어 이틀을 머무는 기항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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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을 대표하는 노래이며, 뉴욕 양키스의 경기 종료를 알리는 음악인 프랭크 시나트라의 <뉴욕, 뉴욕♬♪>에 맞춰 양팔을 옆으로 길게 뻗고 손은 활짝 펴서 흔들흔들 반짝반짝 흔들고 다리는 크로스로 좍좍 펼쳐 보이면서 뉴욕의 아침을 엽니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뉴욕에서 꼭 성공하고 싶다”라고 노래하는군요. 노래 가사처럼 모험을 갈망하는 방랑자들은 뉴욕의 심장부를 가로지르겠지요. 프랭크 시나트라가 65세인 1980년에 발표한 이 노래 <뉴욕 뉴욕>은 매년 뉴욕 타임스퀘어의 새해맞이 행사 때 새해가 밝으면 Auld Lang Syne 다음으로 처음 울려 퍼지는 곡이라고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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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은 미국의 최대도시를 넘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도시이며 경제, 문화, 패션, 예술의 중심지이지요. 음악 건축 영화 디자인 현대미술 등 예술분야를 선도하는 도시이기도 하며 화려하고 세련된 현대식 빌딩과 운치 있고 웅장한 고딕빌딩이 어우러져 압도감과 탄성이 나오는 아름다움을 자아내기도 하고요. 뉴욕은 그리드 위에 지어진 기하학적인 도시로 하늘을 향해 모서리가 뾰족한 직사각 형태의 건물이 솟아 있다고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말했습니다. 직선의 도시 맨해튼을 보며, 자연은 직선이 아닌 곡선이라고 하며 친환경 건축을 주도했던 훈데르트바서가 뉴욕을 어떻게 볼지 궁금해졌습니다.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 행렬과 인파로 뉴욕은 잠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 우산 두 개를 준비해 왔지만 우산 하나는 스톡홀름에서 우산살이 부서져 버리고 서비스 데스크에서 우산 한 개를 빌려서 출발했습니다. 기억으로는 객실에 튼튼한 장우산이 비치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번 크루즈에는 없네요. 서비스 데스크에서 근무하는 말콤으로부터 우산을 받아 들고 나오면서 시인과 시의 제목이 생각나지 않지만 우산 관련한 시 구절이 생각났어요. 요즘은 종종 이렇답니다. 제목이 생각나지 않거나 줄거리가 이것과 저것이 섞이거나... 뭐 그래도 아직은 괜찮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우산은 오래 기다리지 못한다.

이따금 한 번씩은 비를 맞아야 동그랗게 휜 척추들을 깨우고,

주름을 펼 수 있다.

우산은 많은 날들을 집 안 구석에서 기다리며 보낸다.

눈을 감고, 기다리는데 마음을 기울인다.

벽에 매달린 우산은 많은 비들을 기억한다.

머리꼭지에서부터 등줄기, 온몸 구석구석 핥아주던 수많은

비의 혀들, 비의 투명한 율동을 기억한다.

벽에 매달려 온 몸을 접은 채

그 많은 비들을 추억하며

그러나 우산은, 너무 오랜 시간은 기다리지 못한다”



아침을 먹고 저도 나른한 척추들을 깨우고 어깨를 피고 땅을 디뎌보겠습니다. 배에서 나가는데 우리가 ‘할리우드 커플’이라고 부르는 존과 메릴린을 만났습니다. 식당에서 옆 좌석에 앉아 얘기를 나누면서 친해진 커플인데, 영화배우 닮은 멋진 모습과 친절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던 그들에게 우리가 ‘할리우드 커플’이라고 명명했지요. 그들은 맨해튼 시내 구경을 하고 뮤지컬을 보러 간다고 하네요. 메릴린이 밝게 웃으면서 ‘뭐 티파니에 갈 수도 있다’고 하면서... 그 말에 존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우리를 봅니다. 놀란 모습을 연출하는 할리우드 액션을 보여줍니다.


우울할 때마다 홀리(오드리 헵번역)는 티파니(Tiffany)로 갑니다. "결코 어떤 나쁜 일도 일어날 수 없는 안식처"인 Tiffany로.....(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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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메트로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티파니 매장을 지나갔습니다. 이 영화에서 입었던 검정드레스는

2006년 런던의 한 경매에서 80만 달러가 넘는 가격으로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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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트 몬드리안,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1942-1943, 뉴욕현대미술관



노란 선들이 경쾌하지 않나요?

노란 선 사이 중간중간에 섞여 있는 빨간색과 파란색이 노란색을 더 산뜻하게 만들어 주고, 흰 여백이 시선을 끌어당기네요.


