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 바다가 파란색이길...

by 윤재

56. 멀고도 가까운 두 사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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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에서 깊은 성찰과 강력한 여운을 남기는 아름다운 그림책, 『두 사람』은 폴란드 출신의 화가이며 작가인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Iwona Chmielewska, 1960~ )의 작품입니다. 1960년에 폴란드 토루인에서 태어나 코페르니쿠스 대학 미술학부를 졸업하고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는, 번역가 이지원과의 만남으로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에 『아저씨와 고양이』로 프로 볼로냐상을, 2003년에 야스노젬스카의 『시화집』으로 바르샤바 국제 책 예술제에서 ‘책예술상’을 받았으며, 2007년에는 『생각하는 ABC』로 브라티슬라바 일러스트레이션 비엔날레황금사과상, 2011년에는 한국 작가 김희경과 함께 만든 『마음의 집』으로 볼로냐아동도서전 논픽션 부문 라가치상을 수상하였습니다. 2013년에는 『눈』으로 픽션 부문 라가치상을 받았고, 2018년과 2019년에는 안데르센상 수상 후보로도 추천되었지요....(저자 소개글 중에서)



진정한 관계란, 서로를 닿지 않음으로써 존중하며, 나란히 서는 것만으로도 완성되는 아름다움인 것 같습니다.


딘 오니시의 저서 『관계의 연금술』은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다양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관계가 가지는 치유의 힘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대인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디지털 시대인 지금 과거보다 대면 및 비대면 접촉의 기회와 대상, 횟수가 증가하였지만 관계의 질은 저하되고 부적응이 증가되고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인 ‘관계‘는 개인이 타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지각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와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기대하는지, 타인의 행동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Heider)고 정의되고 있습니다. 관계에서 사랑과 애정의 욕구, 소속과 통제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게 되면 나타나는 좌절로 우울, 불안, 절망을 경험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는 공유적 관계와 교환적 관계가 서로 얽혀 있다고 사회심리학자인 M.S. Clark은 분석했습니다.



그림책 『두 사람』의 각 장의 그림과 글, 모두,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림책의 첫 관문인 겉표지에서 어두운 청록색의 숲은 여명이 다가오기 전의 가장 어두운 시간을 가리키고 있고, 한 사람은 눈을 뜨고 다른 사람은 눈을 감고 있는 인물이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으며 이 둘은 몇 가닥의 줄에 연결된 집을 매달고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 집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을까요?

집을 매단 줄은 목적지까지 견고하게 유지될 수 있을까요?

여명의 이 시간이 지나면 밝은 하루가 시작되는 희망을 표현하고자 한 것일까요?



앞 면지에서는 서로 마주 보지만 한 사람은 눈을 감고 있는 모습에서 뒷 표지에서는 둘 다 눈을 뜨고 서로를 마주 보고 있습니다. 또 먹어서 줄어드는 사과에서 화병에 담긴 활짝 핀 꽃으로 바뀌어 있는 모습에서 작가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서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책 속으로 잠깐 들어가 볼까요~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것은 함께여서 더 쉽고 함께여서 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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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열쇠와 자물쇠 같아요.

세상 수많은 자물쇠 가운데

단 한 개의 자물쇠만이 이 열쇠로 열 수 있고

세상 수많은 열쇠 가운데

단 한 개의 열쇠만이 이 자물쇠를 열고 닫을 수 있어요.

가끔 열쇠는 없어집니다.

자끔 자물쇠는 막히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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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서로를 열 수 있는 열쇠와 자물쇠가 되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수많은 자물쇠 중에 오직 하나를 열 수 있는 열쇠, 수많은 열쇠 중에 오직 하나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자물쇠처럼, 관계는 그만큼 희귀하고 섬세하지요.

때로 열쇠와 자물쇠가 사라지고, 막히기도 하고, 녹슬기도 하지요.

다시 찾기 위해 헤매거나, 다친 문을 수리하듯 서로를 고쳐야 하기도 합니다.


『두 사람』은, 마치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철학을 말하는 시와 같습니다.

열쇠와 자물쇠처럼 맞물려야만 작동하는 존재들, 하지만 때로는 열쇠가 사라지고, 그렇게 관계는 매끄럽기보다 어긋나기 쉽고, 정답이 없기에 우리는 매일 조율하며 함께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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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두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한쪽으로 나 있는 두 창문과 같아요.

두 창문을 통해 똑같은 것을 볼 수도 있지만,

사실 둘은 다른 풍경을 보여 준답니다.”


