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by bony

쇼펜하우어. 그가 말했지. 나이 들수록 자기 자신과 노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좋은 사람들과 실컷 논 순간은 그들이 어쩌다 신경을 거스르게도 하지만 대체로 배가 아프게 웃어 젖힌다.

그런데 왜 모임에서 돌아와 쓸쓸한 집구석으로 돌아가면 허탈함을 느끼는지...

괜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또 다른 도파민을 찾는다.

결국 휴대폰을 들고 뭐 재밌는 자극적인 일이 없나 한다.

이상하지...

마냥 재밌었다가 아니야...

그 뒤끝에 따라오는 씁쓸함. 감초가 들어간 한약의 첫 달콤함에 속아 마시다가, 물로 헹궈도 지워지지 않는 쓴 맛에 혀가 얼얼해지는 그런 느낌. 다시 사탕을 입안에 넣어 뒤끝 있는 쓴맛을 감추려는 의도에 빠진다. 헤어날 수 없는 굴레 같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신경을 거스르게 한 주체였다. 날카롭게 갈려진 바늘이 달린 내 혀가 다른 사람을 깊게 찌른 게 분명하다. 생각 없어 보이는 웃음 뒤에 그들이 내게 눈을 흘렸던 것을 이제야 느낀다. 내게서 썩은 내가 난다.


사람들을 만날수록 내 자신의 못난 구석이 불쑥 튀어나왔다가 들어갔다가 한다.

몰랐었다.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몇 번의 망설임 끝에 말았다. 돌이켜보니 나만 그렇게 떠들어댔다.

이번에는 통화가 늘 즐거운 또 다른 나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말았다. 생각해 보니 똑같은 이야기만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공통의 관심사가 많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마음대로 지껄일 수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말았다. 알고 보니 나 한마디 할 때 그는 열 마디 한 것 같다.

수다가 여자의 스트레스의 해소 수단인데 그것도 말실수를 할까 봐 이제는 조심스럽다.


선명한 검은 그림자가 생기는 그곳으로.

신선하고 신성한 숨이 있는 곳으로.

조용히 두꺼운 외투를 입고, 커다란 가방을 메고 문을 열었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계란 닮은 꽃이 레드카펫처럼 나를 여왕취급해주고 있었다.

그래 걷는 거야.

주머니에서 짤랑짤랑 동전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얼마 있지? 오백 원짜리 2 개, 백 원짜리 3개. 이걸로는 붕어빵도 못 사 먹는다. 슈퍼 앞에 붕어빵 파는 집. 용처럼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희미한 글자를 찾는다. 알면서도. '황금 잉어빵 3개에 2천 원' 그렇지. 못 사 먹는다. 저번에 길바닥에 떨어진 백 원짜리 동전 몇 개를 우습게 알아 그냥 지나친 것이 후회가 다.


'카드는 안 되겠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다시 흰 연기 사이에서 또 다른 글자를 찾았다. '카드 안됨 X'

고개를 돌려버렸다. 내 콧구멍을 막아버렸다.

'그래, 밀가루는 몸에 나빠!' 널 이제부터는 지울 거야. 붕어빵인지 잉어빵인지, 황금 잉어빵인지 하는 녀석.

발걸음을 더욱더 빨리 움직였다. 생각하면 움직이게 되는 내 다리를 신기해하면서.


집에서 다섯 정거장이나 떨어져 있는 도서관에 거의 다 와 갔다. 붕어빵은 내 기억에서 달콤한 냄새와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도서관 일층로비입구에서 2층으로 가는 계단, 아래층에서 라면냄새가 나를 홀리고 있다. 커다란 전자시계가 빨간 불을 내며 이제 막 2자를 만들고 있다.

두 시.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

몰랐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간 줄은...


한도 가득 책을 책수레에 쇼핑하듯 담아냈다. 어떤 책은 예쁜 디자인 표지에 홀려, 또 어떤 책은 신박한 제목에 홀려, 또 다른 책은 작가의 명성에 홀려...

15권의 책을 꾸역꾸역 넣은 다음, 가방을 들었다. 그 무게의 묵직함은 옛날에 지게에 나무를 한가득 담고 하산하는 느낌은 이런 것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려주었다. 지팡이를 무의식적으로 찾았다. 있을 리가 있나?

다섯 정거장. 버스를 탈까? 잠깐의 고민을 하다가 운동삼아 다시 걷기로 했다.


깨죽지를 책이 있는 힘껏 누르고 있었다. 발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자꾸 뒤에서 날 세게 잡아끌었다. 그리고 밑으로 밑으로 추락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오는 길, 풍경이고 뭐고 몸이 앞으로 절로 숙여져서 땅만 봤다.

울렁거리는 길바닥이 춤을 춘다.


그런데 종이 위에 그려진 기하학무늬의 몬드리안의 예술작품을 입체적으로 만났다.

규칙적으로 배열된 바닥타일. 바로 그것이다.


자연의 하늘이 아닌 인공적인 거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사람이 만들었지만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면 자연의 일부가 아닐까? 아름답다.

이렇게 공짜미술관을 지났다. 다시 어깨가 칼로 도려내듯 조여왔다.

조금 더 힘을 내어 시선을 위로 올려 좁아져 가는 길의 맨 끝을 바라보았다.


'5분 뒤, 아니 3분 뒤에 나는 저기에 있을 거야.' 나는 자꾸 칭얼대는 뇌를 달랬다.

조금만, 조금만 있으면 다 왔어라고. 흡사 비수면 위내시경할 때의 의사 선생님과 같이.

이제 내가 평소 애정하는 그래서 이름도 붙여준 '빨강머리 앤의 가로수길'에 도달했다.

그 가로수길, 부녀회에서 만든 무지개로 잘 짠 스웨터를 입은 나무들이 손을 들며 나의 행렬을 응원했다.

"고맙다, 얘들아!"


그때,

주머니 속 핸드폰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윗집 사는 쌍둥이 엄마의 전화였다.

"언니, 뭐 해? 어디야?"

"나 지금 어디 좀 갔다가 집 앞에 다 왔어."

"지금 민지엄마가 넘어온대. 코스트코가자!"


가방에 누가 날개를 달아주었나! 발걸음이 이리도 가벼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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