네덜란드 출신의 대표적인 추상화가 피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 1944)은 뉴욕으로 이주한 후, 도시의 역동적인 생명감과 재즈 음악 특히 부기 우기(Boogie Woogie) 장르에서 받은 인상을 추상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엄격한 종교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몬드리안은 뉴욕의 자유롭고 활기찬 분위기를 즐겼다고 합니다. 그는 브로드웨이의 번화한 거리와 높은 빌딩, 교차하는 도로를 직선과 직각으로 표현하며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은 네온사인이나 차량의 불빛을 반영한 것입니다. 블루스 음악의 한 장르인 부기 우기는 피아노를 중심으로 즉흥적이고 빠른 음악의 경쾌한 곡조가 특징인데 몬드리안은 발놀림이 아주 빠른 흥겨운 부기 우기 춤을 즐겨 추었다고 합니다. 춤을 즐겨 춘 몬드리안이 역시 춤을 좋아하는 저한테는 한층 더 가까이 느껴지는 친밀감과 동질감을 느끼게합니다. 그는 잭슨 폴록의 아내였던 리 크래스너와는 재즈 음악에 밤새도록 춤을 추기도 했다는군요. 연주할 때마다 상황에 따라 음이 자유롭게 즉흥적으로 연주되는 자유로움이 몬드리안에게는 매력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그림에서는 수직과 수평의 선들, 그리고 세 가지 색들만이 표현되는 강직성과 예민함이 있는데도 음악과 춤은 즉흥적인 것을 좋아했다니 아이러니하네요.



몬드리안의 “브로드웨이 부기우기”가 연상되는 직선과 수직으로 조직화된 맨해튼의 거리를 남편과 손을 잡고 나섰습니다. 우리의 행선지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뉴욕을 방문한 적이 있기에 이번에는 미술관 일정으로만 채웠습니다.


미국 입국에 필요한 ESTA(전자여행허가제)는 출발 전에 미리 신청하여 발급받았고, 미국령에 도착하기 전 캐나다 해상에서 미국 이민국 심사관들이 승선하여 모든 승객과 승무원들이 대면 입국심사를 하였습니다. 뭐 인터뷰 질문이야 미국 방문했었는지의 여부와 언제 마지막 방문이었는지 등 간단하게 통과되었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MET)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영국 대영박물관과 함께 손꼽히는 박물관으로, 소장 유물의 폭이 전 시대와 각 지역에 걸쳐있으며 유명 화가의 작품들까지 방대한 컬렉션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장소로 많이 활용되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건물 외관부터 웅장하고, 일찍 서둘러 갔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많은 관람객들이 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체육복 차림의 중국 중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단체로 입장하려고 하니 더 복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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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지도를 가지고 미리 동선을 구성한다 해도 막상 들어가면 엉망진창 미로 같다고 알고 있어, 시간도 절약할 겸 한국어 도슨트 투어를 신청했는데 시간 절약은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제가 보고 싶고, 머무르고 싶은 그림들 앞에 있을 시간적 여유, 재량권이 없어 실망이 되었던 도슨트 투어였습니다. 한 번의 방문이 아니라 이곳에 일정 기간 거주하면서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정기 회원권을 가지고 시간 날 때마다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책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이었습니다>에서 “관람객들은 연어 떼가 강을 거슬러 오르듯이 중앙 계단을 올라와 마치 냇물에 박혀 있는 돌인 것처럼 나를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라고 표현한 문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도 성급한 연어 떼가 되었고, 도슨트는 일행들을 이끌고 이 방 저 방 빠르게 스치며 지나갔습니다. 그림 앞에 머물거나 사진 찍을 시간마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방문한 날은 토요일 주말이어서 그런지 그야말로 박물관 내부는 수많은 관람객들로 혼잡하였습니다. 마치 일행들의 꼬리 잡기 놀이에서 낙오될까 봐 정신없이 도슨트를 따라다닌 오전 시간이었습니다. 도슨트 투어를 후회한 하루였습니다.



맨 처음 유럽 인상파 갤러리로 들어가자마자 눈에 띈 것은 모네의 일본풍 다리가 있는 <수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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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 <Bridge over a Pond of Water Lilies>, 1899, M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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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밀짚 모자를 쓴 자화상>, 1887 , MET



역시 강렬한 붓 터치로 생동감이 전해지는 빈센트 반 고흐의 <밀짚 모자를 쓴 자화상> 앞에는 관람객들이 몰려 있었습니다. 반 고흐는 파리에 머무는 동안(1886~88) 20점이 넘는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자금이 부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 화가로서 자신의 기술을 연마하기로 결심한 그는 자신의 최고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모델이 없어서 일부러 혼자서 작업할 수 있을 만큼 좋은 거울을 구입했다."라고 했습니다. 신인상주의 기법과 색채 이론에 대한 예술가의 인식을 보여주는 이 그림 뒷면에는 <감자 깎는 여인>이 그려져 있습니다. 눈빛이 형형하고 노란 모자와 얼굴의 붓터치가 생동감을 줍니다. 붓터치들이 춤을 추듯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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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감자 깎는 여인>, 1885, MET


반 고흐의 자화상 뒷면에 있는 이 그림은 제한된 어두운 색조, 거친 부분 및 블록 드로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반 고흐가 네덜란드를 떠나 프랑스로 떠나기 1년 전 누에넨에서 그린 초기 작품의 전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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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자화상은 유리 상자 안에 보관하여, 앞과 뒤 캔버스를 볼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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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 1887, MET



커다랗게 캔버스 화면을 꽉 채운 커다란 해바라기를 보며 이준관 시인의 시가 생각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벌을 위해서 꿀로 꽉 채웠다

가을을 위해서 씨앗으로 꽉 채웠다

외로운 아이를 위해서

보고 싶은 친구 얼굴로

꽉 채웠다

해바라기 꽃

크으다

....이준관의 <해바라기 꽃>



해바라기는 그 시원한 줄기와 화려한 꽃잎으로 기쁨과 행복을 발산하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합니다. 그래서 태어날 아기를 위한 베이비 샤워, 생일과 졸업 선물, 개업을 축하하는 선물, 집들이 선물 등 다양한 축하의 순간에 자주 선택됩니다. 해바라기의 노란색은 마치 황금을 끌어모으는 듯하며, 꽃이 토양에서 자라기 때문에 열매를 맺는 힘이 강해 친구들과 가족을 격려하는 특별한 상징이 됩니다.


