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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하기만 한 말

by 윤재

41. 있는 그대로, 라는 말


있는 그대로, 라는 말

손택수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뭐냐면 있는 그대로더라

나이테를 보면서 연못의 파문을, 지문을,

턴테이블을, 높은음자리표와 자전거 바퀴를

연상하는 것도 좋으나

그도 결국은

나이테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만은 못하더라

누구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지만

평화 없이는 비둘기를 보지 못한다면

그보다 슬픈 일도 없지

나무와 풀과 새의 있는 그대로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어졌나

세상에서 제일 아픈 게 뭐냐면,

너의 눈망울을 있는 그대로 더는

바라볼 수 없게 된 것이더라

나의 공부는 모두 외면을 위한 것이었는지

있는 그대로, 참으로

아득하기만 한 말


--손택수,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창비, 2020 중에서



새로 한 주가 시작하는 월요일에

제게 다가온 시가 <있는 그대로, 라는 말>입니다.


사물의 본질을, 상황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데...

이미 내가 겪어온, 살아온 시간만큼의 두께가

세상과 사물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데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아쉽습니다.


시 속에서 나이테는 단순한 나무의 흔적이 아니라, 연못의 파문과 지문, 턴테이블, 높은 음자리표, 자전거 바퀴로 변주되며 이 연상들은 아름답고 흥미롭지만, 결국 나이테 그 자체를 바라보는 일보다

못하다고 시인은 말합니다만...


저는

열려있는 선이 아닌

막혀 있는 원.

한 곳으로 가둘 수 있는, 안쪽과 밖을 구분할 수 있는 원을 보게 됩니다.


관계 속에서도 진심보다는 의미를 찾고, 감정보다는 해석에 기대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판단하려 드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진정한 소통은 점점 어려워지고, 결국 "있는 그대로"는 아득한 이상처럼 멀어져 가는 것은 아닌지....



들려오는 외부 소식도 편치 않은 오늘.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고 있기가 힘든 시간이 계속됩니다.



강약의 변화와 시정의 폭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표현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손택수 시인의 시.

그는 “시는 그늘에서 와서 그늘로 가는 장르라고 생각”한답니다.

“언어는 명명되는 순간에 사물들을 소외시키기 쉽고, 존재는 누구나 이력서나 약력 따위로는 정리될 수 없는 저마다의 비밀들을 갖고 있기 마련”이라고요....


손택수 시인은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시)와 『국제신문』 신춘문예(동시)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시집 『호랑이 발자국』, 『목련 전차』, 『나무의 수사학』,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동시집 『한눈파는 아이』, 청소년시집 『나의 첫 소년』 등을 출간했습니다. 첫 시집인 『호랑이 발자국』으로 신동엽창작상을 받았을 뿐 아니라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오장환문학상 심사위원은 그의 수상작에 대해 “성찰은 고통의 세상을 끌어안게 하고, 발견은 삶의 의미를 확인하게 하여, 독자들을 시적 감동 안에 잡아둔다”면서 “초월과 발견의 언어로 충만하다”라고 평가했습니다. 1970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할머니댁 옆 냇가를 놀이터 삼아 물과 산과 더불어 자랐던 시인은, 어린 시절 부산으로 이사 온 후 향수병을 심하게 앓기도 했다고 전합니다.


시 구절 가운데 “나무와 풀과 새의 있는 그대로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어졌나”라는 장면에서,

안드류 와이어스가 그린 <크리스티나의 세계, Christina’s World>가 연상되었습니다.

자연과 가까이, 그 속에 있지만 동시에 멀리 떨어져 있는, 자연을 바라보지만 거기에 도달할 수 없는 거리감이 묘사된 그림의 정서에서 시와의 연관성이 느껴집니다.



안드류 와이어스(Andrew Wyeth, 1917~2009)는 인물과 풍경을 사실적으로, 수채화와 템페라로 그린 그림을 전문으로 하는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로, 주로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의 풍경과 인물들을 담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추상화가 지배했던 당시에도 그의 작품은 인기를 유지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예술 교육을 받으며 어린 시절부터 세밀한 드로잉과 사실적인 표현 기법을 익혔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서정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외로움과 쓸쓸함이 배어 있으며, 미국의 시골 풍경을 배경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의 대표작인 <크리스티나의 세계(Christina’s World)>는 1948년에 그려졌으며,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입니다.




