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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만나지 못한 말

by 윤재

43. 우리의 혼잣말은 언제 만날까



우리의 혼잣말은 언제 만날까


서진배



세상에 혼잣말이 어딨어요


지금 없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고,

여기 없는 사람에게 하는 말일 뿐이죠


세상에 혼잣말은 없습니다


당신이

혼자 남은 방에서 하는 말이 어떻게 혼잣말이겠어요


그 방에 함께 있던

그 남자에게 하는

늦은 대답이고,

이른 물음이죠


그 남자는

벌써 묻고,

당신은

이제 대답하고,

당신은

지금 묻고,

그 남자는

아직인 대답일 뿐이죠


둘이 멀리서 하는 말일 뿐이죠


미처 못 한 말이고,

차마 못 한 말이고,

이제야 하는 말이고,

아직인 말일 뿐이죠

둘이 멀리서 하는 말이 어떻게 혼잣말이겠어요


아직 가는 말이고,

아직 오는 말이고,


아직 만나지 못한 말일 뿐이죠


--서진배, 『어쩌면 너는 시에서 떨어져 나온 한 조각일지도』, 시인의 일요일, 2024



“마음을 돌볼 줄 아는,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숨결의 시

서진배의 시는 결핍에서 온다. 아픈 가족사와 그 중심에 있는 어머니, 그리고 벗어날 길 없는 가난. 흔하다면 흔한 사연일 수도 있지만 결핍의 시간을 지나며 거기서 꽃핀 것이 서진배의 시다. 그런데 서진배 시에 독특한 개성을 입힌 것은 마음을 돌볼 줄 아는 예민한 시선에 있다. 결핍에 아파하고 괴로워했던 시간을 견딘 이에게만 허락된 시심이 서진배의 시에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는다 “..... 출판사 리뷰 중에서


“ 아무래도 여기 담은 시편은

당신이 더듬더듬 불러준 슬픔을 내가 받아쓴 듯싶어요

먼 당신에게 갚을 길 없어 내가 사는 세계에 그 슬픔을 갚아 줍니다

당신은 나의 세계였으니까요

정 당신 손에 받고 싶으면,

내가 사는 세계에 한번 다녀가든가요” - 시인의 말 중에서



2019년 《영남일보문학상》으로 등단한 서진배 시인의 첫 시집은 그가 지천명의 쉰 살에, 출간되었습니다. 늦깎이 시인으로서 오랜 세월 시에 바친 그의 순정과 삶의 열정은 눈여겨볼 만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등단 당시 심사를 맡았던 이하석 시인과 이경수 교수는 “이름대로 살아지지 않는 삶을 담담히 말하는 시선이 인상적이었다”라고 등단작 「이름」에 대해 평가하였다지요. 심사위원들은 서정시의 전통적 주제 안에 놓여 있으면서도 자기 삶과 상처를 들여다보는 시인의 예민한 시선을 귀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일상의 사소한 체험에서 시적인 순간을 발견할 줄 아는 서진배 시인의 시적 매력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봄으로써 자기 성찰적 시선을 드러내는 데에서 돋보인다면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 세상에 제동을 걸고 싶어 하는 그의 시적 태도 역시 성찰과 반항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서진배 시인은 5년 전의 당선 소감에서, “바깥의 안부를 먼저 묻는 당신의 사투리를 받아쓰겠다”라고. 시인이 말하는 ‘바깥의 안부’와 ‘당신의 사투리’가 나의 그것들과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서진배 시인의 시 <우리의 혼잣말은 언제 만날까>는 혼잣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며, 그것이 단순히 자기 자신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향한 늦은 대답이자 이른 물음으로 다가옵니다. 이 시는 고독과 소통의 경계에서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탐구하며, 말의 의미와 존재의 교감을 깊이 성찰하게 만듭니다.



요즘

전문가들의 예상과 다른 감감무소식에 혼잣말을 종종 하곤 합니다.

대체 언제 이 혼돈과 미완이 마무리될지...

'큰 줄기로 보라'는 위로 담긴 말이 도착했지만

여전히 저의 혼잣말은 미로를 헤매고 있습니다.

언제 그 혼잣말은 생명을 갖게 되어 대화로 연결될까요?



보통 혼잣말을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고 정의하지요.