이 단순하고도 섬세한 문장은, 관계의 본질을 꿰뚫고 있습니다. 사랑, 우정, 가족… 어떤 이름이든 결국 ‘함께 있음’의 거리는 늘 같지 않고 바라보는 방향도 다를 수 있습니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마음은 어긋나고, 때론 멀리 있어도 깊이 강건하게 이어집니다.


사랑이든, 관계든, 같은 벽에 나란히 선 두 개의 창이 되어 서로 다른 풍경을 보며 함께 살아가는 일이 되겠지요. 때로는 그 다름에 당황하고, 때로는 이해하지 못해 창을 닫고 싶어 질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서로의 창을 통해 세상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것!

같은 벽, 다른 시선.

서로를 비추는 프레임 속에서 두 사람은 그렇게, 조금씩 하나의 풍경이 되어가겠지요.



"두 사람은 같은 벽에 난 두 개의 창이다. 같은 것을 바라보면서도 서로 다른 풍경을 본다. “ 는 의미에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1416?~1492)의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 1465년경>은 놀랍도록 이 그림책과 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우르비노 공작 부부 초상화’는, 우르비노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Federico da Montefeltro, 1422~1482)와 그의 부인 바티스타 스포르차(Battista Sforza, 1446~1472)를 그린 것입니다. 이 초상화는 당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초상화 중 하나로 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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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 1465년경, 우피치미술관




남편인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는 당시 가장 성공한 용병 출신입니다. 1422년 권력자의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16세 때부터 용병으로 경력을 쌓아 19세 때 군인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22세 때 우르비노의 군주가 됐고, 52세 때 용병의 공을 인정받아 로마 교황에게서 공작 칭호를 받았습니다.


두 인물은 하나의 화면에 마주 보고 있는 구도로 그려져 있지만 서로를 보지 않고 있습니다. 시선은 멀리 고정된 채 평행한 고요 속에서 함께 하고 있습니다. 표정도 요동치지 않으며, 두 얼굴은 정교하게 분리되어 있어 정적이고 상징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공작과 공작부인이라는 관계 속에서 권력과 아름다움, 이상적인 균형을 표현한 르네상스의 대표적 이중 초상화라 할 수 있는 ‘개인의 위엄과 이성의 조화’를 담고 있습니다.

정면이 아닌 옆모습으로, 평행선처럼 나란히 존재하는 두 사람 - 공작은 검게 그을린 얼굴을 가졌고, 부인은 백옥처럼 창백한 피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공작은 전장에서 한쪽 눈을 잃고도 단단하게 살아낸 현실의 인간입니다.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는 외면적으로 현실적인 권력자, 전사로서 묘사되고 있으며, 외눈과 꺾인 코는 실제로 전장에서의 상처를 반영하면서도, 경험과 통찰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공작부인 바티스타 스포르차는 죽은 뒤 그려진 인물로서, 현실의 육체를 넘어선 이상화된 여성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백한 피부와 단정한 자세는 그녀를 정신적 가치와 순수함의 상징으로 만듭니다. 기억을 예술로 불러왔으며 어쩌면 죽음을 초월한 르네상스식 부활의 형식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균형 잡힌 구도이지만, 남성과 여성의 표현 방식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상과 현실, 삶과 죽음, 현실과 이상, 남성과 여성, 권력과 미의 불완전한 대칭은 같은 풍경 속 다른 창문처럼 존재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마주하는 삶의 복합성을 시사합니다.


사랑이란, 같은 벽에 나란히 선 두 개의 창이 되어 서로 다른 풍경을 보며 함께 살아가는 일입니다. 어쩌면 창을 닫고 싶어지더라도 결국은 서로의 창을 통해 세상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것입니다. 같은 벽, 다른 시선, 서로를 비추는 프레임 속에서 두 사람은 그렇게, 조금씩 하나의 풍경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관계는 결코 완전히 맞물릴 수 없습니다. 연인, 부부, 친구, 부모와 자식… 모두가 서로 다른 시선과 감정을 가진 두 개의 창입니다. 우리가 그 다름을 이해하려 노력할 때, 마침내 같은 벽에 기대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조셉 루프트(Joseph Luft)와 해리 잉햄(Harry Ingham)이 제안한 ‘마음의 4가지 창/조하리의 창, Johari’s Window’이 있습니다. 두 학자의 이름 앞부분을 합성해서 명칭이 된 것으로 인간관계에서 자기 인식과 상호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입니다. 조하리의 창은, 사람의 마음을 창(window)에 비유해, 개인의 마음을 네 개의 창으로 나누어 자신과 타인이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의 정도를 나타냅니다.