2022년 10월 14일, 영국의 환경단체 ‘Just Stop Oil’ 활동가 2명이 반 고흐의 그림 ‘해바라기’에 수프를 끼얹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림은 유리로 보호되어 있어서, 그림에 손상이 가지는 않고 액자에 가벼운 훼손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당신은 그림을 보호하는 것과 우리의 행성과 사람을 지키는 것 중 무엇을 더 걱정하는가‘라고 외치면서, 그와 같은 시위를 한 것은 화석 연료 신규 허가 및 생산 중단을 요구했습니다. 반 고흐의 작품이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전지구적인 그림이다 보니, 행위의 파급력을 위해 그의 작품에 이런 행위를 했나봅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만난 빈센트 반 고흐와 클로드 모네의 해바라기는 묘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고흐는 그냥 고흐가 아니라 아 ! 고흐’라고 안타까움과 연민을 담아 천천히 그 이름을 불러야 할 것 같았습니다. “노란 높은 음에 도달하기 위해서” 음주를 했다는 아 ! 고흐.

연작이라고 불러도 될 수 있을만큼 반 고흐는 여러 점의 해바라기를 그렸지요. 그 중에서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두 송이 해바라기의 강렬한 노란색은 마치 뜨거운 여름날의 열기를 그대로 옮겨온 듯 하더군요. 과감한 꽃잎의 생동감 있는 터치와 꿈틀거리는 묘사가 고흐 내면의 고독과 열정을 담고 있는 것 같았어요. 고흐의 해바라기는 단순한 꽃을 넘어, 삶의 고난과 기쁨을 담아내는 역동적인 힘을 지닌 상징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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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 <Bouquet of Sunflowers>, 1881, MET




반면 클로드 모네의 해바라기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꽃잎들이, 부드러운 브러시 터치로 그려져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실감나게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어요. 일상의 평화롭고 잔잔한 순간을 포착한 듯한 안도감과 차분하고 부드러운 아름다움이 전달됩니다. 모네의 해바라기를 보고 온 고갱이 모네의 해바라기가 아주 괜찮았지만 고흐의 그림이 더 좋았다고 했는데 고흐는 고갱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답니다. 겸손이었을까요 아니면 고갱의 우정어린 배려를 수용하기 어려웠던 것일까요... 알 수 없네요.



1888년 11월, 반 고흐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저번에 고갱이 나에게 말하더군요. 클로드 모네가 그린 커다란 일본 꽃병에 담긴 해바라기 그림은 아주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내 그림을 더 좋아합니다."라고요. 당시 비평가들은 이전에 모네가 1882년 인상파 전시회에서 베퇴이유에 있는 그의 정원으로 가는 길을 따라 자라는 해바라기를 묘사한 이 정물을 보여주었을 때 그의 기술의 "brio & daring(생기와 대담함)"을 칭찬했습니다.


어쩌면 반 고흐에게는 친구의 말보다는 비평가의 평가가 더 우선했을까요




“어떻게”라는 질문,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만물의 구성 요소나 우주 등에 대한 질문보다 “어떻게”라는 질문에 더 집중했다지요.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는지?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는 “소크라테스는 처음으로 철학을 하늘에서 끌어내려 마을에 정착시켰고, 철학을 사람들의 집 안으로 불러들였다.”라고 말했답니다.

“왜”라는 질문에는 “어떻게”라는 답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 사는지 모르겠다”면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묻게 되고요.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라고 했는데,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고 죽기 직전에 제자와 친구들에게 마지막 말을 전하는 장면을 그린 신고전주의의 대표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의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직접 보면서 뜬금없이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하는 노래 가사가 떠올라 실소• 썩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을 부인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명으로 기소된, 그림에서 가장 밝게 빛나고 있는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은 독이 든 잔을 잡으려는 소크라테스는 당시 주류 세력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겠지요. 그는 억울했겠지요. 그런데도 자신에게 내려진 부당한 죽음을 거부하지 않은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자신이 깨우친 진리가 사실이며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네요.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서양 철학의 시작이었다고 합니다. 아테네인들, 지식인과 권력층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까지 아테네 인들의 허위를 드러내고 그들 자신의 무지와 탐욕이 폭로되는 모욕감을 견디기 힘들어할 뿐 반성과 성찰은 없이 그저 소크라테스를 미워하기로 한 아테네인들. 그래서 미움을 받은 소크라테스. 독배를 마시기 전 제자와 친구들과 나눈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죽음이란 행복이며, 신들과 철학의 선현들을 만나는 행복한 여정을 자신의 영혼은 저승에서 크게 복 받을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재판이 끝나고 운명이 결정된 소크라테스는 제자들과 모여있을 때,

“ 이제 가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죽기 위해, 여러분은 살기 위해 가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가 더 좋은 곳으로 갈지는 신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말했답니다.