스스로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해 혼잣말을 하는 인지 보조 활동이기도 하고,

무의식 중에 마음의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으로 하기도 하고,

영화 한 대사처럼 ‘어디~ 보자!’라는 추임새로 또는 감탄사로 사용하기도 하고,

실제 대화 상대가 없어 빈 공간에 혼잣말로 이어가기도 하고,

혼잣말을 하면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거나 동기부여와 능력향상 효과도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고,

정신질환의 신호일 수도 있는 진단 근거가 되기도 하고,

나이가 들어 혼잣말을 많이 하기도 하고.......



그러나 시인은 혼잣말이란 본질적으로 타인을 향한 말이며, 다만 시공간의 차이로 인해 아직 전달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없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고, 여기 없는 사람에게 하는 말일뿐이죠”라는 구절은 우리가 과거의 누군가를 떠올리며 그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 혹은 미래에 다가올 누군가에게 미리 건네는 말을 의미하며, 연결을 기다리는 대화의 한 형태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는 말이 가진 시간적 간극과 그 속에서의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남자는 벌써 묻고, 당신은 이제 대답하고, 당신은 지금 묻고, 그 남자는 아직인 대답일 뿐이죠”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대화가 엇갈리며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이라는 것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한참 뒤에야 전달되거나 이해될 수 있는 것임을, 이는 우리가 후회하며 되뇌는 말, 미처 하지 못한 말, 그리고 아직 기다리고 있는 대답들이 모두 하나의 대화 속에 존재한다는 점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결국, 이 시는 인간이 타인과 맺는 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경험하는 거리감과 그리움을 담고 있으며, 혼잣말은 철저한 고독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움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떠올리거나, 혹은 보이지 않는 대상에게 말을 건네며 여전히 소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혼잣말은 단순히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아직 도달하지 못한, 그러나 반드시 도착할 말일지도 모릅니다.

저의 혼잣말도 결국은 도착하겠지요.

외롭지 않게.

너무 늦지 않게...........



조금 더 서진배 시인의 시 세계를 들여다볼까요.




이사 2


서진배



셋집으로 이사하고 너는 가장 먼저 묻는다

이 집에도 못을 마음대로 박을 수 없겠지?

너는 벽을 똑똑 두드리며 사나운 벽과 순한 벽을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우리 집으로 이사하고 싶다고,

못이 튈까, 망치로 못을 때릴 때마다 눈을 감으면서도 오래 때릴 수 있는 우리의 벽을 가진 집으로 이사하고 싶다고,

벽에 못을 박을 수 없는 셋집에서는 우리의 액자를 높은 곳에 걸지 못하고 바닥에 기대어 놓아야 한다고, 그래서

우리는 액자 속에서도 어깨를 기대는 버릇이 있는 거라고,

왜 우리는 이미 박혀 있는 못에만 시계를 걸어야 하냐고,

이 집에 세 들어 살다 간 사람들은 왜 같은 높이에 걸린 시간만 살다 가야 하냐고,

우리가 새로 못을 박는다면 집을 떠날 때,

새로 박은 못을 모두 빼고 떠나야겠지?

못을 뺀 자리에 껌이라도 붙이고 떠나야겠지?

마음대로 상처 낼 수 없는 집은 우리의 집이 아니라고,

― 서진배, 『어쩌면 너는 시에서 떨어져 나온 한 조각일지도』, 시인의 일요일, 2024.


서진배 시인의 시 <이사 2>는 임시적인 거처와 영원한 보금자리의 차이를 섬세하게 그려내며, 인간이 바라는 '우리의 집'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시인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 마음껏 흔적을 남기고 애착을 가질 수 있는 집이야말로 진정한 '우리의 집'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4곳의 셋집을 거친 후 당신들의 자가집을 소유하게 되셨지요. 텃밭을 가꾸고 화단을 가꿀 수 있는 당신들의 집에서, 벚꽃이 봄바람에 흩날리듯 두 분의 웃음소리가 담장 밖으로 흩어지는 것을 들었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두 번의 셋집을 거친 저는 부모님 세대보다는 나은 것일까요...



시의 첫 부분에서 '셋집'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는 그들이 마음대로 변화를 줄 수 없는 공간, 즉 한시적인 머무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벽을 두드리며 '사나운 벽과 순한 벽'을 구분하고 싶어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선택조차 쉽지 않습니다. 집이라는 공간이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그곳에서의 경험과 감정이 쌓이는 곳이며 '우리 집으로 이사하고 싶다'는 소망은 단순히 공간을 소유하고 싶다는 바람이 아니라, 자유롭게 변화를 주고 자신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집에 대한 갈망이지요.


