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섬에선 모든 것이 조금 늦게 흐르는 것 같습니다.
바람도, 사람도, 시간도.
햇살을 길게 눕고, 바다는 아무 말 없이 출렁입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과는 달리, 이곳 키웨스트의 시간은 자신만의 리듬으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틀간의 뉴욕 기항 후. 다시 이틀을 항해하여 키웨스트 Key West에 도착했습니다.
산호초로 이루어진 섬으로 지면과 해면의 표고 차이가 거의 없는 상태로, 바닷물 위로 조금 올라온 육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최남단 땅끝마을로 길이 6.4km, 너비 1.6km에 불과한(맨해튼의 약 22% 규모), 거주 인구수가 27,000명 정도의 작은 규모의 키웨스트는 미국 1번 국도의 시발점입니다. 높은 상공에서 보면 마치 얇은 사각형의 과자가 바다 위에 떠 있는 형태입니다. 미국 최남단인 키웨스트는 수상 스포츠, 활기 넘치는 밤의 유흥, 해변, 유적지, 파스텔 톤의 소라고둥 스타일 건축물로 유명합니다. 우리처럼 해상이 아닌 육로로 키웨스트에 오게 된다면 작은 섬들을 이어주는 길게 뻗은 도로를 이용하여 옥색 빛의 눈부신 바다를 바라보며 오게 됩니다. 이 길은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즐길 수 있는 도로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키웨스트는 한 발은 미국 본토에, 다른 한 발은 카리브해에 걸치고 있습니다. 파스텔 빛깔의 투명하고 눈이 시린 바다, 일 년 내내 피는 꽃들이 심어진 예쁜 정원 등 눈길을 사로잡는 곳입니다. 이 섬은 작지만 즐길 것과 맛있는 것이 풍부합니다. 선상에서 바로 조리한 해산물, 이국적 농산물과 얼굴을 발그레하게 만들어 줄 열대 칵테일까지 여행자들을 위한 취향과 감각을 만족시킬만한 매력적인 지역입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0여 년 살았던 곳(1931~1939)으로 그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영감을 준 곳으로 매 시간이 해피 아워인, 키웨스트(Key West)라는 이름은 스페인어 "Cayo Hueso"에서 유래되었습니다. "Cayo Hueso"는 영어로 "Bone Key" 또는 "뼈 섬"을 의미합니다. 이 이름은 스페인 탐험가들이 이 지역에 도달했을 때, 섬에서 많은 뼈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전해집니다. 이 뼈들은 아마도 원주민들의 유골일 가능성이 큽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영어를 사용하는 정착민들이 "Cayo Hueso"를 잘못 듣거나 변형시켜 "Key West"라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Key"라는 단어는 작은 섬을 의미하는 스페인어 "cayo"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 지역의 작은 섬이나 암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키웨스트라는 이름은 지리적 특징(작은 섬)과 이 지역에 처음 도달한 스페인 탐험가들과의 역사적 만남을 반영한 결과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서쪽으로 가는 열쇠라는 의미에서 접근한다면, 카리브해를 지나 쿠바에 도달하게 됩니다.
부두에서 시내 중심가인 Duval street 까지는 5분도 안 걸리는 것 같습니다.
배가 정박한 부두에서 약 10분 정도 걸으면 최남단 표시 기념물이 있습니다. 팽이를 거꾸로 세운듯한 형태로 여기서 인증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습니다.
여기서 90마일 약 144km 거리에 쿠바가 있음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곳에 서면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남쪽으로 갈 수 없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념비는 무언가 끝을 뜻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는 장소처럼 다가왔습니다. 대서양과 멕시코만을 바라보며 서 있는 이 기념물은 나에게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경험을 선사했습니다. 이곳에서 남쪽을 향해 멀리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내가 그동안 여행하며 마주했던 세계의 끝자락을 다시금 되새겼습니다. 쿠바 공산화 이후 수많은 쿠바인들이 플로리다로 이주한 것은 지리적 요인이기도 합니다.