“크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수탉 한 마리를 빚지고 있네. 반드시 잊지 말고

갚아주게나”라고 친구에게 말했다는 마지막 말은 당시 그리스인들은 치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수탉을 바쳤으므로 소크라테스는 아마 삶이 반드시 치료해야 하는 질병과 같다는 뜻에서 그 말을 했을 것이라고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의 저자는 추론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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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 MET



그는 자신의 믿음을 버리는 대신 독이 있는 독약을 마시기 전에 영혼 불멸에 대해 설명하면서 기꺼이 죽었습니다. 다비드의 인물들은 몸짓과 표현의 네트워크를 통해 소크라테스 생애의 마지막 순간을 연기합니다. 그는 그 사건을 차마 볼 수 없는 제자가 제공한 독약잔을 잡으려 합니다. David는 가구와 의복의 세부 사항을 포함하여 고고학적으로 정확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골동품 학자들과 상의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침대 밑에 플라톤을 포함시킨 것은 의도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참석한 사람이 아니라 이 고대 이야기를 보존한 텍스트의 저자인 파이돈을 의도적으로 언급한 것입니다. 이 그림은 플라톤의 회상에 근거하여 제작된 것이므로 27살의 플라톤을 늙게 묘사했다고 합니다.



“모든 진실은 구불구불하다”라고 니체가 말했으며, 모든 삶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지난 후에야 과거를 돌이켜보며 서사를 매끄럽게 다듬고 패턴과 의미를 부여한다고요.



현재는 인터넷, 스마트폰을 시작할 때는 검색(ask) 서비스로 직행합니다. 예전에는 권력이 있는 자만이 정보를 가질 수 있고, 문자를 사용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월드 와이드 웹의 발전, 스마트폰의 발전과 함께 정보가 대중화되고 누구에게든 접근할 수 있게 된 시대입니다. 정보는 존재하지만 정확하게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접근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어려움이 있지요. 어떤 의미에서는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철학이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질문도 희석되는 시대입니다.




메리 카사트: 현대 여성의 회화

인상파 모임에서 베르트 모리조와 함께 활동했던 미국인 여성 화가, 메리 카사트(Mary Stevenson Cassatt, 1844~1926). 그녀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의 매우 부유한 가정 출생으로, 그녀의 어머니는 깨어 있는 여성으로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여행을 교육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했습니다. 메리 카사트의 아버지는 부동산 중개인이었고, 어머니는 부유한 은행가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요즘말로 '금수저' 출신인 것이지요.

메리 카사트의 초기 교육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미술대학에서 시작했으나 여성 차별적인 교육방식과 구태의연한 관습적인 방식에 실망하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유학을 갑니다.



그림 공부를 위해 파리로 건너가, 초기에는 장 레옹 제롬에게 배웠으나 신고전주의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루브르 미술관에서 거장들의 작품을 필사하였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대부분 프랑스에서 생활하였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화가 직업은 남성의 분야, 여자에게는 쉽지 않은 영역이었지요. 그녀의 아버지는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에 반대를 하고 결혼을 재촉했으나 평생 독신으로 지내게 됩니다. 문학적인 소양과 지성을 겸비한 여성이지만 성격이 냉소적이고 도도한 태도와 강한 독립성 등으로 주위 남성이 적극 구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살롱전에서 거부되고 에드가 드가에게 인상주의 전시회 참여를 권유받고 참여받고, 인상주의 그룹에서 유일한 여성이었던 베르트 모리조와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과 다르게 초상화를 많이 그리며, 판화를 이용한 작품도 제작하였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공간과 주제 선택에서 제한적이었지만, 일상 속 현실 여성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표현하였습니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를 포함한 그 이전 유명화가들의 작품을 미국인들에게 소개와소장을 주선하는 역할을 하여 중요한 인상파 명화들을 미국 내 소장하는 계기를 만들고, 왕성한 미술 활동에 대한 인정으로 프랑스 정부는 1904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였습니다.


이방인으로서 고독과 억압, 긴장 속에서 활동하며 말년에는 당뇨, 류머티즘, 백내장등으로 고통받았습니다. 남성 중심 화단에서 여성에 대한 편견과 맞부딪치며 여성 권리 증진을 위한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으며, 여성과 아이를 대상으로 친밀한 내적 순간을 표현한 것은 결혼에 대한 감춰진 욕망의 표현으로 보는 의견들도 있습니다.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색상들은 내적 침울함과 고독을 지우려는 흔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녀는 조카들을 사랑하고 관심을 쏟으며 그림의 주제로 하였으며, 에드가 드가와는 친밀한 우정과 상호 협력을 나누는 사이였습니다. 그녀는 죽기 전에 드가와 교류했던 모든 편지들을 소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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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그림을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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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카사트, <티 테이블 앞의 여인>, 1885, MET