특히, '못'이라는 소재, '못을 박는다'는 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공간에 자신의 존재를 새기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셋집에서는 마음대로 못을 박을 수 없기에, 화자는 액자를 벽에 걸지 못하고 바닥에 기대어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단순한 주거 문제를 넘어,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불안정한 정체성과도 연결됩니다.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지만, 현실적인 제약 속에서 우리는 제한된 선택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요.



또한, '이미 박혀 있는 못'에 시계를 걸어야 한다는 표현에서, 이는 과거의 틀 속에서 반복되는 삶, 이전 세입자들이 만들어 놓은 틀을 그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현실의 제한성을 상징합니다. 새로운 못을 박는다는 것은 새로운 시간을 살아간다는 의미이며, 이는 곧 자신만의 삶을 창조하는 일과도 연결되겠지요. 그러나 현실은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으며, 새롭게 박은 못조차도 떠날 때는 빼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고 '못을 뺀 자리에 껌이라도 붙이고 떠나야겠지?'라는 표현은 씁쓸한 현실을 반어적으로 드러내며, 흔적을 남길 수 없는 삶의 허망함을 아쉬움을 드러냅니다.


결국, 이 시는 단순한 주거 문제를 넘어, 우리가 원하는 '집'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집이란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우리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공간이며, 자유롭게 변화를 줄 수 있는 곳입니다. 마음대로 상처를 낼 수 없는 집은 우리의 집이 아니라는 마지막 구절은, 결국 집이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그 안에서의 경험과 기억이 쌓인 공간이라는 점을 강렬하게 상기시킵니다.


서진배 시인의 <이사 2>는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과 그 속에서 형성되는 정체성에 대한 깊은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시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물리적인 거처를 넘어, 진정으로 '우리의 집'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합니다.

저의 앞선 글 <친애하는 우리 집>의 연장으로...



서진배 시인의 시를 읽으며,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작품 <뉴욕의 방(Room in New York)>을 떠올렸습니다.


<뉴욕의 방>은 단순한 실내 풍경을 넘어, 인간의 내면과 관계의 단절을 섬세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그림에서도 빛과 그림자가 대조를 이루며 감정의 깊이를 더하고 있습니다.




room in NY 1932.png

에드워드 호퍼, <뉴욕의 방>, 1932, 셀덴 미술관



이 그림에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로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듯한 남녀가 등장하지요.

외출을 앞두고 있을까요, 단정하게 손질한 머리와 빨간색 드레스로 보아 다음 장소는 아마 정갈한 품위가 유지되어야 하는 공간인 것 같습니다. 아직 시간이 남았는지 넥타이에 조끼까지 잘 차려입은 남자는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미국이 겪고 있는 대공황의 시기, 신문에 난 기사가 밝지만은 않았던 것인지 신문을 읽고 있는 그의 태도가 경직되어 있습니다. 기사 속에는 그의 미래와 관련된 불안한 상황이 예견되고 있을까요.

여자는 상체만 돌려 피아노 건반을 무심한 듯, 의욕 없는 듯 한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는 모습에서 쓸쓸함이나 공허한 분위기가 드러납니다. 남자는 신문을 읽고 있지만, 그에게서도 특별한 생동감이나 역동성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요즘을 그린다면 어쩌면 화가는 스마트폰에 집중하는 모습으로 묘사할 수도 있겠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거리감이 존재하며, 이 거리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이는 한 공간을 공유하지만 서로에게 닿지 않는 인간관계의 단절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호퍼의 작품에서 빛은 단순한 조명이 아니라 감정을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지요.

빛과 그림자를 통해 공간의 역동성이나 그림 속 인물들의 심리적인 묘사를 잘 표현한 화가들은 매우 많습니다.


이 그림에서도 밝은 빛이 존재하지만, 그 따스함은 인물들에게 닿지 않는 것 같군요. 오히려 그들의 내면의 공허함을 더욱 부각하는 대조와 강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감정적으로 소외된 분위기를 조성하며, 그림 속 인물들의 내면적 고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서진배 시인의 <우리의 혼잣말은 언제 만날까>와도 연관 지어 볼 수 있습니다. 시에서 혼잣말이란 사실 누군가를 향한 늦은 대답이거나 아직 만나지 못한 말이라고 설명되고 있지요. 이 그림 속 인물들 또한 서로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대화를 나누지 않고 각자의 세계에 갇혀 있습니다. 그들이 서로를 향해 전하지 못한 말들이 결국 혼잣말로 남아버린 것은 아닐까요?