키웨스트의 건축 스타일은 이 지역의 열대성 기후와 자주 발생하는 허리케인 등의 기후적 특성에 적합하게 더위와 습도를 고려해 자연환기를 잘 시킬 수 있는 구조가 필요했고, 또한 바람과 비를 잘 견딜 수 있는 건축 자재와 디자인이 선택되었습니다. 키웨스트의 건물들은 대개 목재로 지어졌으며, 대부분 1~2층의 저층 건물입니다. 이는 열대 지방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강한 바람과 폭풍에 대비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많은 건물들은 큰 베란다나 외부 통로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는 지역의 더운 날씨를 고려해 외부에서 바람이 잘 통하게 하여 통풍을 개선하고, 더위를 피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키웨스트의 건물들은 보통 얕은 경사의 지붕을 가지고 있으며, 금속으로 된 지붕이 일반적입니다. 이는 장마철의 비가 빠르게 흐를 수 있도록 도와주며, 바람에 강한 특성을 갖추기 위함입니다. 키웨스트의 건물들은 대부분 밝고 화려한 색상으로 칠해져 있습니다. 이는 이 지역의 문화와 특유의 분위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건물들이 햇볕을 반사하고, 열을 덜 흡수하게 돕는 효과도 있습니다. 이러한 건축 스타일은 ‘키웨스트 스타일(Conch Style)’이라고 불립니다.
키웨스트의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어디든 걸어서 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거동이 불편하거나 걷기가 수월하지 않은 여행자들은 올드 타운에서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트롤리를 타고 키웨스트의 많은 명소까지 자유롭게 타고 내릴 수 있습니다. 원하는 시간에 탑승하고 하차할 수 있는 유연성이 있으며, 운전기사의 전문적인 해설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올드 타운 키 웨스트(Old Town Key West)는 방문객에게 수세기에 걸친 매혹적인 역사, 문화 및 건축물을 탐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Old Town에는 Sunset Pier, Green Parrot Bar, Duval Street 및 Hemingway Rum Company를 포함하여 도시 정체성의 독특한 부분을 제공하는 상징적인 명소가 많이 있습니다.
이 인기 있는 거리에는 유명한 소매점, 레스토랑, 그리고 1933년에 개장하여 미국 역사 랜드마크로 지정된 Sloppy Joe's Bar 등이 있습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도 듀발 스트리트(Duval Street)를 오가며 떠들썩한 밤을 며칠씩 보냈다고 합니다. 듀발 스트리트(Duval Street)는 1마일이 넘는 거리를 따라 다양한 선택이 가능한 상점을 찾을 수 있는 섬의 인기 있는 목적지입니다. 거리에 있는 많은 건물들도 역사적인 건물이므로 쇼핑 경험에 추가적인 매력을 더해줍니다.
파나마모자를 구입하려고 상점에 들렸는데 예상보다 매우 높은 가격입니다. 판매원에 따르면 쿠바에서 수제로 만들어 들어온 것이라 고가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구입하지 않고 크루즈 선내에 있는 면세점에서 구입했습니다.
키웨스트에서 "소라"라는 용어는 섬의 원주민과 멕시코만에 사는 큰 바다 달팽이를 의미합니다. 소라는 키웨스트의 상징이 되었으며, 원주민들은 스스로를 '소라'라고 애칭 합니다. 이 소라고둥은 단결, 질서, 권위를 상징하는 힘을 상징합니다. 키웨스트 주민들 중 다수는 1830년 이후 점점 더 많은 수가 도착하는 콘치('콘크스'로 발음)로 알려진 바하마 출신의 이민자들이었습니다. 20세기에 키웨스트의 많은 주민들은 자신들을 "콘치(Conchs)"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제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키웨스트의 모든 주민들에게 적용됩니다. 일부 주민들은 키웨스트에서 태어난 사람을 지칭하기 위해 "소라"(또는 "소금수 조가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반면, "담수 조가비"라는 용어는 키 웨스트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키웨스트에 살았던 거주자를 지칭합니다.