메리 디킨슨 리들이 대서양 양쪽에 있는 중상류층 여성들의 일상적인 의식인 차를 주재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리들 부인의 손은 그녀의 딸이 화가의 가족에게 준 금박을 입힌 청백색 광동 도자기 서비스의 일부인 찻주전자 손잡이 위에 놓여 있습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그려진 이 초상화는 스케치 같은 마감, 팔레트, 압축된 공간에서 Cassatt의 인상파 기법을 드러냅니다. 이모인 메리 리들이 카사트를 방문하며 선물로 준 청나라 도자기에 차를 담아 마시는 이모와 도자기를 그린 그림입니다. 파란색 청 도자기와 이모의 파란색 눈동자를 매칭하여 조화롭게 그리고 이모의 얼굴과 몸은 당시 그녀가 관심을 가졌던 일본 판화처럼 평면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모의 딸인 카사트의 사촌이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서 가져가지 않자, 나중에 메리 카사트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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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카사트, < 바느질하는 젊은 엄마 >, 1900, MET



창가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어린아이가 엄마의 무릎에 기대어 화면 밖 관객을 바라보고 있지요. 여자는 줄무늬 드레스를 입고 창밖 풀밭의 초록빛을 반사하는 녹색 앞치마를 두르고 있습니다. 바느질에 열중하는 엄마와 관객을 바라보는 아이의 조용한 순간을 포착한 그림입니다. 어머니와 아이가 삼각형 모양을 이루며 시선을 엄마의 얼굴로 끌어올리는 구도사용했습니다. 그 삼각형은 배경의 수평선과 수직선과 함께 안정적이고 균형 잡힌 구성을 만듭니다. 태양이 닿는 곳에서는 노란색 하이라이트를 볼 수 있고, 아이의 옷에 그림자를 나타내는 검은색 대신 연한 파란색과 녹색을 볼 수 있습니다. 테이블 위의 꽃병을 자세히 보면 패턴이 거의 표시되지 않고 꽃은 주황색 얼룩일 뿐입니다. 그림의 배경은 프랑스 우아즈 (Oise)의 르 매스닐 테리부(Le Mesnil-Theribus)에 있는 카사트의 집 온실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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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카사트, <창가의 라일락>, 1880-1883, MET



보라색과 흰색 라일락이 들어 있는 어두운 가지 꽃병이 온실의 문턱이나 작업 표면으로 보이는 곳에 놓여 있고, 인접한 창문은 소품으로 열려 있습니다. 이 가장 단순한 주제는 정원과 꽃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 아닌 Cassatt 최고의 작품의 각진 유창함과 대시 특성으로 표현됩니다. 순수한 정물은 그녀의 작품에서 매우 드물며 일반적으로 인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 풍경이나 꽃 요소를 다채로운 배경과 악센트로 배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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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카사트, <말리 정원에서 뜨개질하는 리디아>, 1880, MET



이 그림에서 그녀는 세련된 옷을 입고 벽으로 둘러싸인 정원으로 현대적인 허풍으로부터 떨어진 언니 리디아를 묘사했습니다. 리디아는 노동계급 여성의 공장 제조가 확대되면서 부유층이 점점 더 높이 평가하게 된 일종의 구식 수공예품에 푹 빠져 있습니다. Cassatt는 일반적으로 야외 그림에 관심이 없었지만 이 작품, 특히 Lydia의 커다란 흰색 모자에서 눈부신 햇빛의 효과를 아름답게 포착했습니다.


크루즈 승객들 중에는 뜨개질하는 여성들이 많습니다. 우리와 친하게 지내는 엘리자베스도 바나 카페에 앉아 열심히 뜨고 있어 무엇을 뜨는지 물어보았지요. 스코틀랜드에 사시는 친정 엄마에게 드릴 무릎담요를 뜨고 있는데 에든버러 도착하기 전에 완성을 해야 하는데 시간이 될지 모르겠다고 걱정을 하는군요.


짧은 쇼커트의 금발머리에 작고 통통해서 그녀의 미소만큼이나 귀여운 여인, 자넷은 저를 만날 때마다 '달링 darling'이라고 인사합니다. 이 얼마나 sweet합니까. 함께 우클렐레 수업도 참여하는데 미리 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늘 뭔가를 만들고 있습니다. 비즈로 목걸이를 만든다든지, 베이지색 에코백에 비즈로 패턴을 만들며 화려하게 옷을 입히고 있습니다.



해상일에는 수공예 시간이 있습니다. 원단으로 가방을 만들거나, 종이꽃을 만들거나, 책갈피, 접는 부채 등등 다양합니다. 에코백 만드는 것은 관심이 있어 시작 시간에 맞춰 갔더니 이미 정원이 다 차서 1시간 후에나 가능할 것 같다고 하더군요. 하여 실망하고 쌩 돌아섰는데 다음 날 우클렐레 시간에 시(sea) 상이 어제 수공예 시간에 만든 것이라고 하면서 작은 손가방을 보여줍니다. 잘 만들었다고 긍정의 반응을 보여줬습니다.



크루즈 해상일에는 다양한 Get - Together 모임이 있습니다. 전직이나 취미, 소유 등 다양한 이름으로 서로 친목을 도모하고 정보를 나눕니다.

- Singles and Solo Travelers

- Ballroom Get Together

- Teachers

- Boat Owners

- Dart Players

- Airline Employee

- Knitters & knatters : 뜨개질도 함께 합니다.