이론을 제안한 학자들은 자기 인식 향상을 위해 자신의 공개 영역(open area, 나와 타인이 모두 알고 있는 영역)은 넓히고, 맹목 영역(blind area, 타인은 알고 있지만 자신은 모르는 영역)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합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솔직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공개 영역을 넓히고,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맹목 영역을 줄여나간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나아갈 수 있습니다 원만해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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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Bright Inventions




초상화는 권력의 표상으로부터 출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권력자들은 권세와 위엄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초상화를 주문하곤 했지요. 그러니 실물보다 미화하고자 하는 의뢰자의 욕구가 반영되어 그려지곤 했습니다. 화가 피에로 델레 프란체스카가 그린 공작 부부의 초상화는 아름답게 그려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공작의 못생긴 매부리코는 더 강조돼 있고, 부인은 아픈 것처럼 창백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측면으로 그린 그림이라 얼굴 정면도 판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화가는 왜 이렇게 그렸던 것일까요?



공작은 헌신적이었던 부인이 사망한 후 이 그림을 의뢰했습니다. 화가는 영웅적이면서도 슬픈 사연이 있는 공작 부부의 초상을 어떻게 그릴지 무척 고심했겠지요. 부인 얼굴을 유난히 창백하게 표현한 건 아마도 그녀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부부 초상화는 권위의 표현을 넘어, 상실과 기억의 초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공작의 그을린 구릿빛 피부는 그가 평생 안락한 궁전이 아닌 치열한 전쟁터에서 살았던 군인임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콧등이 심하게 내려앉은 매부리코는 신체적 결점처럼 보이지만, 사실 전장에서 다친 영광의 상처라고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반면, 마상시합 때 잃은 오른쪽 눈은 공작의 감추고 싶은 과거이자 결점이었기에, 한쪽 눈을 감출 수 있는 옆면 초상으로 결정한 화가의 세련된 방식이었을 것입니다.


뒷면 그림의 풍경은 공작이 지배했던 땅인데 의도적으로 작고 세밀하게 그려 부부 모습을 더 크게 부각하는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화려한 장신구와 의상의 섬세한 표현을 통해 모델의 고귀한 신분을 강조하고, 화가로서 자기 역량도 과감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공작의 배경으로는 험준한 언덕과 질서 있는 구조가, 공작부인 뒤로는 고요한 강과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습니다. 공작이 보여 주고 싶고, 대를 이어 남기고 싶은 이미지는 그런 권력자의 마음을 꿰뚫어 본 초상화 그림으로 화가는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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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화 뒷면



초상화 속에서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는 단단한 현실성을 지닌 군주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공작부인 바티스타 스포르차는 마치 현실 너머의 이념처럼, 죽음 이후의 평온함을 담은 이상화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삶과 죽음, 이상과 현실, 남성과 여성, 육체와 정신이라는 대립적 요소들이 한 화면 안에서 긴장감 있게 공존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그림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남깁니다;

“두 존재가 서로를 마주할 수 있는 진정한 순간은 언제이며,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이 그림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란, 서로 닿지 않으면서도 함께 그림을 이루는 존재다. 그리고 그 거리가 바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려 애쓰는 이유다.”


그림책『두 사람』은 순수한 시선으로,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화>는 르네상스적 인간의 눈으로 말하고 있는데, 두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같지 않지만, 나란히 있음으로써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그 풍경이 늘 평화롭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열쇠가 잃어버려지고, 창은 흐려지며, 자물쇠는 닫히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는 다시 열쇠를 만들고, 창을 닦고, 서로의 벽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일이 되겠지요.



그 두 사람은 사랑하는 연인 혹은 부부 사이일 수도 있고, 부모와 자녀 사이일 수도 있으며, 형제나 자매 사이일 수도, 친한 친구 사이일 수도 있습니다. 둘은 너무 가깝기 때문에, 종종 서로가 얼마나 소중한 사이인지 잊곤 합니다. 마치 물이나 공기가 늘 우리 곁에 있기 때문에,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걸 생각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쩌다 둘 사이에 어떤 사연이 생겨 서로 멀리 또는 오래 떨어져 있거나, 감정에 금이 가거나, 아예 헤어져 버리게 되면 그제야 두 사람은 서로의 사이에 대해 생각하고 깨닫게 됩니다.



『두 사람』은 이렇게도 말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답니다.

세 번째 사람을 만들어 낼 수도 있어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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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부분의 그림과 묘사된 문장은 결혼을 한 두 사람에게는 더 의미 있는 표현이 될 것 같습니다. “가정은 고달픈 인생의 안식처요, 모든 싸움이 자취를 감추고 사랑이 싹트는 곳이요, 큰 사람이 작아지고 작은 사람이 커지는 곳이다”라고 H.G. Wells는 말했지요.

