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소설1
1
우연히 길에서 본 택시 광고판. 커다랗게 인쇄된 낯익은 얼굴이 슬픈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흔하디 흔한 담배공익광고. 하지만 몇 년간은 잊고 살았던, 마음속 깊은 어딘가에 묻어버린 흔치 않은 얼굴.
한 때는 너무나 사랑해서. 한 때는 너무나 미워해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였다.
더 가까이 다가가 그 눈빛을 확인했다. 그래. 확실히 그가 맞다.
20대의 젊은 날, 추억 속에서 빛이 났던 그 선배가.
연극 연습하러 간다더니. 그렇게 시간이 늦었다며 급하게 전철역으로 달려갔던 그.
그 뒤로는 다시는 보지 않았다. 떠나가는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그리고 이제 다시 만났네. 너는 나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로.
"지혜야! 너 내가 보내 준 카톡 메시지 확인 안 했지? 한 번 봐봐!"
티브이 화면을 가득 메운 잊을 수 없는 그 얼굴이 보였다. 그였다.
"내가 티브이 보다가 깜짝 놀랐잖아! 준영선배 맞지? 드라마에 단역으로 나오네. 운전기사역인데. 너 몰랐지?"
시간이 지나 그는 단역에서 광고, 드라마, 영화에 비중 있는 조연으로 브라운관에 등장했다.
그리고 결국 그를 마트에서 보았다.
화면에서 본 것보다 얼굴이 더욱 검무스름했다. 이마선이 한참 위로 올라갔고 머리숱이 줄었다. 그에게서 세월이 느껴졌다. 그는 대여섯 살짜리 여자아이를 카트에 앉힌 채, 동전교환기 앞에 서 있었다. 옆에서 그를 보았기 때문에 그는 나를 보지 못했다. 내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이내 아는 척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나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로 만났다... 반쪽짜리 만남.
2
4월의 캠퍼스, 초록색의 잔디언덕이 있는 인문학 건물 앞. 우린 헤어지는 여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 그 C.C는 헤어질 수가 있지? 그렇게 죽고 못살더니. 말도 안 돼!"
"그러니까. 우리는 절대 헤어지지 말자. 계속 이렇게 서로 바라보고 있는 거야. 알았지?"
서로 바라보고 있자더니. 지금 우린 각자 다른 곳을 보고 있다. 그땐 그렇게 이별이 쉽지 않았다. 지금은 이별이란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안다. 처음이야 어렵고 죽을 것만 같지. 온갖 세상의 저주는 다 받은 것 같지. 하나님처럼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언덕길을 오르는 기분이었지. 참으로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3
"그래, 한 번 마주쳐보자!"
티브이를 틀어 그가 나오는 드라마를 처음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의 외모는 변했어도 말투, 제스처, 습관적인 행동 등등은 내가 알고 있던 그대로였다. 나는 모든 것을 기억해 내기 시작했다. 즐거울 때, 기쁠 때, 슬플 때 그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머릿속에 그에 대한 잠들어 있던 데이터가 전부 살아났다. 그것은 과거의 공부했던 영단어가 다시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불현듯 떠오르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십 여분이 지났다. 난 티브이를 껐다. 볼 이유가 없다. 선미는 그가 나오는 드라마를 즐겨 보면서 어쩌다가 한 번씩 그의 소식을 전했다.
며칠이 지나, 나는 그를 다시 볼 거라는 확실한 촉이 왔다. 마트에 그는 꼭 다시 올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를 보았다. 저마다 카트를 앞세우고 끌고 다니는 긴 복도 끝, 세탁소 옆 모퉁이에서 그가 아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우리의 사이가 점점 가까워졌다. 굳은 검은 테 안경 너머로 살짝 눈을 가늘게 뜨는 그.
나와 눈이 마주쳤다. 반가운 사람 만난 표정이 아니다. 당혹스러운 그런 것이었다. 그의 냉담한 반응에 나는 그를 째려보았다. 재수 없게. 비싼 바바리코트 휘날리고 다니는 얄미운 모습에 정이 더 떨어졌다.
여기서 우리의 인연은 끝이다. 난 다시 보면 또 째려볼 의향이다.
그런데 인연은 아주 옛날에 끝난 거 아니었나.
4
"준영선배, 저번에 티브이에서 보니까 배우가 되기 전에 생활고에 시달렸다는데, 아기 분유값, 기저귀값이 없어서 배우의 꿈을 포기하려고 했었대. 그런데 아내가 아끼고 살면 되니까,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하면서 지원을 해주었다나 봐. 지금은 쉰 살이 다 되어가지고 밥벌이를 제대로 해서 좋다고 그랬다나 뭐라나 대단하지 않냐? 너 만약에 그 선배랑 결혼했으면 고생을 아주 죽어라 했을 거야. 우리와의 우정도 금이 갔고. 그 선배한테 네가 푹 빠져서 우리하고는 만나지도 않았었잖아."
"그래. 그랬겠다."
"그런데 그 선배가 나온 드라마 대박 나서 암만 조연이라도 회당 몇 억은 받았을 거야. 연기도 아주 일품이던데?"
선미와 통화가 그렇게 끝난 후, 다시는 내 입에서 그 선배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지 않게, 그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지 않도록 티브이를 없앴다.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