편혜영 작가의 단편소설 <초록 스웨터>에는 엄마가 죽기 전 미처 다 뜨지 못한 초록색 스웨터를 들고 주변인들, 엄마의 친구들과 함께 떠 나가는 과정이 있습니다. 삐뚤빼뚤 골의 크기가 각각 다르게 짠 스웨터를 "이모가 이미 뜬 부분을 조심스럽게 풀기 시작했다. 실이 꼬이거나 한꺼번에 풀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한 땀씩 풀어냈다. 나로서는 한번 틀리면 회복 불가능하다 여겨지는 것을 이모는 망설이지 않고 고쳐나갔다....P.186-187"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저 역시 코로나 기간에 코바늘을 거의 50여년만에 잡으며 한 땀 한 땀, 한 바늘, 한 바늘 코를 이으며 가방을 만들고 모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말했었지요. "뜨개질의 좋은 점이 무엇인지 아니? 잘못 만들면 코를 풀어 다시 뜨면 되는 거야. 다행이지. 우리 삶은 안 그런데..." 그런 말을요. 우리 삶도 이미 뜬 부분을 풀고 다시 뜰 수 있으면 좀 더 평화롭겠지요. 세상이 시끄럽고 혼미하니 이런 부질없는 생각까지도 해 보게 되는군요.



하선일이 다가오면 취미반 별로 전시회도 합니다. 모자 장식, 액세서리, 그림, 뜨개질 등 다양합니다. 그들의 표정은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이 넘칩니다. 보기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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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카사트, 그녀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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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카사트: 현대 여성의 회화, 다큐멘터리 1시간 33분 영화가 2023년

알리 레이 감독



영화는 메리 카사트(Mary Cassatt)는 주변 여성들의 삶을 그리는 것으로 경력을 쌓았습니다. 그녀의 급진적인 이미지는 여성을 지적이고 여성적이며 실제적인 존재로 보여주었고, 이는 여성이 예술에 등장하는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녀의 놀라운 판화, 파스텔 및 회화를 선보이는 이 영화는 그녀가 그린 여성들만큼이나 모순으로 가득 찬 자신의 경력을 가진 종종 간과되는 인상파 화가를 소개합니다.




사랑의 뒷면

미국의 위스콘신대 심리학 교수를 역임한 해리 할로(Harry Frederick Harlow, 1905~1981)의 ‘원숭이 애착 실험’은 심리학의 판도를 바꾼 중요하고 놀라운 실험이었습니다. 그는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으로 연구를 시작했고, ‘접촉이 주는 편안함’과 ‘함께 함’을 사랑의 본질적인 요소로 간주했습니다. 할로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지만, 그의 아버지는 실패한 발명가였고, 어머니는 결코 따뜻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할로는 평생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고 합니다. 그는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으나 시와 그림에는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언어 장애가 있던 그는 말 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부끄러워했으며 대화가 많이 필요하지 않은 연구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미국 코넬대학교 교수였던 로버트 스턴버그(Robert Sternberg, 1949~ )는 미국의 뇌신경과학 및 인지심리학의 권위 있는 심리학자이며 미국 심리학회 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는 ‘3 요인 지능 이론’ 뿐만 아니라 ‘사랑의 삼각형 이론’도 주장하였지요. 어떻게 사랑이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비판도 있었지만, 그만큼 변덕이 심한 우리네 감정의 비중을 더 많이 고려한 비판이겠지만 지능을 연구하던 스턴버그 교수가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더랍니다. 자신의 감정, 사랑을 더 잘 알기 위해 연구를 하게 되고 그 결과가 '사랑의 삼각형 이론'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속적이고 긍정적인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친밀감(intimacy), 열정(passion), 헌신(또는 개입, commitment)의 세 가지 요소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제안하면서, 완전한 사랑(성숙한 사랑)은 세 개의 사랑 구성요소가 모두 존재할 때이고, 헌신(또는 개입, 책임)만 있는 사랑은 공허한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스턴버그는 어느 구성요소가 사랑에 적용되었는지에 따라 사랑의 유형이 7가지로 달라진다고 구분하였습니다.



사랑 때문에 아프고 그 사랑 때문에 깊은 상흔을 입기도 합니다. 사랑 관계를 지속할 기회를 증진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연구들은 진솔한 자기 개방을 효율적인 의사소통으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진행하며 상대와의 관계에서 긍정적인 특징을 주목하며 효과적인 갈등 해결을 시도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랑의 과정에는 감정과 인지적인 측면과 행동이 함께 포함되는 것을 이해해야 하지요. 한때는 사랑이었을 수 있으나 그 사랑이 떠나간 것으로 자신을 잃어버릴 정도의 고통과 좌절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는 “사랑은 자아를 떠받드는 중요한 사회적 토대의 하나다.”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개인의 자존감과 가치를 키우는 데 사랑만 한 게 없다고 주장합니다. 맞는 말이지요. 부부간의 사랑, 부모 자녀 간의 사랑, 형제자매 간의 사랑, 연인 간의 사랑, 도처에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긋난 사랑, 결핍된 사랑이 아프게 합니다.



비운의 천재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과 로댕

예술가 중에는 비운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반기지 않는 출생으로 삶을 시작하여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삶을 마감했던 비운의 천재 조각가인 카미유 클로델(Camille Cloudel,1864~1943).