또한, <이사 2>에서 말하는 ‘우리의 집’에 대한 갈망과도 연결될 수 있겠지요. 시 속에서 ‘셋집’은 마음대로 흔적을 남길 수 없는 공간이며, 결국 떠나야 하는 곳입니다. <뉴욕의 방>의 인물들 또한 마치 이 공간에 정착하지 못한 듯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이들이 진정한 ‘우리의 집’이라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 공간에서 감정적으로 단절된 채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호퍼의 <뉴욕의 방>은 단순한 일상의 한 순간을 담고 있지만, 그 안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습니다. 공간 속에 존재하지만 연결되지 못하는 사람들, 닿지 않는 감정, 그리고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심리적 긴장감이 이 그림을 더욱 깊이 있는 작품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경험하는 고독과도 맞닿아 있으며,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는 평생 동안 자신의 예술이 자연을 정확하게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여러 장면과 인상을 압축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내 그림에 대한 사실을 묻거나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설명해 달라고 하면 항상 당황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할 정도로 매우 복잡한 정신적 과정입니다."라고 말한 호퍼의 예술은 기억과 영감에 의존했습니다. 그는 독특한 장면이 아닌 전형적인 장면을 찾았고, 종종 여러 경험에서 추려내 공통분모로 축소해야만 예술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뉴욕의 방>에 대한 아이디어는, 제가 그리기 훨씬 전부터 제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제가 밤에 도시 거리를 걸을 때 본 조명이 켜진 실내에서 떠올랐는데, 아마 제가 사는 지역(워싱턴 스퀘어) 근처였을 겁니다. 특별한 거리나 집은 아니지만, 여러 인상의 종합입니다.”라고 호퍼는 말했습니다.


호퍼는 여기에서 부부의 얼굴 특징을 흐리게 처리하여 우리가 그들의 세계를 보는 관점으로는 그들을 개인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에드워드 호퍼의 <뉴욕의 방>은 셸던 미술관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였으며 방문객과 학자 모두에게 사랑받는 작품입니다.


호퍼는 1882년 미국 뉴욕주에서 태어나 1967년 생을 마감한 대표적인 미국 사실주의 화가로, 도시 풍경과 일상의 고독한 순간을 담아내는 데 뛰어났으며, 특히 빛과 그림자를 활용해 인물의 심리적 상태를 표현하는 데 능숙했습니다. 뉴욕 예술학교(New York School of Art)에서 그림을 공부하며 사실주의 화가 로버트 헨리(Robert Henri)에게 배웠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삽화가로 일했으나, 본인이 원했던 순수 미술 작업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유럽 여행을 통해 프랑스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작품은 인상주의와는 다르게 도시적이고 쓸쓸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는 1924년 동료 화가였던 조지아 호퍼(Josephine Verstille Nivison)와 결혼했으며, 그녀는 이후 그의 모델이자 작품 관리자로 활동했습니다.



1932년에 제작된 <뉴욕의 방, Room in New York>은 미국이 대공황(Great Depression, 1929-1939)으로 인해 경제적,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도시는 활기를 잃어가고 있었지요. 호퍼는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인간의 고독과 단절된 감정을 작품에 담아냈습니다. 1930년대부터 그는 도시 속의 외로운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 집중했으며, <뉴욕의 방>역시 그러한 주제의 연장 선상에 있습니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로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 대공황 시기의 미국 사회를 반영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 이름을 먼저 지으시었다

내가 자랄 것을 예상하여

큰 이름을 지으시었다

..................

내 이름은 내가 죽을 때 지어주시면 좋았을 걸요

이름대로 살기보다 산대로 이름을 갖고 싶어요



아버지는 아들이 자랄 것을 예상하여 태어나기 전에 큰 이름을 지으셨지만,

자신의 이름은 죽을 때 지어주면 좋았을 것이라고,

이름대로 살기보다 산대로 이름을 갖는 세상을 원하는

시인의 시 <이름>에서 일어나고 싶다는 소망을 말하지요.

이름이 너무 무거워 일어날 수 없을 때

나는 내 이름을 부른다

제발 나 좀 일어나자”라고요.



시인의 사고와 통찰력에 자꾸 고개를 끄덕이고 무릎을 치게 됩니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기대와 그들의 소망.

어제 또 눈이 퉁퉁 붓도록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그렇지요

사느라 ‘폭싹 속았던’ 부모님이 그리워서.............



수고하고 계신 모든 분들께

제 혼잣말이 다가가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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