Conch의 진정한 원래 의미는 바하마에서 이주한 유럽 조상을 가진 사람에게만 적용됩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집 앞 장대에 소라껍데기를 올려놓았다고 합니다. 나중에 도착한 흑인 바하마 이민자들 중 다수는 "바하마 마을"이라고 불리는 트루먼 별관 옆 올드 타운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19세기 초 키웨스트의 주요 산업에는 어업, 소금 생산, 인양업이 포함되었습니다. 1860년 난파 사고로 인해 키웨스트는 플로리다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이자 미국에서 1인당 가장 부유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많은 주민들이 인근 플로리다 암초에서 난파선을 인양하는 일을 했으며, 이 마을은 고급 가구와 샹들리에가 유난히 많이 밀집된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식당의 메뉴에도 콘치 Conch를 덧붙인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중심가인 Duval Street를 지나 최남단 표시 기념물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오면서 헤밍웨이가 한때 거주했던 사설박물관,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리틀 화이트 하우스(Little White House)', 등대 등을 방문했습니다.
선내 기항지 관광 프로그램에는 헤밍웨이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그가 먹고 마시고 살았던 프로그램’도 인기 있는 투어 중 하나입니다. 헤밍웨이는 동네 술집 ‘슬로피 조스’의 단골이 되었다는데 술에 취하면 자신의 집 옆에 있는 등대를 보고 집을 찾아갔다고 하는데 그 거리에 있는 다른 바에도 헤밍웨이의 사진이 거의 다 걸려 있습니다.
헤밍웨이 사진이 들어간 티 셔츠를 한쪽에서 판매하는 데, 구입 후 바로 즉석에서 환복을 하고 술을 즐깁니다. 헤밍웨이가 즐겨 마셨다는 술을 주문하면서 키웨스트의 시간을 즐기는 여행객이 많습니다.
Sloppy라는 뜻은 정리정돈이 안 되는, 너절한, 질퍽한, 엉성한, 대충 하는, 지저분한 그런 뜻이라고 하는데, 분위기는 소란스럽고 과장된 유쾌함이 떠다닙니다.
크루즈 승무원인 destination expert(기항지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전문가) 루카는 키웨스트에 대한 설명에서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전해줍니다. 키웨스트에서 헤밍웨이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겠지요.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 1961)는 미국의 소설가, 종군기자이며 노벨문학상 수상하였으며 ‘잃어버린 세대’ 작가들 중 대표 3인방 중 하나로 후배 작가들이 가장 많이 롤모델로 삼는 작가입니다. 일리노이주 오크 파크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예술을 사랑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2남 4녀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출생했습니다.
사냥꾼이며 모험가 기질인 아버지와 잔소리 많은 전직 음악가 어머니는 자주 갈등과 불화를 보였으나,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아버지를 평생 존경하고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다고 합니다.