카미유는 세상에 태어나던 순간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슬프지요. 자신의 존재가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태어난 unwanted baby들은 성장하면서 많은 심리적인 문제와 고통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카미유의 아버지는 상당한 지위가 있는 공무원이었고,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카미유가 환영받지 못했던 것은 그녀가 태어나기 일 년 전에 세상에 태어났다가 보름 만에 세상을 떠난 장남 샤를 앙리 클로델 때문입니다. 아들을 잃은 카미유의 부모는 크게 상심하였고, 다시 아이를 가져서 15개월 만에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딸인 카미유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실망감에 거리를 배회했고, 어머니는 그녀의 존재조차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답니다. 성숙한 부모의 역할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각자 자신의 발달과정에 따른 과업을 잘 수행하는 환경과 노력이 중요합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 특히 자녀에게 해가 되는 부모가 될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카미유는 부모로부터 적절한 보살핌도 받지도 못한 채 초기 유아기를 보내고야 말았지요. 에릭슨에 의하면 출생 후 일 년 동안의 기간에 보살핌을 잘 받지 못하면 세상을 불신하게 된다고 하며 이런 사람을 훗날 조현병이나 편집형 인격장애에 걸릴 수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딛고 선 환경이 늘 불안하고 불안정하니 흔들릴 수 밖에요. 무릇 부모는 자녀에게 안전한 환경을 제공하고 아낌없는 정서적 지지를 따뜻하게 보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던 카미유는 혼자서 흙을 만지며 노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고, 점토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9살에 당시 40대 중반이던 오귀스트 로댕(Francois- Auguste- Rene Rodin, 1840~1917)의 아틀리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로댕은 전통적인 조각 기법에서 벗어나 매끄러운 피부 대신에 사실적인 울퉁불퉁한 굴곡진 표현으로 조각을 비쳐주는 빛의 효과도 중시한 인정받는 조각가였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해서였을까요, 카미유는 아버지 같은 존재인 로댕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로댕의 제자이자, 연인이며, 예술의 동지이자 영감의 원천이기도 했습니다. 로댕은 그녀의 천재성을 인정하여 제자들에게 점토작업만 맡긴다는 규칙을 깨고 그녀에겐 작품의 일부를 만들도록 했으며 당시 여성 예술가를 무시하는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카미유는 조각계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카미유를 사랑했지만 그녀의 놀라운 재능이 두렵기도 했던 로댕.


두 사람의 사랑은 십여 년 만에 끝이 나고야 말았습니다. 로댕의 사랑은 예전과 달리 식어갔고, 계속되는 카미유의 성공은 그의 예술적 지위까지 위협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로댕과 카미유는 예술적인 이유를 들어 결별했고, 로댕은 사실혼 관계인 로즈 뵈레에게로 가버렸습니다. 로댕과의 결별 후 그녀는 로댕과 비평가와 싸워야 했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점점 예술계에서 멀어졌고, 그녀의 작품은 로댕의 아류라는 평을 받은 채 잊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점차 세상을 멀리하게 되었으며 아틀리에에서 12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칩거하기에 이르렀지요. 그녀는 로댕과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미행하며 자신에게 해를 입힌다는 망상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여겼지만 어머니와 남동생은 그녀를 부끄러워했습니다. 결국 1913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녀는 어머니와 남동생에 의해 빌레-브라르 정신병원으로 보내졌고, 1914년 아비뇽의 몽트베트게 병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이후 30년 동안이나 수용되었습니다. 당시의 정신병원은 열악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제대로 된 치료약도 없었고, 인권이 유린되어 묶이거나 감금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지요. 그렇게, 가족들에게까지 버림받은 채 그곳에서 30년간 고통의 시간을 보내다 79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반면, 로댕은 시대의 조각가로서 급부상해 명성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여인과 더 열정적인 사랑을 지속해 갔습니다. 성공과 명예를 거머쥐며 승승장구해 원하던 삶을 살아나간 것입니다.


오늘날이었다면 카미유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날엔 치료약과 치료법이 충분히 발달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치료를 받아서 일상으로 돌아가서 예술활동을 계속했을 것이고, 또 설령 사회 적응이 어려워서 정신병원에서 오랜 기간을 보낸다 해도 인권이 유린되지 않고 상당한 자유를 누리며 예술성과 창조성이 발휘되도록 도움을 받아서 지냈을 것입니다. 또 남자가 아니어서 예술가로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배척당하는 수모를 겪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시대와 불화한 예술가는 불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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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클로델, <중년>, 1893~1899, 오르세 미술관



3 명이 하나의 그룹으로 등장하는 이 조각은 두 명의 여자 사이에서 고민하는 로댕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카미유 클로델은 로댕이 자신의 손을 잡아 주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무릎 꿇고 애원하는 모습. 이 작품에 카미유는 인간들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담으려고 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늙은 남자로 표현된 인간은 성숙 마지막 단계인 인생의 황혼기에서 젊음이 내민 손길을 잡을 수도 없이 늙음에 끌려 죽음을 향해 걸어가게 됩니다. 앞 쪽의 두 명은 벗고 있는 몸을 감싸는 큰 천에 둘러싸여 있는데, 이 천은 바람에 날리면서 죽음을 향해 가는 시간의 속도감을 표현한다고 해석합니다.



