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정
십년 묵이 낡은 책장을 열다가 그만
목구멍이 싸아하니 아파왔네
아침이슬 1, 어머니,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때문이 아니라
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
수염이 텁수룩한 도이치 사내를 펼쳐 보다가
그만 재채기를 했네
자본론, 실천론, 클라라 체트킨,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묘지
때문이 아니라
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다던
네루다 시집 속엔
오래 삭힌 멍처럼 빛바랜 쑥이파리 한점
매캐한 이 콧물과 재채기는
먼지 때문에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그 말
때문이 아니라
다만 먼지 때문에
바람이 꽃가루를 날려보내듯
먼지가 울컥, 눈물을 불러일으켰나
청소할때면 으레 나오던 재채기도
재채기 뒤에 오는 피로도
피로 뒤에 오는 무기력함도
무기력함으로 인한 단절과 해체도
그 쓸쓸함도, 그 황폐함도 다만
먼지 때문에 해두자
먼지보다 소심한 눈물 때문이라고 해두자
그 사소한 콧물과 눈물과 재채기 뒤에
저토록 수상한 배후가 있었다니
꽃도 십자가도 없는
해묵은 먼지의 무덤을 열어보다가
그만 눈물이 나왔네
최루가스 마신 듯 매캐한 눈물이
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
--김태정,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 창비시선 500 특별시선집, 2024
중심을 거부하고 주변부의 삶을 선택한 자의 고독과 슬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시인으로
불리기도 하는, 김태정 시인은 한국 현대문학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을 남긴 시인 중 한 명입니다. 그는 현실과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인간의 내면과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시로 형상화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고 평가되고 있지요. 김태정 시인은 특히 일상의 사소한 순간을 포착하여 그것이 지닌 감정적, 철학적 깊이를 탐구하는 작품들을 다수 발표했고, 그의 시는 직설적인 언어와 은유적 표현을 절묘하게 조화시키며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김태정(1963~ 2011) 시인의 시는 ‘민중서정시’라 평가되고 있으며, ‘80년대의 억센 민중시가 구현하지 못한 소담한 일상을 말갛고 깊게 표현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시인은 1991년 계간 ‘사상문예운동’에 '雨水'외 6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TV도 없이 라디오를 벗 삼고, 작은 마당에 반찬거리 채소를 일구면서 시를 썼는데 생전 “시가 저를 숨 쉬게 하는 유일한 통로이며 시 밖에 가진 게 없다고”말하며 시 쓰기 외에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 시인은 미황사에서 절 가족들의 보살핌 속에서 삶을 마무리했고, 유해는 가장 빨리 피는 동백나무 아래 뿌려졌다고 합니다(출처 위키 백과).
김태정 시인의 시 <눈물의 배후>는 단순한 먼지 알레르기에서 시작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먼지로 끝나는 것은 아니지요. 먼지는 책장을 열 때, 과거를 들추어볼 때, 혹은 청소할 때 우리를 덮쳐옵니다. 시인은 그 먼지가 가져오는 물리적인 반응—재채기, 콧물, 눈물—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단순한 생리적 반응인지, 혹은 그 너머에 더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시에서 먼지는 과거의 흔적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아침이슬 1, 어머니,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과 같은 구절들은 우리 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과 인물들을 연상케 합니다. 그 속에서 먼지는 역사의 축적된 흔적이며, 그것이 책장을 여는 순간 공기 중으로 퍼지면서 시인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분명하게 선언하는군요. “때문이 아니라 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 이는 과거를 직시하는 순간 느껴지는 복잡한 감정—아픔, 슬픔, 무력감—을 억누르려는 듯한 표현일 수 있음을 직관적으로 알게 합니다.
시의 두 번째 주요한 이미지인 ‘도이치 사내’, 독일 출신의 철학자나 사상가를 가리키는 것으로 연상되는 존재는 “자본론, 실천론, 클라라 체트킨,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묘지”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는 노동과 혁명, 사회적 투쟁의 역사와 연결되며, 이러한 사상들이 먼지처럼 남아 있다는 점을 암시하지만, 시인은 다시 한번 먼지 때문이라고 단호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역사의 무게를 피하려는 듯하면서도, 결국 그 무게가 자신을 짓누르고 있음을 인정하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하네요.
시의 후반부에서 먼지는 피로와 무기력함, 단절과 해체까지 제기하고 있군요. 역사의 무게가 개인을 어떻게 짓누르는지를 암시하는 대목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마지막까지 “먼지보다 소심한 눈물 때문이라고 해두자”라고 하며, 감정을 감추려는 시도를 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묵은 먼지의 무덤을 열어보다가 그만 눈물이 나왔네”라는 마지막 구절에서 결국 눈물은 흘러나오고 마는군요. 이는 단순한 먼지 때문이 아니라, 역사와 기억,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삶과 죽음이 주는 울림 때문일 것입니다.