헤밍웨이는 20세기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으로, 그의 성장 과정과 성인기의 삶은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인 심리적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가 음주를 즐긴 이유를 고려해 볼 때, 헤밍웨이가 경험한 여러 감정적 고통과 갈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헤밍웨이는 젊은 시절부터 전쟁과 폭력, 가족 내 갈등을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가 내면에서 느끼는 불안과 공허함을 술로 채우려는 경향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참전 후 그는 트라우마와 우울증을 경험하며, 이를 음주와 같은 방어적 기제를 통해 해소하고자 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에게 음주는 불안감이나 내적 갈등을 피하고, 일시적인 안정을 찾으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헤밍웨이는 '강한 남자'라는 이미지를 내세우면서도, 내면적으로는 깊은 외로움과 불안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술은 그의 정신적 고통을 잠시나마 완화시킬 수 있었지만, 동시에 그가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식을 더욱 비효율적이고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헤밍웨이는 네 번의 결혼을 했으며, 각 결혼은 그의 심리적 상태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한 사람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기보다는, 여러 여성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정의하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애착을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음을 시사합니다. 그가 여러 여성을 두고 갈등을 겪고, 종종 충동적으로 결혼하고 이혼했던 배경에는 깊은 불안감과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헤밍웨이의 초기 경험 중 하나는 그의 어머니와의 관계였습니다. 어머니는 그에게 매우 강하고 지배적인 인물이었고, 그로 인해 헤밍웨이는 여성에게서 강한 존재감을 기대하는 동시에, 여성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을 갖게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불안정한 애착은 그가 여성과의 관계에서 일관된 감정적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고, 결국 여러 여성을 거쳐 불완전한 관계를 반복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평생 인생을 격렬하고 폭력적이며, 진취적인 진정한 마초로 살았습니다. 그는 끓어오르는 정열을 주체하지 못해, 사냥, 복싱 등 위험하고 강렬한 스포츠를 즐기고, 싸움도 꽤 잘했다는 등 자신의 강인함을 세상에 자랑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헤밍웨이는 거주 장소를 자주 옮겼는데 이러한 경향은 그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안정보다 자유와 모험을 중시한 인물로, 자신이 속박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삶은 여러 차례의 정신적 위기와 트라우마로 가득 차 있었고,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그가 자신의 내적 갈등과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물리적으로 '떠나는'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장소를 바꾸는 것은 헤밍웨이에게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고, 동시에 과거의 상처나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헤밍웨이 집은 2층으로 대지가 1천 평 대저택으로 키웨스트의 개인 수영장 중에 가장 큰 수영장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이 집은 헤밍웨이의 두 번째 부인인 폴린의 삼촌이 집을 마련해 주었는데 헤밍웨이가 스페인에서 다른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즐기는 것에 화가 난 폴린이 헤밍웨이의 복싱장을 부수고 수영장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수영장을 만드는데 거금인 20,000달러가 들었는데 이것은 집 값의 네 배가 넘는 큰 금액이었답니다. 스페인 내전에서 돌아온 헤밍웨이가 이 명세서에 놀라 아내인 폴린에게 “내 마지막 1센트까지 가져가라!”며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1센트를 던졌다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헤밍웨이 사후 부인이 이웃집에 매각하였고, 이 건물은 1968년 미연방 정부가 국립역사기념물로 지정해 사설박물관으로 운용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등의 초고 작업에 집중했고, <노인과 바다>의 줄거리를 구성했다고 합니다. <노인과 바다>로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무기여 잘 있거라>, <노인과 바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파리는 날마다 축제> 등의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1954년 노벨문학상 시상식에 불참한 헤밍웨이는 다음과 같은 수상 소감을 서면으로 전했습니다.
“작가로서 글을 쓴다는 것은, 최상의 상태에서조차 고독한 삶입니다. 단체나 조직은 잠시나마 작가들의 고독을 덜어 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작가의 글을 향상해 줄지는 의문입니다. 작가는 고독에서 벗어나면서 명성이 높아지기도 하지만, 그러다 보면 흔히 작품의 질은 퇴보하기 마련입니다. 작가는 혼자서 글을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며, 훌륭한 작가라면 영원한 고독 또는 영원한 고독이 주는 결핍과 매일매일 부딪혀야 합니다. 진정한 작가에게 있어 매 작품은 성취감을 뛰어넘어 어떤 것을 얻기 위해 다시 시도하는 새로운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없거나, 혹은 다른 이들이 시도했으나 실패한 무언가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다 때로 행운이 따르게 되면 그는 성공할 것입니다.”
노인이 되면서 늙어 약해지는 자신을 싫어하게 되었고, 1차 대전 당시 부상을 당한 것을 시작으로, 말년의 비행기 사고로 크게 다쳐서 그 후유증이 커졌다고 합니다. 말년에 그는 여러 차례 자살 시도를 하였고 우울증으로 입원 치료를 받았다가, 결국 7월 2일 이른 아침, 그는 자신에게 헌신적이었던 아내를 자게 놔둔 자살해 생을 마감합니다. 안타깝게도 그를 포함해서 그의 가족 중 5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희망을 버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그뿐만 아니라 난 그건 죄악이라고 믿는다”는 <노인과 바다>의 명문장은 그의 흔들리는 혼란된 마음을 다잡으려는 희망의 표현이었나 봅니다.
