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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우리들의 집

by 윤재

42. 친애하는 우리들의 집



집은 단순한 거처일까요,

우리 삶의 기억을 담는 그릇일까요?

아니면

부동산 가치, 재테크의 주요한 수단이며 사회적 지위를 표상하는 근거일까요?



어린 시절 뛰놀던 마당이 있던, 엄마가 차려 주시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소박하지만 따뜻한 밥상이 차려지던 집은 제 기억과 시간이 쌓인 흔적의 공간입니다.

집은 단순히 벽과 지붕이 있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그것은 사랑이 머무는 곳이고,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안식처이지요.



며칠 전부터 경계석 근처 낮고 좁은 땅에 피어있는 노란 서양민들레가 눈에 띕니다.

서양민들레는 가을까지 계속 꽃을 피운다니 한동안 시선을 기울이면 볼 수 있겠지요

타가수분도 하고 상황에 따라 자가수분도 하며,

바람에 흩날려 간 곳에 자리 잡으면 그곳이 서양민들레의 집이 되는 것이니 강인한 생명력과

번식력이 놀랍습니다. 서양민들레는 집 걱정 같은 것은 없겠지요.



하재영 작가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는 최근 읽은 다른 책들과 더불어 집을, 건축물을

생각해 보게 합니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유년시절을 보낸 대구의 적산가옥촌, ‘대구의 강남’이라 불렸던 수성구의 고급 빌라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점점 작은 집으로 이사를 했던 기억, 20대 서울 상경 후 살았던 강북의 아홉 개 방과 신림동 원룸, 재개발이 비껴간 금호동 다가구주택, 30대 진정한 독립을 이룬 행신동 투룸, 정발산의 신혼집, 북한산 자락 아래 구기동에서 오래된 빌라를 수리하고 안착하기까지, 저자가 경험한 대구와 서울의 한 시절이 한국 현대사와 맞물려 강물처럼 펼쳐진다.”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png



저자는 유년시절부터 현재까지 경험한 다양한 집과 방에 대한 기억이 개인의 삶과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을 감각적인 문장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공간이 주는 의미 속에서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과 욕구, 계급을 구분하는 다면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면,

“북성로에 살기 시작했을 때 엄마는 겨우 서른 살이었다. 가족 구성원들이 같은 성을 공유하는 집에서 홀로 다른 성을 지닌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서구 사회의 전통은 결혼한 여성에게 남편의 성을 따르게 하지만 한국 사회의 전통은 원래 성을 유지케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 사회가 여성을 주체적인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 아니라, 피가 섞이지 않은 여성을 가족 안의 영원한 이방인으로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p.25”


“집은 우리에게 같은 장소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집이 쉼터이기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집은 일터가 되었다.

보수도, 출퇴근도, 휴일도 없이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가사 노동의 현장.

엄마는 운전을 배우고 싶어 했고 같은 지역에 사는 친언니를 만나러 가고 싶어 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웬만해선 며느리의 외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집처럼 편하다’는 관용구대로 일과가 끝난 뒤 돌아가는 휴식의 공간을 집이라 한다면

엄마에게 집은 집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가족에게 집이 집이기 위해 엄마는 집을 비워선 안 되었다... p.26”는

문장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대구의 강남‘, ’그 동네에서도 가장 비싼 집‘에 사는 5년 동안, 나는 집이 가진 계급과 자본의 특성을 알아차렸다(p. 44)고 말합니다.

자신의 불운을 피해 서울로 도망해 왔지만, 이제 ’ 어디 살아 ‘가 ’어느 동네에 살아?‘라는 질문으로 신분제의 공간에서 구분되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마포의 30평대 아파트에 홀로 살고 있는 친구의 집을 다녀온 날, 나는 가난했다. 원룸에서 불과 몇 정거장 떨어진 난곡의 쪽방을 목도한 날, 나는 가난하지 않았다.”... p.58 “


노~오~력을 게을리하면 도시 빈민으로 상징되는 달동네 판자촌으로 추락할 것 같은 불안감

속에서도, 그 절박함 앞에서 느끼는 안도와 불안이 부끄러웠다고(p.59) 전합니다.


저자는 ”자기만의 공간을 소유한다는 것은 자기만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의미다. 반대로 자기만의 공간이 없다는 것은 자기만의 시간이 언제든 방해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엄마의 독서, 사색, 휴식은 수시로 멈춰졌다. 할머니가 집안일을 시키거나 아빠가 출출하다고 말할 때, 또는 나와 동생이 사소한 것을 요구하는 순간에... p.132, “라고 말합니다.


“공간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집”에서 유년시절 할아버지, 할머니, 세 삼촌을 포함한 대가족의 살림을 홀로 전담한 저자의 엄마는 집에서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역할로 불리는 호칭 말고 자신의 이름으로조차 불리지 못했음을 가슴 아프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재영 작가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는 일차적인 물리적 공간의 의미로서의 집을 심리적, 상징적 의미로서의 집으로 확장해서 사고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삶의 공간을 제공하는 집은 독립을 위한 전제 조건 중의 하나입니다.