김태정 시인의 <눈물의 배후>는 역사와 개인의 감정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상담을 하다 보면, 미성숙한 다양한 방어기제로 현재의 심리적 어려움과 불편감과 혼란을 방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아기능의 수준이 취약하거나, 심리적 자원이 빈약하거나, 주변의 지지자원이 부족하거나, 당면한 문제 수준에 대한 대처 능력에 무력하다고 느끼거나, 상황이 심각하다고 간주할수록 외면하게 됩니다. 내담자와 신뢰 수준이 형성되고 상담에 대한 동맹과정이 건실할 때, 내담자의 사고, 감정, 행동에 있는 불일치나 모순에 상담자는 직면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문제 해결에 방해가 되는 모순, 불일치, 왜곡, 회피, 변명, 미숙한 방어기제 등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직면은 내담자의 성장에 방해되는 심리적 장애물들에 대한 도전이 되는 것이지요. 직면(confrontation)은 내담자를 새로운 통찰로 이끌어 바람직한 변화를 유도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직면 기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들이 있어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합니다. 직면은 두렵고 힘들어 외면하거나 감추거나 피하려는 것들을 진정 자유롭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다른 시각, 관점을 갖게 되며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먼지는 단순한 먼지가 아니라, 우리가 외면하고 싶지만 결국 마주하게 되는 과거와 기억의 흔적이지만, 눈물의 배후로 직면하게 됩니다. 시인은 먼지 때문이라고 되뇌며 감정을 감추려 하지만, 결국 역사의 무게 속에서 자연스럽게 눈물을 흘리고 맙니다. 이 시는 개인적인 기억과 집단적인 역사의 관계를 탐구하며, 우리가 과거를 마주하는 순간 느끼는 복합적인 감정을 깊이 있게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김태정 시인의 시 속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김태정
세상에 보태줄 것 없어
마음만 숨가쁘던 그대 언덕길
기름때 먼지 속에서도
봉숭아는 이쁘게 피었더랬습니다.
우리 너무 젊어 차라리 어리숙하던 시절
괜시레 발그레 귓볼 붉히며
돌맹이나 툭툭 차보기도 하고
공장 앞 전봇대 뒤에 숨어서
땀에 전 작업복의 그대를
말 없이 바라보기나 할 뿐
긴긴 여름해도 저물어
늦은 땟거리 사들고 허위허위
비탈길 올라가는 아줌마들을 지나
공사장 옆 건널목으로 이어지던 기다림 끝엔
언제나 그대가 있었습니다.
먼 데 손수레 덜덜 구르는 소리
막 잔업 들어간 길갓집 미싱 소리
한나절 땀으로 얼룩진 소리들과 더불어
숨가쁜 비탈길 올라가던 그대
넘어질 듯 넘어질 듯 허방을 짚는 손에
야트막한 지붕들은 덩달아 기우뚱거렸댔습니다
그대 이 언덕길 다할 때까지
넘어지지 말기를
휘청거리지 말기를
마음은 저물도록 발길만 흩뜨리고
그대 사라진 언덕길 꼭대기에는
그제 막 보태진 세상의 불빛 한점이
어둠 속에서 참 따뜻했더랬습니다.
--김태정,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시선 237, 2004
시 <세상의 불빛 한점>은 노동의 삶과 기다림, 그리고 작은 희망의 순간들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시는 하루의 고된 노동을 마친 이들이 숨 가쁘게 언덕길을 오르는 모습을 묘사하며, 힘겨운 일상의 무게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끝에는 작은 불빛 하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전등 불빛이 아니라, 노동을 마친 자들이 돌아갈 수 있는 안식처이자 세상의 따뜻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시의 첫 연에서 “기름때 먼지 속에서도 봉숭아는 이쁘게 피었더랬습니다”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이는 노동의 고단함 속에서도 피어나는 작은 희망과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 세계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고 하는 최근 종영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보면, 이별을 앞둔 엄마가 딸의 손톱을 정성스럽게 봉숭아 물들이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내 딸은 귀하게 대접받고 살기를 원했던,
채 서른 살도 되지 않아 해녀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엄마 광례는 딸 애순의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여주면서,
“두고 봐라. 요 꽃물 빠질 즈음 되면 산 사람은 또 잊고 살아져.
손톱이 자라듯이 매일이 밀려드는데 안 잊을 재간이 있나” 라면서...
엄마 없이도 혼자 남은 딸 애순이 잘 살게 되길 바라지요.
엄마의 마음도 강력한 눈물의 배후지요.
공장 앞 전봇대 뒤에서 작업복을 입은 누군가를 기다리던 순간, 젊음의 순수한 감정이 스며들어 있습니다만 그 기다림은 설렘만이 아니라, 현실의 고단함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시의 중반부에서는 공장과 공사장의 소음, 손수레 덜거덕거리는 소리, 미싱 소리 등 노동자들의 일상이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이는 노동이 단순히 개인의 생계를 위한 것이 아니라, 도시를 이루고,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노동자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습니다. 시인은 “넘어질 듯 넘어질 듯 허방을 짚는 손”이라고 표현하며, 노동자들의 힘겨운 삶을 시각적으로 전달합니다.
