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봄을 아리게 살아버리려면?

by 윤재

49. 라일락



라일락

허수경


라일락

어떡하지,

이 봄을 아리게

살아버리려면?


신나게 웃는 거야. 라일락

내 생애의 봄날 다정의 얼굴로

날 속인 모든 바람을 향해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거야


스크랩북 안에 든 오래된 사진이

정말 죽어버리는 것에 대하여

웃어버리는 거야, 라일락,

아주 웃어버리는 거야


공중에서 향기의 나비들이 와서

더운 숨을 내쉬던 시간처럼 웃네

라일락, 웃다가 지네

나의 라일락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사, 2016



비가 오는 오늘.

유리창 너머로 라일락 향이 번져 올라오는 것 같습니다. 허수경(1964~2018) 시인의 시 「라일락」은 바로 오늘과 같은 날에 읽기에 완벽한 시로 보입니다. 물기 머금은 공기 사이로 퍼지는 감정의 결, 그 미묘하고 쓸쓸한 진동이 고요히 스며듭니다.


비에 젖은 라일락의 웃음.

허수경 시인의 시 「라일락」은 마음 깊은 곳을 두드립니다. 흩날리는 봄비처럼 감정도 흩어지고, 시인의 문장 하나하나가 그 조각들을 모아 말없이 가슴을 적십니다.



“어떡하지,
이 봄을 아리게
살아버리려면?”

이 문장 앞에서

헉.

잠시 숨을 모으고 멈춰 설 수밖에 없습니다.

봄이 왔다고 모두가 환히 웃는 건 아니지요.

어떤 봄은 오히려 아립니다.

피어나는 꽃들 사이에서 지나간 계절의 빈자리를 견뎌야 하는 사람들에게 봄은 슬픔의 다른 이름입니다. 시인은 이 아린 봄을 살아내기 위해, “신나게 웃는 거야”라고 말하는군요. 다정한 얼굴로 속인 바람들을 향해, 몰락해 가면서도 웃습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 안에 생의 아이러니와 단단함이 함께 담겨있습니다.


이 시는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오히려 슬픔을 마주 보는 법, 그것을 웃음으로 뒤집는 법을 은근하게 가르쳐 줍니다. 마치 스크랩북 안에 끼워 둔 오래된 사진처럼, 이미 끝나버린 시간들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웃어야만 합니다. 그 웃음은 단순한 유쾌함이 아니라, 체념과 포용과 기억이 어우러진 삶의 방식인 것이지요.


“공중에서 향기의 나비들이 와서
더운 숨을 내쉬던 시간처럼 웃네
라일락, 웃다가 지네”

이 구절에서 라일락은 더 이상 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이고, 향기이고, 웃음이고, 우리입니다.

웃음이 다 타버린 후에야 진짜 지는 법을 아는 꽃.

그 라일락이 되어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프지만, 아름답게.

지지만, 향기롭게.



오늘은 길게 비가 내릴 것 같습니다.

빗소리와 함께 이 시를 읽고 나니, 왠지 모르게 씁쓸하고, 따뜻합니다.

슬픔도 웃음도 결국 지나갑니다.

라일락처럼, 봄처럼.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오늘 같은 비 오는 날, 조용히 웃을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 빗속에서, 자신의 라일락을 하나씩 꺼내어 조용히 바라보겠지요.



허수경의 시인의 시는 그렇게, 봄비처럼 조용하고 깊습니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경상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1987년 실천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습니다. 등단 이듬해 낸 첫 시집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지요.

그의 시는 “나이답지 않게 무르익다 못해 물러터질 듯 농염하고 청승맞은 세계는 전통 서정에 실천적 역사의식을 덧입힘으로써 독자적인 미학을 구축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이 시집 속의 여성 주체는 발문을 쓴 송기원이 표현한바 “선술집 주모”처럼 뭇 사내들의 아픔과 슬픔을 너른 품으로 감싸 안고 다독여서는 다시금 세상과 맞서 싸울 힘을 불어넣어 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한국어의 어감과 가락에 예민했던 시인은 1992년 독일로 유학을 가 고고학을 전공해 학위를 받았고 현지인과 결혼해 독일에 머물다가 우리들 곁을 떠나갔습니다.



도종환 시인의 라일락꽃에서는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고 했습니다. 이번 봄은 사실 고요히 자연을, 꽃을 바라보기에는 여전히 안정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따뜻한 응원의 메시지를 시민들에게 선보이고자 하는 의도로 광화문글판을 허수경 시인의 ‘라일락’에서 가져왔다고 교보생명은 전합니다.

지나간 일은 잊고, 더 나은 내일을 향해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담았다는데,

지나간 일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잊지 않고 다시 반복되지 않게 해야 하는 처리 과정이 필요합니다.



라일락 교보문고 사진출처 교보생명.png

(사진 출처: 교보생명)




이 봄,

4월에 어떤 전화를 받으셨는지요?



사월에 걸려온 전화

정일근(1958~ )


사춘기 시절 등굣길에서 만나 서로 얼굴 붉히던 고 계집애
예년에 비해 일찍 벚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일찍 핀 벚꽃처럼 저도 일찍 혼자가 되어
우리가 좋아했던 나이쯤 되는 아들아이와 살고 있는,
아내 앞에서도 내 팔짱을 끼며, 우리는 친구지
사랑은 없고 우정만 남은 친구지, 깔깔 웃던 여자 친구가
꽃이 좋으니 한 번 다녀가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한때의 화끈거리던 낯붉힘도 말갛게 지워지고
첫사랑의 두근거리던 시간도 사라지고
그녀나 나나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우리 생에 사월 꽃잔치 몇 번이나 남았을까 헤아려보다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 감추려고 괜히 바쁘다며
꽃은 질 때가 아름다우니 그때 가겠다, 말했지만
친구는 너 울지, 너 울지 하면서 놀리다 저도 울고 말았습니다.

--정일근,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시와 시학, 2001



저는 진하고 깊은 우정을 나누는 친구로부터 다음 달에 만나자는 반가운 전화를 받았습니다.

5월이 기다려집니다.



물방울 하나,
연둣빛 잎사귀 끝에
가만히 매달린다

그 작고 맑은 무게에
봄이 흔들린다


햇살 없이도 환한 날,
빗방울은 창을 두드리고
내 마음도 젖는다
말없이, 그러나 깊이

골목 담벼락에 핀
이름 모를 꽃 하나
촉촉한 바람 속에서
조용히 피어난다


비는 모든 것을 부드럽게 만든다
딱딱한 마음도, 말라 있던 기억도
천천히 녹이고
다시 피게 한다

그래서 봄비는
눈물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비가 오는 오늘,
나는 잊고 있던 감정을
천천히 꺼내본다
봄비처럼 조용하고
봄비처럼 아름답게




봄비 2.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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