아이다호주 선밸리에 위치한 헤밍웨이의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추도문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가을을 사랑했다.
미루나무 잎사귀는 노랗게 물들고
그 잎사귀는 송어가 헤엄치는 개울 위를 떠내려가며
높은 언덕 위로는
바람 한 점 없는 푸른 하늘만 있구나.
... 이제 그대도 자연의 하나로 영원히 남기를.
박물관은 헤밍웨이가 사용했던 가구와 물건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그의 작품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헤밍웨이가 이 집에서 생활하며 겪은 이야기를 담은 오디오 가이드도 제공되어, 그가 이곳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헤밍웨이가 이 집에서 지내며 수집한 푸른 돛단배와 거대한 수족관 등은 그의 삶과 키웨스트에서의 특별한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헤밍웨이의 집을 둘러보며 그가 이곳에서 느꼈을 평화와 고독, 그리고 창작에 대한 갈망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집 앞마당에서 자주 보이던 고양이들은 그의 집을 아직도 지키고 있는 듯 보였고, 그 모습은 헤밍웨이가 키웨스트에서 보낸 시간이 그만큼 소중하고 의미 있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헤밍웨이 거주지 옆에는 하얀 등대가 있습니다. 이곳은 키웨스트의 역사적인 뼈대를 이루는 장소로, 대서양과 멕시코만을 잇는 항로의 중요한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등대 꼭대기까지 작고 좁은 88 계단을 올라가면 키웨스트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등대를 지나면, 1945년부터 1953년까지 미국의 제33대 대통령으로 재임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리틀 화이트 하우스(Little White House)'가 나타납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는 전쟁을 끝내는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었지만, 논란도 있었습니다. 유럽 재건을 위한 경제적 지원을 제공한 "마셜 계획"을 통해, 유럽 국가들이 전후 재건을 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 전쟁(1950-1953)을 시작할 때 미국의 지원을 결정하며, UN군을 파병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키웨스트의 리틀 화이트 하우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집은 키웨스트의 1 Whitehead Street에 위치해 있으며, 원래는 해양 군 관계자들의 휴양지로 사용되었으나, 트루먼이 이곳을 휴양지로 선택하면서 유명해졌습니다. 그는 총 175일 동안 이곳에서 지냈으며, 이곳에서 중요한 외교적, 정치적 결정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리틀 화이트 하우스는 트루먼 대통령이 키웨스트에서 일하면서도 평소처럼 업무를 계속 진행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이 집에서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과 통화를 하고, 중요한 정책을 논의하며, 여러 가지 행정적 결정을 내렸습니다. 또한,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개인적인 시간을 보냈습니다.
현재 리틀 화이트 하우스는 입장료를 받는 박물관으로 개방되어 있으며, 방문객들은 트루먼이 사용했던 가구와 기기들, 그리고 당시의 역사적 순간들을 엿볼 수 있는 전시물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은 키웨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명소 중 하나로, 트루먼 대통령과 그의 정치적 유산을 기리는 장소로 여겨집니다.
키웨스트는 단순한 관광지 이상의 의미를 가진 곳입니다. 이곳은 미국의 역사, 해양 문화, 그리고 문학적 유산이 얽혀 있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해리 트루먼이 이곳에서 결정을 내리고, 헤밍웨이가 삶의 의미를 찾았던 이 섬은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지점이며, 역사와 문학,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숨 쉬는 곳입니다.
여기 키웨스트의 느릿한 흐름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일상의 경계를 허물고, 마음 깊은 곳에서 잊고 있던 평화를 다시 일깨우는 시간을.
맑고 청명한 키웨스트의 하늘과 솜털같이 부드러운 모습의 구름과 야자수들을 뒤로하고 다시 크루즈로 승선했습니다. 우리 배는 이틀을 더 항해하고 파나마운하를 통과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