저자는 독립을 위해 필요했던 것은 집과 일이었다고 보고합니다. “글을 쓰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일이 없었기에 대필이든 윤문이든 교정이든 글과 관련한 일이면 가리지 않고 맡았다..... 청탁이 없어 발표할 수 없는 소설을 쓰고 있을 때 내가 소망한 것은 노동으로서의 글쓰기, 생계를 감당하는 글쓰기였다... p.93”고 말하면서요.



“집은 생각으로 짓고 시간이 완성하는 살아 있는 생명체 같은 것”이라고 어떤 부부건축가는 말합니다.

그렇지만

생각으로 짓고, 시간이 완성하지 않는, 생존을 위해 뚝딱 지어진 집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625 전쟁 직후 얼기설기 판자촌이 형성되었었고, 지금 서울에도 빈곤계층의 최후 주거지인 쪽방촌이라 불리는 지역이 있습니다.

벌집을 의미하는 ‘파벨라 favela’는, 특정 지역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라 브라질 빈민가에 대한 통칭이라고 합니다. 빈민들의 무허가 판자촌이 언덕을 뒤덮은 것을 ‘파벨라’로 칭하는데 그곳에서의 삶은 폭력과 빈곤으로 얼룩진 비참함이 존재합니다. 서양민들레의 번식력 같이 무참한 빈곤이 기승을 부립니다. 다정함이 오가는 공간이 아닌 절박한 생존을 위한 거처일 뿐입니다.



한국문학의 가장 뜨거운 신인으로 불리며, 2024 젊은 작가상 수상 작가 김기태 첫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중에서

소설집의 제목으로 차용되기도 한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의

첫 문장은,

“ 두 사람의 역사는 길다”로 시작합니다.




제목 없음.png



소설 속에서는,

교무실에 불려 간 두 학생은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밀봉된 봉투를 받습니다.

세심한 선생님이었다면,

내야 할 돈을 납부하지 못한 학생에게 전해주는 봉투를 개별적으로 불러서 주었겠지만,

그렇지 않았던 그 선생님은

두 사람에게 봉투를 주면서

“둘이 친하게 지내”라고까지 덧붙여 말을 합니다.



여학생 진주는 중 고교를 졸업 후 진학한 대학생활 내내 여러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거쳐 졸업한 후에는 사무직으로 근무도 했으나 수당 없는 초과근무와 급여 지연, 갑질과 성희롱 등으로 비정규직으로 전환했습니다. 주 5일 35시간 근무, 최저임금보다 천 원 많은 시급을 칼같이 계산해서 정확한 날에 입금해 주는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대형마트 등을 전전합니다.


외국국적동포로 국내거소 신고증만 갖고 있는 니콜라이는 특성화고교를 졸업 후 냉동 만두와 선풍기, 피부과에서 쓴다는 의료기기 부품 공장을 거쳐 자동차 전조등 생산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결석하지 않고 학교도 잘 다녔다. 법을 어긴 적도 없었다. 하루에 삼분의 일에서 이분의 일을 일터에서 성실히 보냈고 공과금도 기한 내에 냈다. 그럼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살았으니까 이만큼이라도 산다고 만족해야 할까. ‘스물일곱 살 인생 평가 좀’ 같은 제목의 글에 사람들이 쏟아놓는 댓글을 보면 가끔 뭘 잘못한 것 같기도 했다. 더 잘살고 싶었다면 공부를 더 잘했어야 한다고. 솥뚜껑삼겹살도 즉석떡볶이도 먹지 말고 맥주도 마시지 말고 섹스도 하지 말고 닥치고 공부해서 시험에 붙든 돈을 모으든 했어야 한다고. 남들 다 자리 잡을 때 어리바리하고 게을렀던 우리가 ‘빡대가리’라고. 두 사람은 이런 질문에 도달했다.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냐?”(p. 133~134)“ 고 묻습니다.


두 사람은 생활비를 아낄 방법을 다각도로 궁리하다가, 경기도 서남부의 한 도시에 함께 도착했고 같이 살아보기로 결정했으며 그것에 대하여 누구의 허락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마을버스도 올라오지 않는 가파른 언덕.

민트색이라기보다는 치약색 페인트가 칠해진 낡은 빌라 4층에 그들의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같이 살게 된 두 사람이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우리는 친한 사이야”

한때 담임선생님이었던 그분의 주문대로 그들은 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미래는 여전히 닫힌 봉투 안에 있었고 몇몇 퇴근길에는 사는 게 형벌 같았다.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워 담았고 그게 도움이 안 될 때는 불확실하지만 원대한 행복을 상상했다.

보일러를 아껴 트는 겨울.

설거지를 하고 식탁을 닦는 서로의 등을 보면 봄날의 교무실이 떠올랐다.

어떤 예언은 엉뚱한 형태로 전해지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p.143 “로 두 사람의 협업의 공간은 마무리됩니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친한 사이로 규정하는 그들 진주와 니콜라이의 집이

따스함과 휴식의 공간으로 서로를 보듬고 어여삐 여기며 건강한 삶을 지속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수 있겠지요.