‘넘어질 듯 넘어질 듯’으로 반복하면서 허방을 짚는 손이라니..............
그러나 이 시는 단순한 고통만을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시의 마지막에서 “그대 사라진 언덕길 꼭대기에는 그제 막 보태진 세상의 불빛 한점이 어둠 속에서 참 따뜻했더랬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노동자들의 하루는 고단하고 힘겹지만, 다행히 그 끝에는 작은 위로와 따뜻함이 존재하는군요. 이는 단순한 전등불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만들어낸 세상의 빛이자,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희망의 상징일 것입니다.
김태정 시인은 고된 현실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피어나는 따뜻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군요. 이 시는 노동의 가치와, 그 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인간적인 감정을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노동과 기다림, 그리고 그 끝에서 발견하는 작은 희망을 담은 시입니다.
"책상도 되고 밥상도 되는 네 앞에서
시도 되지 못하고 밥도 되지 못하는
나의 현재가 문득 초라해졌다
시가 밥을 속이는지
밥이 시를 속이는지
죽도 밥도 아닌 세월이 문득 쓸쓸해졌다
이 초라함이,
이 쓸쓸함이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발바닥이 되어버린 자존심
아무래도 이 시시한 자존심 때문에
너를 버려야 할까보다
그래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 <호마이카상> 일부, 김태정
“궁핍이 글을 쓰게 하고 궁핍이 글로 하여 살게 하니, 가난은 어쩔 수 없는 조력자인가 보다고 (궁핍이 나로 하여, 중에서)”한 시인의 글에서, 궁핍과 가난에 대한 이중감정이 쓸쓸합니다.
생을 마감하기까지 김태정 시인은 주목받지 못한 시인이었지만, 여전히 시인들의 마음속에는 살아 있다고 합니다. 지리산에 사는 이원규 시인은 생전 그를 일컬어 “이 땅에 태어나 가장 죄를 적게 짓고 사는 시인이 있다면 달마산에 깃들여 사는 김태정 시인”이라고 말했답니다.
맑은 영혼으로 귀하게 살다 갔을 것 같은 김태정 시인.
물질적 세속적 욕망과는 거리가 먼 곧은 나무줄기 같은 시인.
(사진 출처: 프레시안)
시인 정우영은 그의 시를 일러 ‘민중서정시’라고 했다지요.
“80년대의 억센 민중시가 구현하지 못한” 소담한 일상을 그린 김태정의 시들은 “순정해서 말갛고 깊다”라고도 했습니다.
김태정 시인은 시인들의 마음속에 있는 시인입니다.
“슬픔 너머로 다시 쓸쓸한
솔직히 말해 미인은 아닌
한없이 처량한 그림자만 덮어쓰고 사람 드문 뒷길로만 피하듯 다니던
소설공부 다니는 구로동 노동자 공아무개 젖먹이를 도맡아 봐주던
순한 서울 여자 서울 가난뱅이
나지막한 언덕 강아지풀 꽃다지의 순한 풀밭
응, 나도 남자하고 자봤어, 하더라는
그 말 너무 신선하고 환해서
자는 게 뭔지 알고나 하는 소린지 되려 못 미덥던
눈길 피하며 모자란 사람처럼 웃기나 잘하던
살림솜씨도 음식솜씨도 별로 없던
태정 태정 슬픈 태정
망초꽃처럼 말갛던 태정
---김사인의 시 <김태정> 중에서,
"그러나 그녀는 지금 아프다. 많이 아프다. 지난 연말 암 판정을 받았지만 이미 늦었다. 얼마나 홀로 고통을 견뎌왔으면 이미 골수 깊숙이 암세포가 다 번지고 말았을까. 대학병원에서는 3개월 못 넘길 것이라고 선고했지만 김태정 시인은 지금 외딴 농가에서 홀로 견디고 있다. "뭐 하러와. 그냥 조금 아프네. 난 괜찮아. 너도 이제 많이 늙었구나" 하며 힘없이 웃는 그녀의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지만, 차마 아무 말도 못했다. 그저 보일러 기름이나 떨어지지 않았는지 둘러볼 뿐이었다. 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들에겐 죽음이 이토록 가까운 것일까." - 이원규, <땅끝 해남의 시인들……김남주 고정희 그리고 김태정>, 경향신문 2011년 4월 13일, 중에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들에겐 죽음이 이토록 가까운지에 대한 의문은 제게도 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너무도 일찍 우리들 곁을 떠나셨기에
여전히
그 질문은 현재진행형으로
제 눈물 꼭지, 제 눈물의 배후입니다.
그러나
내일은 울지 않는 날이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