이 문장은 단지 아기를 만든다는 의미를 넘어서, ‘우리’라는 새로운 존재, 혹은 공동의 삶과 기억, 사랑의 결정체를 함께 만들어간다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함께 뜨개질하는 남녀의 그림은 단순한 행위가 아닌, 신뢰와 인내, 사랑을 한 코 한 코 엮어가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뜨개질은 느리지만,
그만큼 단단하고 따뜻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풀리지 않도록
서로를 꼭 껴안은 무늬로 남기를 기원해 봅니다.



이 그림과 글은 독일 최고의 서정시인이라 칭송되는 라이너 쿤체(1933~ )의 <두 사람>이란 시를 떠올리게 합니다.



<두 사람>


두 사람이 노를 젓는다.

한 척의 배를,

한 사람은

별을 알고

한 사람은

폭풍을 안다.


한 사람은 별을 통과해

배를 안내하고

한 사람은 폭풍을 통과해

배를 안내한다.


마침내 끝에 이르렀을 때

기억 속 바다는

언제나 파란색이리라.



라이너 쿤체(Reiner Kunze)는 구동독 작센주 욀스니츠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철학과 언론학을 전공하였고 강의도 했습니다만, 프라하의 봄 이후 정치적 이유로 학교를 떠나야 했고 자물쇠공 보조로 일하다가 1962년부터 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시는 한 시대의 문제를 올곧고 섬세하게, 더없이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증언하며, 모든 생명 있는 것들, 아름다운 것들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대변하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라이너 쿤체의 시 <두 사람>은 특유의 간결하고도 상징적인 언어로, 사랑하는 두 사람의 동행, 협력, 기억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습니다.


흔히 인생은 항해와 같다고도 비유됩니다.
폭풍이 불기도 하고, 방향을 잃기도 합니다. 그 속에서 한 척의 배를 나누어 타는 두 사람, 한 사람은 별을 알고, 한 사람은 폭풍을 안다는 것은... 한 사람은 이상을 말하고, 또 한 사람은 현실을 견디고, 결국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겠지요.


이 시는 단순한 ‘연인’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두 사람이라는 존재가 각자의 지혜와 경험, 감각과 통찰을 바탕으로 서로를 보완하며, 하나의 삶을 항해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별을 아는 사람은 이상과 방향을 제시하고, 폭풍을 아는 사람은 현실의 위기를 통과할 수 있겠지요.

그들이 지나온 바다는 기억 속에서 언제나 푸르지요.


“기억 속 바다는 언제나 파란색이리라.”


이것은 삶의 고난이 지나고 난 뒤, 기억은 결국 아름다움으로 남는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실제 항해는 거칠고 힘들었을지라도, 함께 견뎌냈기에, 그 바다는 언제나 맑고 푸르게 기억될 수 있습니다.

이 시는 사랑을 말하지만, 동시에 공존과 이해, 그리고 추억의 재구성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존재가 ‘하나의 배’를 탄다는 것은 단순한 낭만을 넘어서, 삶 그 자체의 도전이기도 하니까요. 짧은 언어 속에 담긴 두 사람의 삶은 단지 사랑이 아니라, 삶을 함께 짓는 일입니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그림 속 두 사람은 함께 뜨개질을 합니다. 서로 실을 맞물리며 하나의 작품을 완성합니다. 그 장면 위에 쓰인 문장은 그.래.서. 인상 깊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답니다.

세 번째 사람을 만들어 낼 수도 있어요.”



이때의 ‘세 번째 사람’은 꼭 아이만이 아니겠지요.

그들이 함께 만든 작은 세계, 함께 겪은 시간, 말없이 주고받은 신뢰, 그것 모두가 그들의 ‘창조물’이니까요.

시와 그림이 함께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입니다.
사랑은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동적인 창조입니다.
두 사람이 각자의 고통과 언어, 감각과 시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함께 짓는 것’을 선택할 때, 거기에는 단단한 무언가가 생깁니다.



그것이 시간이 흐른 뒤에도 ‘기억 속의 푸른 바다’로 남게 됩니다.



어쩌면 그 바다는 현실 속에서는 폭풍으로 가득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항해를 함께 했기에,
그 바다는 사랑의 색으로 남게 됩니다.



『두 사람』은 세상의 수많은 ‘두 사람’들이 서로의 관계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이해하여, 더 좋은 관계로 가꾸어 가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깊은 사유로 이끄는 비유를 통해, 소중한 두 사람 사이에 깃든 의미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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