크리스티나의 세계 1948.png

안드류 와이어스, <크리스티나의 세계>, 1948, MoMA



이 작품은 넓은 들판 위에 한 여성이 힘겹게 땅을 짚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작품의 일상적인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긴박감과 불길한 무게가 암시되고 있습니다. 그림 속의 여성은 초원 너머의 회색빛 농가를 바라보고 있지만, 쉽게 닿을 수 없을 듯한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그녀의 가녀린 팔과 가는 발목, 무심한 듯 묶은 머리, 잔잔한 바람결에 흔들리는 머리카락, 흙 묻은 그녀의 양손 등에서 불균형과 부자연스러움이 전해집니다.

그녀가 바라보는 언덕 위의 집은 너무 먼 듯합니다.

이 작품은 우울함을 내포하고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지만, 화가는 사려 깊음으로 설명하는 것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그는 “사람들은 그런 것, 즉 묵상적이고 조용하며 혼자 있는 사람을 보여주는 것에서 슬픔을 느낀다”라고 말했습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평범한 시골 풍경처럼 보이지만, 그림 속 여인의 몸짓과 분위기에는 깊은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크리스티나 올슨(Christina Olson)이라는 실제 인물로, 안드류 와이어스가 살던 지역의 이웃이었습니다. 그녀는 소아마비로 인해 하반신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으며, 휠체어 타는 것을 거부하고 기어 다니며 생활했다고 전해집니다. 와이어스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이 작품을 그렸는데, 흥미로운 점은, 크리스티나의 몸을 직접 모델링한 것은 그의 아내 베시(Wyeth’s wife Betsy)였다고 합니다. 몸이 불편한 크리스티나를 장시간 모델로 포즈를 취하게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림 속 여성의 얼굴과 인물적 요소는 크리스티나를 반영한 것이지만, 신체의 자세와 구조는 와이어스의 아내를 참고하여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이 주는 가장 강렬한 인상은 ‘거리감’입니다.

넓고 휑한 들판 한가운데 앉아 있는 여인은 마치 세상과 단절된 듯 보입니다. 그녀가 바라보는 농가는 그녀의 삶의 일부지만, 동시에 그녀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세계를 상징하고 있는 듯합니다.

크리스티나가 기어가야 하는 모습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의지와 강인함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절망적인 현실을 담아내기도 합니다. 그녀는 농가를 향해 가고 있지만, 그곳에 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신체적 장애를 넘어, 인간 존재의 고독과 한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합니다.


또한, 그림 속 배경은 차분하고 절제된 색감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갈색과 초록빛이 도는 벌판과 흐릿한 하늘, 그리고 약간의 갈색과 회색이 섞인 농가는 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동시에 감정을 절제한 듯한 서늘한 기운도 함께 풍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색채 구성은 와이어스 특유의 사실적이면서도 감성적인 표현 기법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손택수 시인의 <있는 그대로,라는 말>에서 말하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의 어려움은 이 그림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크리스티나를 보며 그녀의 의지와 고독을 동시에 읽어내지만, 그녀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는 크리스티나의 상황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에게 의미를 부여하지만, 정작 그녀에게는 그저 하루의 일상일지도 모르지요.


이러한 점에서 이 작품은 인간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풍경을 보면서도 의미를 덧씌우고, 사람을 보면서도 그들의 삶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으며, 현실을 바라보면서도 필연적으로 해석과 감정을 얹게 됩니다.

<크리스티나의 세계>는 바로 그 ‘해석과 거리감’을 시각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안드류 와이어스의 <크리스티나의 세계>는 단순한 시골 풍경화라기보다, 한 인간의 삶과 한계를 담아낸 동시에,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그림 속 크리스티나는 분명 힘겹게 기어가고 있지만, 그녀의 시선과 몸짓에는 절망뿐만 아니라 삶을 향한 의지도 담겨 있고, 이 작품은 고독과 희망, 거리감과 의지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며, 보는 우리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게 됩니다.


결국, <크리스티나의 세계>는 우리 각자가 바라보는 세계와 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무엇인가를 향해 가고 있으며, 그 길이 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여전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겠지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행위가 되겠지요.



손택수 시인의 시 <있는 그대로,라는 말>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배우라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단순한 진실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어려운 공부가 아닐까 합니다.

여전히

배움의 길은 멀고도 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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