유은실 작가의 순례 주택에서는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 어른"이라고 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주인공인 수림이네 집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옛 여자 친구의 빌라 ‘순례 주택’으로 이사 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전개하고 있는 소설입니다.


”"순례자는 감사하고, 관광객은 요구한다."라는 문구는 천사 같은 빌라 주인 순례 씨의 모토로 그녀는 “감탄을 많이 하는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다고 말합니다.


주어진 상황을 수용하고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 오수림은,

“나도 순례자가 되고 싶다. 순례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내 인생에 관광객은 되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하며 “나중에 자식을 낳으면 꼭 태어난 게 기쁜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라고 말합니다. ‘순례 주택’은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안식처가 되며 그곳에서 위로와 공감을 나눕니다.



비현실적인 내용이지만 소설 속에서는 가능한 일이지요.

순례 주택이 늘어나면,

진주와 니콜라이는 친한 사이로만 규정하지 않는 다른 관계로 진전할 수 있으며, 그들이 잘못 살았냐고 다시 되묻지않겠지요.



한국 근현대미술의 대표 화가 중 한 명인 장욱진(1917~1990)은 집과 가족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화가에게 집은 화목과 평안한 안식, 창작의 공간이었지요.

그는 “나는 심플하다, 이 말은 항상 되풀이해서 내세우고 있는 나의 단골말 가운데 한 마디이지만, 또 한 번 이 말을 큰소리로 외쳐 보고 싶다. 나는 깨끗이 살려고 고집하고 있노라.”


“오직 그림과 술밖에 모르고 살아온 인생에서 그림은 내가 살아가는 의미요, 술은 그 휴식이었다”라고 한 장욱진 화가는 순진무구한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경계를 허물고 우리의 전통을 기반으로 독창적인 그림을 그렸지요.

재료를 가리지 않는 자유로움과 하나의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창작 태도를 보여주며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1990년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뒤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화실을 찾았더니 너무도 깨끗해 "낙서 한 장 없었다"는 것. 그런 화실을 보며 야속하고 섭섭해 쓰레기통까지 다 뒤졌다는 딸은 책에 이렇게 덧붙였다. 아버지는 "언제나 모든 날을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사셨던" 분이라고. (기사 출처: 중앙일보)




장욱진 가로수 1978.png

장욱진, <가로수>, 1978, 개인 소장



하늘에 둥글게 해가 떠 있으며

거의 하늘 끝까지 닿아있는 푸른 가로수 위에 옹기종기 작은 집들이

사이좋게 그려져 있습니다.

가족이 산책을 가는 중인 것 같습니다.

뒤로 개와 소 한 마리가 천천히 뒤 따르고 있군요.

평화로움이 전해집니다.


공간감이 보이지 않는 평면적인 표현에서 어린이가 그린 그림 같은 순진함과 동화적인

비현실성이 보입니다. 가로수 꼭대기에 놓인 집에 가려면 이 가족은 마법의 엘리베이터라도

타야 할까 봅니다.



"겉으로는 아이들도 그릴 수 있다 할 만큼 평이해 보이지만, 장욱진은 문인산수화, 민화 등의 전통적인 도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새로운 조형적인 가능성을 회화로 구현해 낸 작가"라고 정영목 서울대 명예교수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집을 떠나야 하기도 하고, 언젠가는 우리가 살던 집이 기억 속에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떠나고, 돌아오고, 변하고, 때로는 사라지기도 하는, 우리 삶의 한 조각이며,

집이라는 공간이 단순한 물리적 존재를 넘어 시간과 기억, 그리고 감정이 쌓이는 장소임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풍선의 최후와

욕심의 최후와

거짓의 최후는 같다.


커진다.

터진다."라고 정철 작가가 그의 저서 『인생을 건너는 한 문장』에서 전했던 것을 기억하며,

집이라는 공간의 크기에 대한 풍선 같은 욕심을 경계합니다.

거짓된 욕망도 경계합니다.

제가 서 있는 자리에서 친애하는 사람들과 다정한 마음으로 익어가고 싶습니다.



간절히 비를 기다리는 요즘입니다.




비 내리는 사진.png



매년 많은 숲이 산불로 인해 큰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산불은 한순간에 푸른 숲을 잿더미로 만들고, 동식물의 터전을 앗아갈 뿐 아니라 많은 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갑니다.


오랜 세월 가꿔온 집이 하루아침에 불길 속으로 사라지고, 가족과 함께했던 소중한 기억들이 잿더미로 변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들에게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그 슬픔과 절망 앞에서 어떤 말로도 그 아픔을 온전히 감싸줄 수는 없겠지만, 함께한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산불 피해를 입은 모든 분들과 사라진 유적과 자연들에게 깊은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잿더미가 된 자리에 다시 희망이 피어나듯, 지금의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시작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큽니다.


산불이 난 지역에 단비가 내려 불길을 잡아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산불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 역시 중요함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더불어 "생각으로 짓고 시간이 완성하는 살아 있는 생명체 같은" 건강한, 친애하는 집이 많아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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