메트로박물관은 로댕의 조각 작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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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로댕, <The Burghers of Calais>, 1884-1895, MET


칼레의 시민(1884~95)은 로댕의 가장 유명한 공공 기념물입니다. 이 경우 석고와 청동 모형은 로댕이 독립 작품으로 간주했던 의뢰의 여러 단계에서 진행된 소규모 및 대규모 연구입니다. 이 기념비는 프랑스 도시 칼레의 주요 시민(시민) 6명의 영웅적 행위를 기념합니다. 14세기에 백년전쟁이 시작되자 그들은 영국 왕의 도시 포위 공격을 해제하는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의 절망과 떨리는 용기를 묘사함으로써 로댕은 현대의 영웅적 이상에 도전하고 과거의 사건을 즉각적이고 현실적으로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The Burghers of Calais의 실물 크기 청동상이 Carroll and Milton Petrie 유럽 조각 법원(갤러리 548)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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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로댕, <The Age of Bronze (L'Age d'airain)>, 1876, MET



청동기 시대, 황동 시대, 정복자(Le Vaincu), 인간 시대, L'Homme des Premiers Ages 또는 l'Homme qui s'éveille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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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로댕, <생각하는 사람>, 1880, M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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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사람은 로댕의 기념비적인 청동 출입구인 지옥의 문 삼인방 위에 앉아 저주받은 자의 운명을 생각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The Thinker의 독립 청동은 특히 미국 후원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습니다. The Met의 로댕 컬렉션의 주요 창립자인 Thomas Fortune Ryan은 조각가의 스튜디오에서 이 모형을 의뢰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생각하는 사람>은 로댕이겠지요. 20세기 초의 한 평론가에 따르면, 잔인하게 근육질이면서도 생각에 잠겨 있고, 긴장감에 감겨 있지만 휴식이 느슨해진 이 조각품은 "꿈과 행동"을 모두 구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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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로댕, < Head of Sorrow>, 1882, MET



이 중성적인 머리는 갈망, 혼란, 취약성 및 고통을 똑같이 표현합니다. 그 모호함 덕분에 로댕은 머리를 다른 신체와 합쳐서 남성과 여성의 모습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더 작은 규모로 다른 요소와 결합된 Head of Sorrow는 The Gates of Hell에서 4번 등장합니다. 로댕은 그 반복이 문에 일관성이나 집단적 슬픔을 불어넣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생각하는 사람>의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연인으로 소개된 영화로, 이자벨 아자니가 주연했던 1989년 작품에 이어 줄리엣 비노쉬가 주연했던 2013년 작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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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스터의 여주인공 줄리엣 비노쉬의 눈동자에 정현우 시인의 <사랑의 뒷면>이 오버랩됩니다.


<사랑의 뒷면>

정현우


참외를 먹다 벌레 먹은

안쪽을 물었습니다.

이런 슬픔은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뒤돌아선 그 사람을 불러 세워

함께 뱉어내자고 말했는데

아직 남겨진 참외를 바라보다가

참회라는 말을 꿀꺽 삼키다가

내게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

먼 사람의 뒷모습은

눈을 자꾸만 감게 하는지

사랑에도 뒷면이 있다면

뒷문을 열고 들어가 묻고 싶었습니다.

단맛이 났던 여름이 끝나고

익을수록 속이 빈 그것이

입가에서 끈적일 때

사랑이라 믿어도 되냐고

나는 참외 한입을

꽉 베어 물었습니다.




긴 시간 머물며, 여기서 꼭 보고 싶었던 프레드릭 레이턴의 <타오르는 6월>과 존 싱어 사전트의 <마담 X>를 못 보았는데 -경비원 말로는 대관을 나갔다고 - 아쉬운 마음은 다음 방문까지 담아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도슨트 투어를 끝내고 미술관 내에 있는 카페에서 가볍게 점심을 먹고 햇빛이 쏟아지는 곳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습니다. 주말이라 그런지 관람객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단체로 온 학생들도 많아 미술관 각 전시실은 소란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바쁜 시간이고 손님들이 줄 서서 기다리는 상황이어서 그런지 카페 근무자들은 친절하지 않더군요. 근무자들을 늘리거나 카페 공간을 늘리면 근무자들의 얼굴 표정도 좀 더 환하고 밝아지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되면 카페를 이용하는 손님들도 더 행복 해졌겠지요. 점심과 휴식을 취한 후 자율적으로 MET의 미로를 탐험했습니다.



책과 사진에서 보았던 각국에서 수집한 유물들과 회화 작품을 보는 것은 작은 가슴을 환희로 방방 뛰게 했습니다. 로마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 여신 이시스를 기리기 위해 지은 <덴두르 신전>이 전시된 공간에서의 시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덴두르 신전> 유치를 위한 치열한 경쟁 끝에 최종 승자가 된 메트로폴리탄의 노력으로 우리는 마치 나일강을 건너듯 신전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집트에서 신전을 지켰을 스핑크스가 앉아 있는 고정된 자세로 우리를 지켜봅니다. 스핑크스는 밤낮으로 자신의 앞과 옆을 스치면서 지나가는 관람객들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문득 궁금했습니다. 밤에 신전을 보게 된다면 신전 그 자체에 온전히 시선이 머무르게 된다고 하는데 낮 시간만을 이용했던 우리는 다음 날 어느 밤 시간을 기약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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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은 인간성의 상실로 받아들였다는 훈데르트 바서의 ”혼자 꿈을 꾸면 꿈에 그치지만 모두가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다 “라는 의미를 직선과 수직의 도시 맨해튼에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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